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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중앙 특별기획시리즈] 다시 기업가정신이다-한국 경제의 개척자들(11) 신격호 롯데그룹 창업회장 

빈농의 아들, 한국과 일본에서 거인이 되다 

일본 폐허 군수공장 기숙사에서 시작한 풍선껌 사업, 종합제과업체로 성장
관광업·편의점 등 사업 다각화, 제과업체 넘어 호텔·유통재벌로 탈바꿈 성공


▎신격호 롯데 창업회장은 풍선껌으로 시작해 호텔과 유통, 화학까지 아우르는 성공 신화를 써내려갔다. 신 창업회장의 사업 초기 젋은 시절 모습. / 사진:롯데그룹
롯데 창업자 신격호(1922∼2020)는 1922년 10월 4일에 경남 울주군 삼남면 둔기리 377에서 가난한 농부 신진수의 5남5녀 중 맏이로 태어났다. 2년제의 울산농업보습학교를 졸업한 그는 만 19세이던 1941년 혈혈단신으로 일본으로 건너갔다. 돈도 벌고 학업을 이어가기 위함이었다. 도쿄에서 주경야독하던 신격호는 와세다대학 졸업 직후인 1946년 5월 스기나미구의 군수공장 기숙사에 ‘히카리(光) 특수연구소’란 간판을 내걸고 화장비누와 포마드를 생산했다. 이듬해 4월부터는 껌을 제조했다. 종업원 1명과 함께 2엔짜리 풍선껌을 만들었다. 1948년 6월에는 종업원 10명, 자본금 100만엔에 주식회사 롯데를 설립했다. 신격호가 일본 땅을 밟은지 8년째 되는 해다. ‘롯데’라는 상호는 신격호가 감명 깊게 읽은 괴테의 대표작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의 여주인공 이름(샤롯데)에서 유래했다.

신격호는 선두기업 하리스를 따라잡는 것을 목표로 정했다. 하리스는 1955년 당시 일본의 추잉껌 연간 생산액 54억엔 중 25억엔을 차지하고 있었다. 당시 롯데는 12억엔이었다. 신격호는 하리스를 따라잡기 위해 천연치클을 사용했다. 합성수지로 만든 일본산 껌들과 달리 당시 미국산 껌들이 천연치클로 제조된 데 주목한 것이다. 이 같은 ‘고급제품화 전략’을 택한 롯데는 1961년 하리스를 제치고 시장점유율 1위를 차지했다.

신격호는 같은 해 초콜릿 제조에도 착수했다. 껌만으로는 기업을 키우는데 한계가 있었기 때문이다. 롯데제과는 도쿄만 입구 남단에 위치한 우라와(浦和)시의 누마가게지구에 3만3000평의 초콜릿 제조공장을 마련했다. 1964년 1월 세계 최고의 생산설비를 갖춘 해당 공장에서 1호 ‘롯데 가나밀크초콜릿’이 출시됐다. 1969년에는 사이타마현에 캔디공장을 건설하는 등 점차 종합제과업체로 성장했다.

자연스레 신격호는 일본에서 주목 받기 시작했다. 1968년에 일본 프로야구단 다이마이(大每) 오리온즈(현 지바 롯데 마린스)를 인수한 것이 계기였다. 신격호는 일본 총리를 지낸 기시 노부스케(岸信介, 1896~1987)의 소개로 다이마이 오리온즈를 인수했다. 도조 히데키(東條英機, 1884∼1948) 내각의 상공대신이었던 기시는 일본 패전 이후 연합군 측에 의해 A급 전범이 됐으나 기소되지 않고 석방됐다. 이후 정계에 진출한 그는 총리가 됐다. 그는 1964년부터 1972년까지 7년 8개월간 재임한 일본 최장수 총리였던 사토 에이사쿠(佐藤栄作, 1901~1975)의 친형이자 아베 신조(安倍晉三, 1954∼2022) 전 총리의 외조부이기도 하다. 식민지 백성이었던 신격호가 기시와 어떻게 인연이 닿았는지는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

자본금 3000만원으로 일군 롯데제과 신화


▎신격호의 롯데는 제과업체에 만족하지 않고 확장을 거듭했다. 1979년 롯데쇼핑센터 개장 테이프 커팅식에 참석한 신 창업회장. / 사진:롯데그룹
1965년 6월 22일 한국과 일본은 국교를 정상화했다. 일본 자본의 국내 진출은 물론 재일교포의 일본 내에서의 지위 개선 및 조국 방문의 길도 열렸다. 당시 일본 총리는 기시 노부스케의 친동생인 사토 에이사쿠였다. 신격호는 막후에서 한·일 정상회담 성사에 기여한 것으로 알려졌다.

