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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석의 조선 후기史 팩트추적(22)] 조선시대 삼강오륜 중 ‘군위신강’ 보여주는 사례 

조선시대 정치는 현대보다 훨씬 더 투명했다 

“여색을 멀리하십시오” 신하 간언에 “주색의 해악을 누가 모르겠는가… 하지만”
쓴소리 마다하지 않았던 정승들… [승정원일기]에 주군과의 대화 모두 기록


▎숙종 때 인현왕후 폐위를 반대하다 죽음을 맞은 박태보를 기리는 경기 의정부시의 노강서원은 박태보가 귀양 가다 죽은 노량진에 있었는데, 한국전 때 소실돼 지금 자리에 다시 세워졌다.
유교가 국교인 조선에서 인간 사이에 지켜야 할 기본적 윤리는 삼강오륜에 잘 드러난다. 삼강(三綱)은 군위신강(君爲臣綱), 부위자강(父爲子綱), 부위부강(夫爲婦綱)이다. ‘군위신강’은 임금과 신하 사이에 지켜야 할 도리, ‘부위자강’은 아버지와 자식 사이에 지켜야 할 도리, ‘부위부강’은 부부 사이에 지켜야 할 도리를 뜻한다. 오륜(五倫)은 부자유친(父子有親), 군신유의(君臣有義), 부부유별(夫婦有別), 장유유서(長幼有序), 붕우유신(朋友有信)이다. 부모와 자식, 임금과 신하, 남편과 아내, 어른과 아이, 친구와 친구 사이에서 각자 자신이 맡은 역할을 충실히 해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다.

삼강오륜은 봉건적 인간관계를 규정하는 구시대의 유물이라고 말하기도 하지만, 현대 사회에서도 통용될 수 있는 인간 사이의 기본 윤리라는 주장도 만만치 않게 존재한다. 삼강오륜 중 현대 사회에서는 볼 수 없는 것이 임금과 신하 사이의 관계다. 지금은 볼 수 없는 이 관계가 조선시대에는 어떠했는지, 임금과 신하 사이의 대화 몇 가지를 통해 살펴보기로 한다.

숙종(1661~1720)은 14세에 즉위해 세상을 떠날 때까지 47년 동안 왕위에 머물렀다. 조선의 왕 중 비교적 장수했을 뿐만 아니라 재위 기간도 매우 긴 왕이다. 숙종이 다스리던 시대에 여러 가지 일이 있었지만, 일반에 널리 알려진 일은 인현왕후와 장희빈이 관련된 사건이다. 숙종은 인현왕후를 폐위하고 희빈 장씨(장희빈)를 왕비로 삼았는데, 이 과정은 당대 정치 상황과 긴밀하게 연계돼 매우 드라마틱하게 펼쳐졌다. 이 사건은 이미 조선시대에 [인현왕후전]이라는 작품이 만들어져 알려졌고, 현대에는 여러 차례 영화나 드라마로 제작돼 대중의 인기를 끌었다.

숙종 때 명신으로 추앙받은 박태보


▎경기 고양시의 서오릉 명릉 능침. 명릉은 숙종과 둘째 왕비 인현왕후, 셋째 왕비 인원왕후의 무덤이다. / 사진:문화재청
인현왕후를 쫓아내는 과정에서 가장 크게 부각된 인물은 박태보(1654~1689)다. 그는 24세 때 과거에 장원으로 급제해 벼슬길에 올랐다. 재능이 뛰어날 뿐 아니라 의리를 위해서는 자신의 뜻을 조금도 굽히지 않는 인물이었다. 숙종 15년(1689년) 4월 25일, 숙종이 인현왕후를 폐위한다는 말을 듣고, 80여 명의 신하가 그 부당함을 지적하는 상소를 올렸다. 이 상소문을 박태보가 작성했다. 숙종은 상소문을 보고 매우 화가 나 이미 날이 어두웠음에도 불구하고, 상소를 올린 사람 모두를 심문해 처벌하겠다고 말했다. 여러 신하들은 이미 밤이 늦었고, 80여 명을 다 쫓아낼 수도 없을뿐더러, 상소문에 내용이 다 들어 있으니 따로 심문해 밝혀낼 내용이 없다며 숙종을 말렸다. 하지만 혈기 왕성한 29세 국왕의 분노를 막을 길이 없었다. 여러 사람을 심문한 다음 박태보를 심문할 때는 이미 새벽 1시가 넘은 시간이었다. 숙종은 몽둥이로 치는 형벌을 가하면서 박태보를 심문했다. [숙종실록]에 실린 숙종이 박태보와 주고받은 심문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숙종: “사실대로 말하라.”

