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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년 에세이] 60년 정치학 공부한 사람의 새해 소원 

낡은 중우정치(衆愚政治)의 시대에 사는 고통, 이제 끝내자 

생산 의욕 감퇴·지하경제 심화… 상속세 내려 사회 갈등 풀어야
충간(忠諫)할 사람들은 숨어… 충신 열 명이 간신 하나를 못 이겨


▎로마의 멸망을 초래한 것은 바로 요즘 말로 민중주의라고 하는 중우정치였다. 사진은 민중이라는 이름으로 공화의 꿈을 굳혀보고자 했다가 비참하게 죽은 그라쿠스 형제의 흉상.
40년 전, 화엄사(華嚴寺) 인근의 콘도미니엄에서 대기업 전원 연수회의 강사로 간 적이 있다. 장소와 업무 때문에 열 팀으로 나누어 격 3일로 10회의 강의를 하는데 강의가 없는 날이면 각황전(覺皇殿)이나, 풍경과 독경 소리로 무료를 달래며 마음 수양을 했다. 그런데 그때의 수양은 다 날아가고 지금은 그 입구 매점에 걸린 목욕 수건의 시구(詩句)만이 선연히 머리에 남아 있다.

묵은해니, 새해니 가리지 말게.
가을 가고 봄 오니 해가 바뀐 듯하지만
보게나 저 하늘이 달라졌는가?
사람들이 어리석어 꿈속에 살지.


다시 한 해가 바뀐다. 새 각오와 소망으로 부풀지만, 세상은 달라진 것이 없다. 어제보다 오늘이 낫고, 오늘보다 내일이 나으리라는 꿈속에 우리는 살지만, 역사의 소용돌이는 그런 행운을 우리에게 쉽게 허락하지 않는다. 되는 일도 없고, 안 되는 일도 없이 무엇이 달라졌는가? 그렇다고 넋 놓고 좋은 세상 오기만을 기다릴 수도 없지 않은가? 명색이 60년 정치학을 공부한 사람으로서 그래도 새해에 덕담 한마디 해달라는 원고 청탁을 받았을 때, 문득 첫 생각으로 떠오르는 명제는, “이제 그 철 지난 중우정치(衆愚政治, mobocracy)의 시대는 막을 내렸으면” 하는 간절한 소망이었다.

로마 그라쿠스 형제의 꿈과 좌절


▎지하경제가 커져가고 있다. 한국은행이 발권한 5만원 권의 장폐율(藏幣率)은 고금리 시대인 지금도 45%를 넘는다.
정치에 덕(德)과 실(失)을 모두 경험하고 끝내 로마의 멸망을 초래한 것은 바로 요즘 말로 민중주의라고 하는 중우정치였다. 여러 차례 굴곡이 있었지만 포악한 집정관과 타락한 원로원, 그에 기생하는 부자들의 행태에 식상한 로마의 시민과 지도자가 민중이라는 이름으로 공화의 꿈을 굳혀보고자 했던 것은 카이우스 그라쿠스(Caius Gracchus, 기원전 153~121)였다.

카이우스에게는 물론 개혁을 하려다가 비참한 최후를 마친 형 티베리우스 그라쿠스(Tiberius Gracchus : 기원전 163~133)의 꿈과 좌절에 대한 복수심과 그 미완의 꿈을 이뤄보려는 소명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티베리우스의 기본적인 생각은 낮은 계층에 속한 사람들에 대한 연민이었고, 그것은 좋은 뜻에서 출발한 것이었다. 그가 보기에 자기 땅에서 쫓겨난 가난한 사람들이 많았고, 그런 사람들은 더 이상 병역(兵役)에 열의를 보이지 않음으로써 투사로서의 로마제국이 국력의 쇠락을 겪고 있는 것이 안타까웠다. 더 나아가서 이탈리아를 떠도는 짐승도 모두 몸을 숨길 토굴을 가지고 있지만, 조국을 위해 싸우다 죽은 용사들에게는 공기와 햇볕밖에는, 흙 한 덩어리도 없었다.