신격호의 모국에 대한 투자는 1965년 12월 한·일 국교정상화와 함께 진행됐다. 장기영 부총리는 신격호에게 국내 기간산업에 투자해줄 것을 종용했다. 신격호는 고국에서 제철사업을 구상해 일본 가와사키(川崎)제철의 도움을 받아 완성한 사업계획서를 한국 정부에 제출했으나 당시 박정희 정부가 제철사업을 국영으로 추진하고 있어 수포로 돌아갔다.

한편 신격호의 바로 아래 동생인 철호는 1959년에 서울 용산구 갈월동에서 ‘주식회사 롯데’와 ‘롯데화학공업’을 설립했다. 그는 둘째 아우 춘호를 불러들여 껌과 캔디, 비스킷, 빵 등을 생산해 국내 소비자의 호평을 받고 있었다. 그런데 신격호가 1966년에 국내 제과업계 진출을 결정하면서 아우들이 운영 중인 ㈜롯데와 롯데공업을 정리하려 하자 동생들이 크게 반발, 형제 간 분쟁으로 이어졌다. 이후 철호는 캔디와 비스킷 부문을 분리해서 ‘메론제과’를 설립했다. 춘호는 라면제조업체인 롯데공업을 차려 각각 분가했으나 신격호가 ‘롯데’란 상호 사용을 불허하는 바람에 ㈜농심으로 변경했다.

1967년 4월 신격호는 국내의 ㈜롯데와 롯데화학공업사를 해산했다. 동시에 그는 자본금 3000만원의 롯데제과를 설립했다. 기능직 사원 350명과 일반직 사원 150명 등 500여 명의 중견기업으로 출발했다. 신격호는 사장을, 넷째 동생 준호는 기획실장을 맡았다. 롯데제과 회장에는 유창순(1918~2010)이 추대됐다. 유창순은 1951년 한국은행 도쿄지점장으로 부임하면서 신격호와 각별한 인연을 맺었다. 유창순은 이후 한국은행 총재, 상공부 장관, 경제기획원 장관 등을 역임하면서 박정희 정부의 경제개발전략수립에 일조했다.

롯데제과 제1공장(갈월동)에서는 껌을, 제2공장(양평동)에서는 빵과 비스킷·캔디 등을 생산했다. 당시 국내 제과업계는 동양제과, 해태제과 등이 시장을 양분하고 있었다. 해태제과는 1945년 10월에 민후식, 신덕발, 박병규, 한달성 4인이 귀속기업인 나가오카제과(永岡製菓)를 공동으로 인수해서 키운 기업이다. 동양제과는 이북 출신의 기업인 이양구가 서울 용산구 문배동의 귀속기업인 풍국제과를 1956년 7월에 인수해서 키운 것이다.

롯데제과는 1970년대 급속하게 사업을 다각화했다. 1970년 10월에 껌과 과자 포장에 필요한 은박지 생산을 위해 동방알미늄을 인수해서 롯데알미늄으로 개명하고 1973년 11월에는 공해방지 시설업체인 롯데기공과 오디오 생산업체인 롯데파이오니아를 각각 설립했다. 1974년 1월에는 사무기기 메이커인 롯데산업, 11월에는 그룹의 무역창구인 롯데상사를 설립했다. 같은 해 4월에는 국내 최대의 청량음료 메이커인 칠성사이다를 인수, 롯데칠성음료로 개명했다. 1978년 1월에는 한일향료(현 롯데식품)를 설립했으며, 같은 해 2월에는 삼강하드 아이스크림을 인수해서 롯데삼강으로 변경했다. 같은 해 4월에는 롯데햄우유를 설립했다.

이 무렵 롯데는 관광업에도 진출했다. 신격호는 1970년 11월 13일 청와대에서 박정희 대통령을 만났다. 그 자리에서 박 대통령은 신격호에게 서울 소공동의 반도호텔을 불하해줄 테니 국제 규모의 호텔을 지어 경영할 것을 권유했다. “날벼락 같은 이야기에 해답을 주저하고 있었다. 그런데 동석했던 이후락 주일대사가 쿡쿡 찌르면서 ‘이 자리에서는 알겠습니다라고 대답만 하라’는 사인을 보내고 있었다. 도리 없이 ‘네, 알겠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경제발전으로 관광 수요가 증가할 것이 예상되는 데다 정권 차원에서 밀어 주겠다는데야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아사히신문] 1988년 6월 5일자)