박태보: “임금께서는 제가 왕비를 위하여 제 절개만을 세우려 한다고 책망하시는데, 제가 못났지만 대의(大義)는 알고 있습니다.”

숙종: “네가 독기(毒氣)를 부리는구나. 네가 더욱 독기를 부려. 매우 쳐라. 매우.”

박태보: “전하께서는 제가 전하를 모함한다고 하시는데, 무슨 말이 모함입니까?”

숙종: “죄인이 스스로 해명하는 말은 헤아릴 것도 없다. 몽둥이로 계속 치라.”

숙종은 박태보를 기어코 죽이려고 했는데, 박태보는 한마디도 실수하지 않고 대답하면서 평상시처럼 태연했다. 숙종은 더욱 화가 치밀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숙종: “몽둥이로 맞으며 심문을 당하면서도, 끝내 고통스러운 비명을 지르지 않으니 참으로 독물이다. 무슨 짓인들 못하겠는가. 빨리 몽둥이로 치라. 네가 기필코 음흉한 부인(인현왕후)을 위해서 절의를 세우고 죽으려는 것은 무슨 의도에서인가?”

박태보: “궁중의 일을 제가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다만 오늘의 일이 심상치 않은 것임을 보고, 신하로서 애통하고 절박한 마음을 견딜 수가 없어서, 이에 서로 의논하여 상소를 올려 우리의 뜻을 아뢴 것입니다.”

숙종: “몽둥이로 입을 치라.”

박태보: “저를 반드시 죽이려고 하시는데, 저는 정말 이해할 수 없습니다.”

숙종: “어째서 그 입을 치지 않는가? 네가 끝내 자백하지 않겠다는 것인가? 끝내 자백하지 않겠는가.”

박태보: “전하께서 저에게 자백하라는 일이 무엇인지를 모르겠습니다.”

이날 박태보에 대한 심문은 이것으로 끝났다. 숙종은 장희빈이 낳은 아들을 인현왕후가 좋지 않게 여기고 있다고 생각해 인현왕후를 죄인이라고 말했다. 그런데 박태보가 죄인인 인현왕후를 옹호하므로, 그는 숙종에게 반역죄를 저지른 것이 됐다. 반역죄는 사형에 처하지만, 숙종은 그를 사형시키지는 않고 처벌의 등급을 한 단계 낮춰 멀리 귀양을 보낸다. 그러나 박태보는 너무 심한 고문을 당해 진도로 귀양 가는 길에 한강을 건너 노량진에 이르러 더는 버티지 못하고 죽고 만다. 인현왕후는 쫓겨난 지 5년 후 복위돼 대궐로 돌아오게 되는데, 이때 박태보도 복권이 된다. 20대의 왕과 30대 신하의 격렬한 다툼은 신하의 죽음으로 마감됐지만, 박태보는 조선시대 내내 훌륭한 신하의 귀감으로 추앙받았다.

영조의 ‘말벗’을 자처했던 김상로


▎조선 제21대 국왕 영조는 여러 치적에도 불구하고 아들인 사도세자를 뒤주에 넣어 죽인 일로 역사에 매정한 아버지로 기록됐다. [승정원일기]를 보면 영조는 자신보다 여덟 살 어린 영의정 김상로와 농담을 주고받을 정도로 허물없이 지냈다.
영조(1694~1776)는 숙종의 손자로 1694년 태어났다. 31세에 왕위에 올라 83세에 세상을 떠날 때까지 53년 동안 조선을 통치했다. 여러 가지 치적이 있었지만, 아들인 사도세자를 뒤주에 넣어 죽인 일로 역사에 매정한 아버지로 남게 됐다. 김상로(1702~1766)는 33세에 과거에 급제한 후 50세 무렵 우의정과 좌의정을 지냈고, 62세에는 영의정에 오르는 등 영조 치하에서 순조롭게 벼슬길을 달린 인물이다.

영조 34년(1758년) 12월 19일의 [승정원일기] 기록을 보면, 이날 밤 10시 반경 영조가 몸이 불편하다고 하자 의관들과 함께 약방의 최고 책임자 김상로가 영조를 만나뵙는다. 의원들이 진찰한 후 특별히 문제가 없다고 하자 영조는 가감이중탕(加減理中湯) 한 첩을 지어서 올리라고 말한다. 의원이 약을 지어 오자 김상로가 이를 바쳤다. 영조가 약을 다 들고, 의원들과 건강에 관한 얘기를 마치고 나서 김상로와 얘기를 시작한다.

김상로: “지금 시간이 이미 밤 11시가 되었습니다. 어젯밤에도 밤새 편히 주무시지 못하셨으니 오늘밤에는 제가 읽어드리는 언문(한글) 소설을 들으면서 주무시기 바랍니다.”