티베리우스의 이러한 판단은 결국 부호들에 대한 증오로 번져갔다. 부자들이 그만한 재산을 모으기까지 저지른 죄악이야 동서고금에 더 말할 나위가 없다. 그러므로 티베리우스에 맞선 연합 전선은 그들이 내세운 구실보다는 그에 대한 부자들의 증오와 분노 때문이었다. 왜 부자들은 그렇게 황금에 집착하는가? 물론 나 자신의 행복을 유념한 탓이겠지만 인간이 돈 때문에 죄를 짓는 것은 자식에게 물려주려는 욕심 때문이다. 결국 재산의 핵심은 상속(相續)이다.

인간이 돈으로 말미암아 자식에게 애착을 갖고 죄악을 저지르는 것은 부모에 대한 효도보다 앞선다. 그래서 황금에는 한계 효용 체감의 법칙이 작용하지 않는다. 재화에 대한 집착은 목숨에 앞서는 경우가 많다. 로마의 부호들은 이제 더 이상 물러설 땅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들이 티베리우스의 시체를 불법적이고도 야만적으로 다룬 일로써 그런 점을 강렬히 입증하고 있다. 그의 동생 카이우스가 밤에 시체를 거두어 매장할 수 있도록 해 달라고 요구했을 때 정적들은 그 말을 듣지 않고 다른 시체와 함께 강물에 던져 버렸다. 그의 본의와는 달리 민중에 대한 애착은 그렇게 삶을 마감케 했다.

형의 뜻과 허망한 죽음을 목격한 카이우스는 민중의 분노가 폭발할 때까지 기다렸다가 폭군 정치와 금권 정치를 몰아내는 데 성공했다. 카이우스의 법에 따르면, 민중의 지도자들이 연설할 때는 원로원을 바라보지 말고 민중을 바라보아야 했다. 이 제도는 작은 변화였지만, 이는 곧 귀족 정치에서 민주정치로 정체가 바뀌었음을 뜻했다. 민중의 덕에 집권자가 된 정치인은 그들이 자기의 삶과 연결되어 지내므로 그 과정에서 대중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도 끝내는 그가 믿던 민중에게 배신을 겪으며 다리목에서 힘이 빠져 시종의 손에 죽음을 겪는 것으로 생애를 마쳤다. 그렇게 로마의 민중주의는 끝났다.

부자를 죄인으로 모는 것은 좋은 정치 아니다


▎한국은 모든 것이 다 선진국이고 세계 10대 강국인데 정치만 후졌다는 논리는 맞지 않는다. 그 나라 국회의원의 수준은 그 나라 국민의 수준과 정확히 궁합이 맞기 때문이다. 사진은 20대 국회의 한 법안 표결 장면.
지금 한국의 경우가 그렇다. 우리가 원했든 원치 않았든, 우리는 이제 자본주의에서 물러서기 어려울 만큼 재화에 익숙해 있다. 그런데 상속세는 유산의 50%를 넘어 세계 최고 기록을 세우고 있다. 지금 한국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회적 갈등은 바로 상속세의 문제이다. 뼈저리게 벌어봤자 자식에게 대물림을 할 수 없을 때 그 결과는 두 가지 현상으로 나타난다. 첫째는 생산 의욕의 감퇴와 그에 따른 자본 유출이 심각하게 전개된다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재산 은닉과 탈세, 그리고 지하경제의 심화이다. 2022년도를 기준으로 한국은행권 가운데 5만원 권의 발행고는 21조원 정도인데 그 가운데 사회 유통률은 55%를 넘지 않고 있다. 그것도 최근의 고금리로 말미암은 예치율의 상승 때문이며, 지난 몇 년 동안의 최저 금리 시절에는 유통률이 30%에 지나지 않았다.

이를 달리 표현하면 한국은행이 발권한 5만원 권의 장폐율(藏幣率 : 개인의 금고에 숨겨 놓은 현금의 비율)이 저금리 시대에는 발행고의 70%에 이르며, 고금리 시대인 지금도 장폐율이 45%를 넘는다는 점이다. 경제적으로 볼 때 장폐율은 지하경제와 비슷한 수치로 올라간다. 여기에서 지하경제란 “세금을 물지 않고 거래된 화폐 수익(untaxed income)”, 곧 탈세를 의미한다. 2023년 11월 29일자 각종 매체의 보도에 따르면 체납한 악덕 재벌의 채무 징수가 2조원이라 하지만 실제로 나타나고 있는 30조원에 비추면 15%밖에 환수되지 않았다.