이날 청와대 면담은 제과업체 롯데가 호텔과 유통재벌로 탈바꿈하는 출발점이었다. 1974년 6월 금싸라기 땅인 반도호텔 매각작업에 단독 응찰해 41억9800만원에 낙찰 받은 신격호는 반도호텔 옆의 국립도서관도 확보했다. 인근 유명 중식당 아서원 소유권도 당시 김종필 국무총리의 지원을 받아 수월하게 인수했다. 반도호텔, 국립도서관, 아서원을 허물고 그 자리에 지상 38층, 지하 3층, 객실 1020실의 특급호텔인 호텔 롯데를 신축해 1979년 10월에 완공했다. 1978년 9월에는 경남 마산 크리스탈관광호텔을 인수, 롯데크리스탈호텔로 명명했다. 같은 해 평화건설을 인수해 롯데건설로 변경했다. 국내 및 중동 건설시장에 진출하기 위함이었다. 동시에 롯데의 유통업 진출도 성사됐다.

제과·호텔·쇼핑, 롯데 성장 이끈 삼두마차


▎신격호 롯데 창업회장이 1980년대 초 롯데제과 공장을 순시하는 모습. 그는 현장을 중시하는 경영인이었다. / 사진:롯데그룹
1979년 11월에는 호텔 롯데 옆에 국내 최대 규모의 롯데백화점을 건설했고, 10월에는 국내 최초의 패스트푸드 체인업체 롯데리아를 설립했다. 1979년 ‘12·12쿠데타’로 권력을 장악한 전두환의 국보위는 소공동 산업은행 부지를 롯데에 넘겨주도록 압력을 행사했다. 롯데는 이 땅에 주차장이 아니라 호텔 신관을 건축, 호텔객실과 백화점 면적을 대폭 확대했다. 덕분에 서울시내 중심가에 롯데타운이 생겨날 수 있었다. 롯데그룹 성장을 견인하는 삼두마차인 제과, 호텔, 쇼핑체제를 완성한 것이다.

롯데는 이 무렵 중화학 공업에도 진출했다. 1970년대 말의 국내 석유화학 산업은 국영 한국종합화학의 자회사인 호남에틸렌과 여수석유화학, 그리고 한국 정부와 일본 미쓰이물산이 50:50 비율로 합자한 호남석유화학이 주도하고 있었다. 호남석유화학은 전남 여천공단 내에 에틸렌(연산 35만t)을 베이스로 폴리에틸렌, 폴리프로핀 등을 생산하는 대규모 공장 건설을 추진 중이었다. 정부는 석유화학공업 민영화를 이유로 이 회사의 정부 지분 매각을 추진했다. 정부 지분 불하를 놓고 롯데와 현대그룹이 경쟁했으나 롯데가 1979년 1월에 정부 지분 40%를 160억원에 매입했다. 1997년 3월 롯데는 일본 미쓰이그룹이 보유 중이던 이 회사의 지분 33% 중 23%를 인수해서 이 회사의 최대 주주가 됐다.

이같이 한국 롯데는 1967년 창업한 지 10여 년 만에 기업 인수 및 설립 등을 통해 식품, 호텔, 유통, 건설, 전자, 관광, 석유화학으로 다각화하는 데 성공했다. 1970년대 말에는 10대 대기업 집단으로 분류되기 시작했다.

롯데그룹, 사업 다각화로 국내 10위 메이저 등극


▎신격호 롯데 창업회장과 박정희 대통령의 만남은 제과업체 롯데가 호텔 재벌로 탈바꿈하는 출발점이었다. 지난 1979년 소공동 롯데호텔 개관식에 참석한 신격호 롯데 창업회장. / 사진:롯데그룹
롯데제과가 국내 제과업계의 정상에 올라선 것은 1979~80년이었다. 선두주자인 해태제과와 동양제과와의 경쟁에서 롯데는 1980년 매출액 1000억원을 달성해 업계 수위에 오른 것이다. 롯데제과는 86아시안게임과 88서울올림픽 제과공급업체로 지정되는 등 1986년에는 매출액 2000억원을 돌파했다.

롯데는 1980년 들어 다각화에 더욱 적극적이었다. 1980년에는 식품저장업체인 롯데냉동㈜을 설립하고 사진감광제 메이커인 한국후지필름을 인수했다. 한국 프로야구 원년인 1982년에는 ㈜롯데자이언츠를 출범시켰으며, 광고대행업체인 대홍기획과 롯데물산도 설립했다. 1985년 2월에는 옛 산업은행(서울 소공동) 부지에 35층의 롯데호텔 신관을 착공, 1988년 개관했다. 같은 해 11월 12일에는 서울 잠실의 대지 2만3000평에 호텔, 백화점, 쇼핑몰, 스포츠센터 등을 아우르는 롯데월드를 오픈했다. 1991년에는 롯데백화점 매출이 1조5000억원을 기록, 업계 전체 매출액의 30%를 점했다.

