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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새해 한국 주요 산업 기상도 

미·중 패권 경쟁에 반도체 수혜 기대… 기술 격차 유지하면 한국 웃는다 

인공지능(AI) 기술 발달할수록 고성능 반도체 산업도 성장
중국 제조업 경쟁력 상승… 철강·화학·기계 물량공세 대비해야


▎미·중 기술패권 경쟁은 중국의 기술 추격을 뿌리치는 데 도움을 주고 있다. 반도체를 배경으로 한 미국 성조기(왼쪽)와 중국 오성홍기. / 사진:로이터
증권사 애널리스트로서 일하다 보면 ‘올해는 무슨 주식이 좋을까요’라는 질문을 많이 받는다. 누구나 알 만한 한국 대표 기업들을 거론하면 ‘그런 뻔한 주식 말고 좀 화끈한 거 없을까요’라는 질문이 돌아오기 일쑤다. 이런 분들께 소개해 드리고 싶은 얘기가 있다.

19세기의 저명한 투자자였던 앙드레 코스톨라니는 경제와 주식시장의 관계를 ‘산책하는 주인과 개’로 비유했다. 산책을 하다 보면, 개와 주인은 산책로를 따라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움직인다. 어떤 때는 개가 앞서서 달리기도 하고, 어떤 때는 개가 주인보다 뒤처져 따라올 때도 있다. 그러나 개는 줄에 묶여 있기 때문에 결국은 주인을 따라 집으로 돌아오게 된다. 즉, 길게 보면 주식의 움직임은 경제를 따라가게 된다는 것이다. 언제 개가 주인을 앞서갈지를 예측하는 것은 어렵다. 하지만 주인의 집 주소만 알면 결국 그 개가 가게 될 최종 목적지는 아는 셈이다. 이는 경제 얘기이기도 하다.

제조업 왕좌 내려놓은 일본


▎2024년 한국 경제를 이끌 핵심 산업군은 반도체를 필두로 한 인공지능(AI) 첨단 분야다. 챗GPT 개발사인 오픈AI 로고. / 사진:로이터
그렇다면 올해 한국 경제를 이끌 산업은 무엇일까? 결론부터 말하면 반도체를 필두로 한 인공지능(AI) 관련 첨단 분야다. 이 내용은 ‘무엇’보다는 ‘왜’가 더 중요하다. ‘왜 반도체냐’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모르면, 하루라도 주가가 떨어지면 다시 ‘괜찮은 거 맞냐’라는 질문을 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왜 반도체냐’라는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서는 역사를 살펴봐야 한다.

프랑스 경제학자 토마 피케티(Thomas Piketty)는 그의 저서 [21세기 자본]에서 장기간에 걸친 세계 경제성장률을 추정했다. 그에 따르면 연평균 세계 경제성장률은 산업혁명 이후인 1820~1913년 기간에는 1.5%였는데, 1913~2012년에는 3.0%로 높아졌다. 세계대전 이후 세계 경제성장률이 한 차례 도약했다는 것이다. 이는 20세기 중반 이후 급격하게 진행된 세계화와 관련 있다.

세계화는 어떻게 경제성장률을 높일까? 간단하다. 세계화가 더 싸게, 더 많은 제품을 생산하도록 해주기 때문이다. 같은 제품도 인건비가 저렴한 국가에 공장을 두고 생산하면 제품 가격이 낮아질 수 있다. 이렇게 생산한 제품을 전 세계로 수출하면 더 많은 수량을 판매할 수 있다. 이처럼 제품의 가격은 많아지고 생산량은 늘어나게 됨에 따라 세계 경제는 세계화 이전보다 더 빠르게 성장하게 된다. 한편 선진국은 더 싼 가격에 물건을 소비할 수 있게 되며, 신흥국에서는 공장이 지어지고 일하는 사람들이 늘어난다. 그럼 자연스레 임금이 늘어남에 따라 경제도 발전하게 된다.

다만, 신흥국 경제가 발전함에 따라 점차 인건비도 함께 높아지게 되는데, 이는 점차 그 국가에서 만드는 제품의 가격도 같이 높아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면 생산자들은 보다 값싼 노동력으로 제품을 생산할 수 있는 국가를 찾아서 옮겨가게 된다. 이처럼 글로벌 경제의 성장 과정에서 ‘세계의 공장’ 역할을 하는 국가는 선진국에서 신흥국으로 옮겨가게 된다. 그리고 이는 한국의 산업 발전 과정과도 연관돼 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글로벌 제조업의 중심축이 어떻게 변했는지 살펴보자.