이제 여기에서 왜 지하경제가 사회악인가에 대한 논의를 하는 것은 진부하다. 그것은 사회정의의 문제를 넘어서 국가 경제 침체의 원인이 되고 있다. 한국 경제의 해결 방안은 “부자가 그 개인 금고 안의 돈을 풀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탈세로 번 돈을 내놓을 수가 없다. 세금 없이 자식에게 재산을 상속하는 길은 장폐의 방법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가진 무리의 상속세를 내리는 것이 이 사회의 갈등을 푸는 중요한 키워드이다.

그럼에도 민중들은 상속세를 내려서는 안 된다고 외친다. 그들은 재화의 분배를 위해서가 아니라 재산가를 협박하기 위해서 그렇게 외친다. 그들은 낙수(落水) 효과, 곧 고소득층의 소득 증대가 소비 및 투자 확대로 이어져 궁극적으로 저소득층의 소득도 증가하게 되는 효과를 믿지 않으려 한다. 소득불균형은 자본주의가 비켜갈 수 없는 필요악이다. 아담 스미스(Adam Smith)는 가진 무리가 베풀리라고 성선설을 끝까지 믿은 것이 실수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기댈 곳은 그곳밖에 없는 것이 자본주의의 비극적 숙명이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철강 산업을 이끈 박태준(朴泰俊), 전자 산업을 이끄는 이재용(李在鎔), 자동차 산업을 이끄는 정의선(鄭義宣), IT 산업을 이끄는 최태원(崔泰源), 방위 산업을 이끄는 김승연(金昇淵) 회장이 애국자다. 우리는 그들의 구설과 허물을 잘 알고 있으며, 그들의 치부 과정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그런 허물이 그들의 공적을 덮을 수는 없다. 그들의 허물은 다른 곳에서 다시 논의할 문제이다. 세상을 떠나면서 조국에 14조원을 헌납하고 간 인물이 한국 역사에 일찍이 있었던가? 그런 점에서 부자를 죄악으로 보는 것은 그리 좋은 삶의 방법이 아니다.

근현대사에서 이러한 민중주의가 얼마나 덧없는가를 개탄하며 정계에서 물러나 집필에 몰두하여 성공한 인물이 곧 영국의 철학자 밀(John S. Mill)이다. 그는 타락한 민중의 요구에 진절머리를 치면서 아무리 민중의 뜻이 소중하다 해도 그들의 총의는 한 현자(賢者)의 생각에 미치지 못한다는 신념으로 [자유론] (1859)을 썼다. 그는 민중은 어리석고 탐욕스러우며 지식인이 다스려야 한다는 철저한 주지주의자였다.

밀은 아마도 청정(淸定)한 정치를 꿈꾸었던 것 같다. 그러나 그 결과는 참담했다. 그리고 자본주의를 저주하며 정계를 떠났다. 그러나 냉정하게 생각해보면 그가 어리석었다. 그가 바라던 식의 선거라면 신이 출마했었더라도 낙선했을 것이라고 후세의 정치가들은 실소(失笑)했다. 돈이 안 드는 선거는 [성경] 이나 [법구경] 에서도 잘 안 보인다. 그런 소망을 가졌더라면 당초부터 정치에 발을 들여놓지 말았어야 한다.

그 나라 국회의원 수준은 그 나라 국민 수준


▎새해는 철 지난 중우정치의 시대가 막을 내렸으면 하는 소망이 있다. 사진은 제 22대 국회의원 선거에 대비한 선관위의 개표 실습 장면.
엘리트주의자들은 정치인이 잘못되었다면 그를 뽑은 사람의 책임이 크다고 믿는다. 한국은 모든 것이 다 선진국이고 세계 10대 강국인데 정치만 후졌다는 논리는 맞지 않는다. 그 나라 국회의원의 수준은 그 나라 국민의 수준과 정확히 궁합이 맞기 때문이다. 정치가 아름답고 장엄하려면 지혜와 공의로움에 더하여 힘과 행운이 함께 따라야 하는데, 국민이 그를 뒷받침하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정치란, 지혜로운 사람들이 발의하지만 바보들이 그 법안을 결정하게 되었다. 그런 정치를 하다 보면 자기 잘못으로 자신과 국민을 모두 망가뜨린다.