영조: “언문 소설은 잠드는 방법이 아니고, 진서(한문)로 된 책이 잠드는 방법이오.”

김상로: “무슨 말씀이신가요?”

영조: “세간에 이런 얘기가 있소. ‘옛날에 어떤 부인이, 아이가 울자 책으로 아이를 덮어주었소. 옆에 있던 사람이 아이가 우는데 어째서 책으로 덮습니까 하고 물으니, 그 여자가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하오. 아이 아버지가 평소에 책을 듣고 누우면 바로 자니까, 책으로 아이를 덮어주면 잘 것이라고 생각했다는 것이오.’ 그러니 진서로 된 책이야말로 잠들게 하는 물건 아니겠소?”

영조가 이렇게 얘기하자 모두 웃고, 김상로를 비롯한 신하와 의원이 모두 침실에서 나왔다. 그런데 김상로는 이날 밤 3시 무렵 다시 의원들과 함께 영조를 뵙는다. 영조가 몸이 편치 않다고 했기 때문이다. 영조가 입맛이 없다고 하자, 의원들이 여러 가지 음식의 이름을 대는데, 영조는 보리밥과 고추장 그리고 김치가 입에 맞을 것 같다고 한다. 이러는 동안 새벽 4시가 되자 의관들이 다시 진찰해보고 별다른 이상은 없다고 했다.

김상로는 영조에게 육체적으로 별문제가 없지만 마음이 평온하지 못해 불편한 것이니 편안한 마음으로 조섭하시라고 말한다. 그러자 영조는 신하들에게 이미 날이 밝았으니 물러나 쉬라고 해 신하들이 모두 물러나왔다.

임금이 밤 11시에 잠이 오지 않는다고 하니 영의정이 임금에게 한글 소설을 읽어드리겠다고 말하는 것도 재미있지만, 임금이 영의정에게 우스갯소리를 하는 것 또한 흥미롭다. 영조는 김상로보다 여덟 살이 많은데, 1758년이면 영조는 65세고 김상로도 57세다. 이 시대로서는 두 사람 모두 이미 나이 많은 노인이다. 김상로와 영조의 대화는 왕과 신하 사이의 대화라기보다는 두 노인이 실없이 농담을 하거나 건강에 대한 정보를 주고받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조선 말기 오랜 기간 영의정 등의 최고위 관직을 지낸 정원용은 1783년 태어나 91세까지 장수한 인물이다. 그는 20세에 과거에 급제한 이후 죽는 날까지 일기를 쓴 것으로도 유명하다. 1849년 헌종이 후사가 없이 승하하자 영조의 후손으로 강화도에서 농사를 짓던 이원범(철종)이 왕위를 계승하게 되는데, 정원용은 강화도로 가서 철종을 모셔오는 임무를 맡은 것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철종(1831~1863) 재위 기간 조선의 정치는 안동김씨의 세력에 의해 좌지우지되고 있었기 때문에, 철종은 이렇다 할 정치적 업적을 내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그의 재위 기간에 나라는 점차 어려워졌다. 정원용은 20여 년 동안 영의정 등 최고의 관직을 지내면서 항상 청렴결백했지만, 기울어지는 나라를 일으켜 세우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철종의 스승과 다름없었던 정원용


▎서울대 규장각에 보관된 [승정원일기]. 조선시대 임금이 신하들과 주고받은 대화의 모든 내용이 실려 있다.
[승정원일기]를 보면 철종 11년(1860년) 7월 8일부터 철종에게 설사 증세가 있었는데, 약을 써서 11일에는 증상이 없어졌다. 이때 정원용은 영의정이었는데, 약방의 도제조를 겸했던 만큼 의원들이 진찰할 때면 언제나 정원용이 그 자리에 함께 있었다. 7월 15일 의원들이 철종을 진찰하고 완전히 나았다고 했다. 그러자 정원용은 철종에게 건강에 관한 얘기를 하면서 술과 음식을 잘 조절하고, 궁녀를 가까이하지 말라는 충언을 아뢴다. 이때 철종과 정원용이 주고받은 대화 몇 대목을 보기로 한다.

철종: “주색의 해악을 누가 모르겠는가? 즐거움을 탐하는 것은 자기 몸을 아끼지 않는 것인데, 더구나 임금이 된 자가 어찌 자신의 몸을 가볍게 여겨 병이 나도록 돌보지 않겠는가. 나는 평소에 먹고 마시는 일을 절도 있게 하고 있으며, 과식도 삼가고 있소.”