1950~60년대는 미국 제조업의 전성기였다. 이 당시 ‘제너럴 모터스(GM)의 캐딜락’, ‘월풀(Whirlpool)의 냉장고’는 성공의 상징이었다. 미국 제품은 멋지고 성능은 좋았으나, 연비나 전력 효율은 그다지 좋지 않았다. 따라서 1970년대 오일쇼크를 겪으면서 소비자들은 보다 연비가 좋은 자동차, 전력효율이 좋은 가전을 선호하기 시작했다. 이 틈을 타 일본 제조업체들이 미국 기업들의 경쟁자로 떠올랐다. 점차 미제 자동차·가전은 경쟁력을 잃었고, 값싸고 질 좋은 일본 제품이 시장을 점령했다. 1980~90년대는 일본 제품이 세계 최고로 평가받던 시기다. 당시 ‘소니(Sony) 워크맨’, ‘조지루시(Zojirushi) 코끼리 전기밥솥’ 등은 일본을 방문한 한국 여행객들이 사 오는 필수품이었다. 하지만 일본 제조업도 경쟁자의 등장을 비켜갈 수는 없었다. 더욱이 일본 제조업을 견제하기 위해 미국 주도로 체결된 1985년 플라자합의도 일본 제조업 경쟁력을 압박했다. 엔고로 인해 일본 제조업은 점차 가격 경쟁력을 잃었다. 2000년대 들어 일본을 대체한 제조업 신흥국은 바로 한국과 대만이었다.

중국 제조업 경쟁력 갈수록 높아져


▎중국은 2010년 이후 줄곧 철강, 화학, 기계 등 소재·산업재 분야에 물량공세 전략을 취해왔다. 한화진 환경부 장관이 철강 제품이 생산되는 과정과 온실가스 배출 및 감축 공정을 파악하기 위해 충남 현대제철 당진제철소를 방문했다. / 사진:연합뉴스
한국은 1960년대 경공업, 1970~80년대 중화학공업을 거치며 점차 세계시장에서의 수출 경쟁력을 쌓아왔다. 그리고 마침내 2000~2010년대 들어 제조업의 전성기를 맞이했다. 삼성전자의 휴대폰은 애플 아이폰의 최대 대항마로 떠올랐으며, 현대자동차는 글로벌 5대 자동차 생산 업체로 자리매김했다. 문제는 한국 제조업도 미국·일본의 제조업과 같은 전철을 밟고 있다는 것이다. 한국제가 일본제를 대체했듯, 오늘날 중국제가 한국제를 대체하고 있다.

한국은 1960년대부터 차근차근 제조업 경쟁력을 쌓아온 국가다. 오늘날에도 의류·신발·화장품 등 경공업 제품에서부터 정유·화학·철강·건설·조선·기계 등 중화학공업 분야, 자동차·가전·휴대폰·반도체 등 내구소비재 및 첨단 제조업까지 안 만드는 제품을 찾기 어려울 정도다. 그런데 지금 한국의 경쟁자인 중국은 이들 대부분 분야에서 한국을 쫓아오고 있다. 특히 중국은 세계 2위의 내수시장을 바탕으로 먼저 경쟁력을 쌓고 글로벌 시장을 두드리고 있다. 내수 시장이 작아 어렵게 세계 시장에 문을 두드린 한국 입장에선 부러울 수밖에 없다. 중국은 동시에 한국에 ‘위협’이기도 하다.

철강, 화학, 기계 등 소재·산업재 분야는 2010년대부터 이미 중국의 물량공세가 강한 분야다. 가정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스테인리스나 일회용 플라스틱 컵에서도 조금만 저렴한 제품을 보면 중국산인 것이 현실이다. 이들 분야는 가격이 중요하기 때문에 중국산이 일단 시장을 점령하고 나면 품질 면에서 한국 제품이 우수하더라도 점유율을 지키기가 어렵다. 조선 등 산업재 분야는 기술력이 중요한 만큼 아직 한국이 우위에 있지만, 점차 숙련된 기술자가 줄고 있어 언제까지 경쟁우위가 유지될지는 미지수다.

휴대폰, 자동차와 같은 복잡한 분야는 아직 격차가 크다. 세계시장은 중국 제품에 대한 신뢰가 크지 않다. 하지만 안심할 수는 없다. 중국 기업들이 중국 내수시장에서 경쟁력을 갈고 닦고 있기 때문이다. ‘BYD의 전기차’, ‘화웨이의 스마트폰’ 등이 대표적이다. 미제를 일제가 대체하고, 이를 다시 한국제가 대체했듯,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차 중국의 경쟁력이 높아질 가능성이 있다.