정치인이란 모름지기 나로 말미암아 행복하게 사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는 것을 곧 내 행복으로 여겨야 하는데, 세상의 모습은 그렇지 않다. 조국의 운명은 공천과 당선에 앞서지 않고 있다. 여기에 기름을 붓는 것이 곧 중우(衆愚)이다. 역사를 돌아보면, 민중에게 마구잡이로 끌려가는 정치인은 자신의 지위를 되찾을 수도 없고 파멸로 가는 길을 막을 수도 없다. 민중은 공명한 사회를 바라는 듯하지만, 속내를 들여다보면 그들은 부정선거를 치르지 못하게 하는 지도자를 가장 미워한다. 민중은 정의를 따르는 것이 아니라 돈다발을 흔드는 정치인을 따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패한 정권과 분열된 정권이 싸웠을 때 부패한 정권이 패배한 사례가 드물다.

민중의 손에 죽거나, 민중과 함께 죽거나

결국 정치인은 민중의 뜻을 좇다가는 그들과 함께 죽고 그들의 뜻을 거스르다가는 그들의 손에 죽는다. 여기에 더 사태를 악화시키는 것은 민중 지도자에게는 가까운 친구들이 그에게 진실을 말해 주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충간(忠諫)할 사람들은 민중의 공격이 두려워 숨기 때문이다. 이럴 때는 충신 열 명이 간신 하나를 못 이긴다. 민중이 선출한 정치인보다는 민중을 위해 지혜롭게 충고하며 이끌어갈 지도자가 있어야 하는데 그럴 분위기는 이미 지났다. 지도자도 이미 취해 있기 때문이다. 민중의 손에 선출된 지도자는 민중을 위해 지혜롭게 충고할 수 있어야 진정한 정치인인데 이미 그런 사람은 부러지거나 숨었다.

지금의 한국의 정치가 그렇다. 지금 한국의 국회는 정치란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정치란 이렇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집단이라는 것을 나는 역사에 기록해 두겠다. 일국의 다수당 지도자가 “깨끗하게 지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나”라고 일갈했다. 그것은 “깨끗하게 지느니 더럽게 이기는 것이 낫다”라는 것을 천하에 공포하는 것인데, 이 말이 얼마나 무지막지하며 얼마나 국민을 우습게 보는가를 잘 보여주지만, 국민에게는 분노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함께 “빨대”를 꽂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나라에 더 살 희망이 있는가’라고 탄식하며 지난달에 85세의 나이로 미국 이민을 떠나는 한 원로 정치학자의 이슬 맺힌 눈빛에 가슴이 먹먹했다.

임기 다 마치고 빨 것 다 빨아먹고 나가니 손해날 것 없다고 어느 여인은 유죄판결에도 희희낙락하지만, 어차피 가야 할 감옥이라면 늦게 갈수록 더 고생스럽다. 여성은 더욱 그렇다. 정치의 물레방아에는 자연스레 멈추어야 할 때가 있다. 삶의 열정이 모두 사라진 뒤에 정치적 투쟁을 계속하는 것은 누추해 보인다. 빨대 정권은 지난 5년으로 충분했다. 그래서 나는 시인 이형기(李炯基)의 다음 시구를 좋아하며 저들도 한번 돌아보기를 바란다. 어차피 못 알아듣겠지만. 그는 이렇게 읊었다.

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낙화](洛花, 1963)에서


186가지의 특혜를 누리며, 국민소득 대비 특혜의 정도는 세계 3위이며, 효율은 OECD 38개 국가 가운데 37위인 저 인면수심(人面獸心)의 군상들은 이 시와 나의 글을 보면서 이렇게 말하겠지.

“네가 국회의원의 맛을 알아?”

- 신복룡(전 건국대학교 석좌교수, 정치학) simon@konkuk.ac.kr

202401호 (2023.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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