1984년 5월에는 ㈜호텔롯데부산을 설립했으며, 같은 해 11월과 12월에는 ‘호텔롯데 부산’과 롯데백화점 부산점을 오픈했다. 당초 ㈜한양 소유였던 잠실의 제2롯데월드 부지는 1981년 ‘88올림픽’ 서울 유치가 확정되면서 전두환 정부가 롯데에 넘긴 것이다. 아울러 롯데는 1987년 5월 공공자산인 석촌호수 개발권도 확보했다. 1987년 12월 12일에는 송파구 신천동 29번지 일대의 서울시 소유 체비지 2만6000평도 불하받았다.

1990년대에는 비유통 관련 다각화에 박차를 가했다. 1990년 5월 일간지 국제신문에 지분투자했으며 1994년 10월 ㈜코리아세븐을 인수해 편의점 사업에도 진출했다. 1995년 11월에는 부산할부금융을 설립, 금융업에 진출했다. 1996년 10월에는 롯데리아와 일본 미쓰이물산이 자본금 15억원의 롯데로지스틱을 설립했다. 계열사들의 물류비 절감과 유통부문 경쟁력을 강화할 목적이었다.

1996년 12월에는 전산용역 및 컴퓨터, 주변기기 도소매업체인 롯데텔레콤(현 롯데정보통신)을 설립했다. 1998년 1월부터 별정통신사업을 시작했으며 1999년에는 롯데제과·롯데호텔·㈜롯데리아의 정보시스템을, 2000년 인천국제공항 1, 2청사 면세점의 시스템을 구축했다. 같은 해 한국후지필름, 호남석유화학(현 롯데케미칼), 롯데칠성의 정보전략계획(ISP)과 업무 프로세스 재설계(BPR)를 완료했다. 1997년 7월에는 세계적 아케이드게임 개발 및 운영업체인 일본의 ㈜세가 엔터프라이즈와 50:50 합작으로 자본금 110억원의 ㈜롯데세가를 설립했다.

외연확장 나선 롯데, 국내 편의점 혁명 주도


▎신격호 롯데 창업회장은 유통업에 이어 관광업에서도 성공 가도를 달렸다. 신 창업회장은 지난 2010년 롯데월드타워 디자인 설계를 직접 챙겼다. / 사진:롯데그룹
이처럼 신격호가 일본에서 쌓은 재력과 신용으로 30여 년간 30억여 달러를 투입해서 완성한 한국의 롯데그룹은 1997년 기준 계열사 29개사, 종업원 3만5000여명, 매출액 9조원을 자랑하는 국내 10위 메이저 기업으로 등극했다. 당시 롯데그룹은 총매출액의 60% 이상을 서비스 업종에서 벌어들이는 부동산·유통 전문 그룹이었다. 동시에 한국롯데의 모체인 일본의 ㈜롯데는 1990년 일본 최정상의 제과업체로 등극, 일본 200대 기업에 진입했다.

2000년대 이후의 다각화는 그간에 벌여 놓은 사업들의 외연 확대였다. 첫째, 유통사업 확장의 시작은 2002년 7월에 롯데쇼핑이 경쟁업체인 미도파백화점을 5420억원에 대농그룹으로부터 인수한 데서 비롯됐다. 2003년 11월에 한화그룹 계열의 한화마트와 스토어 24개 점포를 1700억원에 인수했으며, 2006년 8월에는 우리홈쇼핑(현 롯데홈쇼핑)의 지분 53.03%를 4667억원에 인수했다. ㈜우리홈쇼핑은 2001년 5월 29일 ㈜아이즈비전, ㈜경방, ㈜행남자기 등의 공동출자로 설립됐다. 같은 해 9월 인터넷 쇼핑몰 우리닷컴(woori.com)도 오픈했다. 2003년에는 스카이라이프 위성방송 사업을 개시했으며, 2005년 1월에는 대만과의 합작법인인 TV홈쇼핑 방송을 개국했다.

롯데쇼핑 유통사업부문인 롯데슈퍼는 2007년 3월 호남지역에서 16개 점포를 운영 중인 빅마트의 점포 14개를 800억원에 인수했다. 2007년 10월에는 슈퍼마켓 5개를 운영하고 있는 나이스 마트를, 2010년 2월에는 GS리테일로부터 백화점 3곳과 마트 14곳을 각각 인수해 덩치를 키웠다. 2010년 1월에는 롯데면세점이 애경그룹 계열의 AK면세점을 2800억원에, 같은 해 2월에는 롯데쇼핑이 GS리테일의 백화점·마트부문을 1조3000억원에 각각 인수해 기존의 유통부문을 크게 강화했다. 특히 편의점 사업이 급성장했다.