정원용: “성상의 말씀이 비록 이와 같으나 저는 믿지 못하겠습니다. 제가 삼가 듣건대, 칠석날 냉면과 전복을 과도하게 드셔서 체하는 증세가 생기게 되었다는 말이 있습니다. 만약 한 숟가락의 음식과 한 번의 잠을 자는 것도 항상 절도 있게 조심하신다면, 어찌 질병이 생기겠습니까?”

철종: “그날 특별히 많이 먹지 않았고, 게다가 평소 좋아하지 않는 것이었는데, 바로 설사 증세가 있어서 이를 진찰하는 의원에게 말한 것이오.”

정원용: “전하께서는 한창 나이이신데 세자가 없으시니, 매양 왕실을 생각할 때마다 저도 모르게 눈물이 흐릅니다. 제가 지금 삼가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의서(醫書)를 보면, 남자의 원기가 충실하고 정혈(精血)이 굳건한 뒤에 자식을 낳으면 반드시 귀하게 장수한다고 합니다. 만약 자주 정혈을 쓰게 되면, 비록 아이를 가져 순산한다 하더라도 기르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고 하니, 이는 필연적인 이치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오늘부터 시녀를 가까이하지 말고 술잔을 올리지 못하도록 하십시오. 그리고 절기에 따라 몸을 잘 다스리어 후손을 두는 일에 전념하시고, 또한 왕후께서도 진귀한 약제를 드시어 아들이 태어나는 경사가 있게 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왕과 신하의 대화 '승정원일기'에 실려

철종: “경이 끊임없이 간절하게 말하니, 내가 가슴에 새겨 힘써 행하겠소.”

정원용: “전하께서 제 말을 옳다고 여겨 오늘부터 여색을 멀리한다면 저는 기뻐서 춤을 출 것입니다. 그러나 전하께서 제 말을 실천하지 않으면 저는 계속 아뢰어 전하의 마음을 돌리도록 하겠습니다.”

철종: “대신의 말을 어찌 행하지 않을 리가 있겠는가. 더구나 나를 아껴서 하는 말인데… 그런데 주색으로 말하면, 술을 바로 끊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은데, 색욕은 술에 비하면 더욱 제어하기 어렵소.”

정원용: “과연 그렇습니다. 누구라도 여색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있겠습니까마는, 뜻을 세운 것이 견고하다면 또한 어찌 실행하지 못할 수 있겠습니까. 가까이 있는 것과 멀리 있는 것에는 차이가 있으니, 애초에 여색이 앞에 없으면 욕망이 일어나더라도 스스로 제어하기 쉽습니다.”

철종은 7월 7일 냉면과 전복을 너무 많이 먹어 탈이 났는데, 철종이 감추려고 했던 이 사실을 영의정 정원용은 이미 알고 있었다는 것이 이 대화를 통해 드러난다. 그리고 철종이 과음과 과식은 물론이고 지나치게 여색을 탐했다는 사실도 알 수 있다. 또한 철종도 자신이 주색에 빠져 있음을 스스로 인정하고 있었다는 것도 알 수 있다.

이 대화가 있던 1860년 정원용은 78세고, 철종은 30세였다. 두 사람의 대화는 임금과 신하의 대화라기보다는 할아버지가 무절제한 철부지 손자를 타이르는 듯한 내용이다. 정원용의 이런 충정 어린 충고도 소용없이 철종은 3년 후 세상을 떠났고, 정원용은 그 뒤에도 10여 년을 더 살면서 벼슬을 계속했다.

조선시대에는 임금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모두 기록으로 남겨졌다. 그러므로 임금에게 사적 영역이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히 임금이 신하와 나눈 얘기는 거의 모두 남게 된다. [조선왕조실록]에서도 임금과 신하의 대화를 볼 수 있지만, 실록에는 정치적으로 중요한 내용 외에는 실리지 않는다. 그런데 [승정원일기]에는 임금이 신하들과 주고받은 대화의 모든 내용이 실려 있다. 어떤 면에서, 조선시대의 정치는 현대보다 훨씬 더 투명했는지도 모른다.

※ 이윤석 - 한국 고전문학 연구자다. 연세대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고, 2016년 연세대 국어국문학과에서 정년 퇴임했다. [홍길동전]과 [춘향전] 같은 고전소설을 연구해서 기존의 잘못을 바로잡았다. [홍길동전] 이본(異本) 30여 종 가운데 원본의 흔적을 찾아내 복원했을 뿐만 아니라 작품 해석 방법을 서술했다. 고전소설과 관련된 저서 30여 권과 논문 80여 편이 있다. 최근에는 [홍길동전의 작자는 허균이 아니다]와 같은 대중서적도 썼다.

202212호 (2022.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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