국내 프랜차이즈업계는 1988년 서울올림픽을 계기로 전환점을 맞이했다. 24시간 영업하는 편의점의 성장이 두드러졌다. 세븐일레븐이 1989년 5월 국내 1호점인 서울의 올림픽선수촌점을 개장한 가운데 훼미리마트, LG25(GS25), 바이더웨이, 미니스톱 등이 1991년까지 수도권에 300여 개의 매장을 열었다. 편의점은 종래 주먹구구식으로 운영되던 구멍가게에 레스토랑 및 중소형 매장 등을 겨냥한 판매시점 관리(POS, Point of Sales) 네트워크를 설치해 ‘리테일 혁명’을 가져왔다. 고객들의 구매 패턴을 분석해 과학적인 마케팅과 물류, 머천다이징 전략을 펼칠 수 있도록 만든 것이다.

유통업계의 선두주자인 롯데는 1994년 세븐일레븐을 운영하는 코리아세븐을 인수해 편의점 사업에 본격 진출했다. 2010년 1월 업계 4위 바이더웨이를 2740억원에 인수한 코리아세븐은 연매출액 4조원 대의 국내 최대 편의점 업체로 성장했다.

신격호 별세로 한국 창업 1세대 경영시대 마감


▎신격호 롯데 창업회장의 꿈은 롯데월드타워의 완성으로 현실화 됐다. / 사진:롯데그룹
신격호는 89세이던 2011년 2월에 총괄회장이 되어 경영일선에서 한발 물러났다. 둘째 아들 신동빈이 롯데그룹 회장에 취임했다. 신격호는 슬하에 2남 2녀를 뒀다. 장남 신동주는 1954년에 신격호의 둘째 부인 시게미쓰 하쓰코와의 사이에서 태어났다. 일본 아오야마(靑山學院)대학에서 경영학을 전공한 그는 1990년에 일본 롯데그룹 이사로 인연을 맺은 뒤 2003년에는 한국의 롯데쇼핑 이사를 역임했다. 2015년 일본 롯데홀딩스 부회장 직에서 해임된 후 현재 광윤사 대표만 맡고 있다.

신동주보다 한 살 아래이자 시게미쓰 하쓰코의 둘째 아들인 신동빈은 1977년에 아오야마대학 경제학과를 졸업했다. 1980년에 미국 컬럼비아대학원에서 MBA를 이수한 그는 1981년부터 8년간 일본 노무라증권에 근무했다. 이후 신동주보다 2년 빠른 1988년 일본 롯데상사 이사로 경영에 참여했다. 그는 1990년에 호남석유화학(롯데케미칼) 상무로 자리를 옮기면서 한국 롯데에 발을 디뎠다. 1997년에 롯데그룹 부회장으로 승진했으며 2004년 10월에는 한국 롯데그룹의 중심인 호텔롯데 정책본부장에 재직하다 회장이 됐다.

이후 롯데그룹의 경영권 상속문제가 수면 위로 부상했다. 신격호 창업회장이 2013년부터 건강이 나빠지면서 신동주, 신동빈 형제 간의 경영권 다툼이 벌어졌다. 결국 신동주가 롯데그룹 경영에서 손을 뗐다. 신격호 명예회장은 2019년 10월에 경영비리 등의 혐의로 대법원으로부터 징역 3년의 실형을 선고받았고, 4개월 후인 2020년 1월 19일 향년 99세로 별세했다.

신격호 명예회장은 일본에서 무일푼으로 껌 사업을 시작, 1965년 한·일 국교 정상화를 계기로 한국에서 롯데를 국내 6위의 대기업 집단으로 성장시킨 ‘거인’이었다. 신 명예회장의 별세로 이병철 삼성 회장, 정주영 현대 회장, 구인회 LG 회장, 최종현 SK 회장 등 이 땅의 ‘창업 1세대 경영인’ 시대가 마감됐다.

※ 이한구 - 고려대학교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경제학 석사를, 한양대학교에서 경제학 박사를 취득했다. 수원대학교에서 경제학을 강의하며 경상대학장, 금융공학대학원장을 지낸 뒤 현재 명예교수로 있다. 국내기업사 연구의 권위자로 (사)한국경영사학회 부회장을 지냈다. 저서로 [일제하 한국기업설립운동사]와 [한국재벌형성사], [대한민국기업사], [한국의 기업가정신] 등이 있다.

202311호 (2023.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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