한국, 첨단 기술 분야 도약 시급


▎중국이 과거 한국과 다른 점은 제조업 강국뿐만 아니라 첨단 기술 분야 육성을 동시에 진행하고 있다는 점이다. 사진은 중국 상하이에서 열린 모바일월드 콩그레스(MWC) 모습. / 사진:로이터
미국과 일본은 제조업 경쟁력 약화에 어떻게 대응했을까? 양국은 각각 신흥국이 따라오기 어려운 첨단분야를 육성했다. 미국은 IT와 금융 분야를, 일본은 첨단소재·장비 분야를 키웠다. 오늘날 전 세계 사람들이 사용하는 휴대폰의 운영체제는 ‘애플의 iOS’, ‘구글의 안드로이드’다. IT 기기에 사용되는 반도체는 ‘인텔’, ‘AMD’, ‘엔비디아’ 등의 제품이다. 실제로 IT 제품이 팔릴 때, 제조국가보다는 미국이 돈을 더 많이 번다. 일본도 마찬가지다. 컴퓨터, 가전, 자동차 등 제조업 곳곳에 들어가는 소재 중 만들기 까다로운 품목일수록 일본산일 가능성이 높다. 제조업 공장을 자동화하는 장비들의 상당수도 일본 제품들이다.

한국 제조업도 첨단 기술 분야로의 도약을 준비하고 있다. 특히 반도체가 여기에 해당한다. 한국은 2000년대 들어 메모리 반도체 분야에서 세계 1위를 달성한 이후 이를 유지하고 있다. 그리고 이 분야는 세계 경제의 발전방향과도 매우 밀접하게 연관돼 있다. 특히 2022년 11월 챗GPT가 출시돼 사람들을 놀라게 한 이후 AI 분야의 발전이 눈부시다. 이러한 AI 기술의 발달은 2024년 반도체 산업에도 큰 성장을 가져올 전망이다. AI가 데이터를 학습하고 연산하는 데는 고성능의 반도체가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그 직접적인 수혜 기업은 미국의 ‘엔비디아’지만, SK하이닉스와 삼성전자 등 한국의 반도체 기업들도 긍정적인 영향을 받을 전망이다.

중국이 과거 한국과 다른 점은 제조업 강국뿐만 아니라 첨단 기술 분야 육성을 동시에 진행하고 있다는 점이다. 중국은 ‘중국제조 2025’와 같은 국가단위 대규모 프로젝트를 통해 AI, 반도체, 헬스케어, 2차전지 등의 분야에서 세계 최고 수준의 경쟁력을 갖추겠다는 계획이다. 이는 한국이 제조업 경쟁력 약화를 대비하기 위해 나아가려는 방향과 상당 부분 겹친다. 한국으로서는 곤란한 일이다. 전통 제조업뿐 아니라 첨단산업에서도 중국과 동시에 경쟁해야 하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최근 미·중 패권 경쟁 과정에서 미국이 중국의 기술발전을 억제하려 하는 것은 한국 입장에서는 긍정적이다. 미국은 반도체 생산에 필요한 첨단장비의 중국 수출을 금지하고, 미국에서 판매되는 전기차에 들어가는 중국산 소재를 규제하고 있다. 예를 들면 네덜란드가 EUV 노광장비를 중국으로 수출하는 것을 막는 식이다. EUV 노광장비는 웨이퍼에 반도체회로를 그리는 초미세 장비인데, 세계에서 유일하게 네덜란드의 ASML 사가 생산한다. 그런데 이 장비가 없으면 회로선폭이 7나노미터 이하인 초정밀 반도체를 만들기 어렵다. 즉, 중국은 EUV 노광장비를 수입하지 않으면 첨단 반도체를 제조하는 기술을 개발하기 어렵다는 뜻이다. 한국 입장에서는 미국 덕분에 반도체 기술격차를 유지하기 용이해졌다는 뜻이다.

미국은 더 나아가 현재의 글로벌 반도체 공급망 동맹을 공고히 해 중국이 반도체 밸류체인에 침투하지 못하게 하려 한다. 바로 CHIP4 동맹이다. 현재 글로벌 반도체 공급망의 핵심 국가는 한국, 미국, 대만, 일본이다. 미국은 주로 반도체 설계를 담당한다. 이러한 반도체 설계 회사들을 팹리스(Fabless)라고 부른다. 애플, 퀄컴, 엔비디아 등의 기업이 여기에 해당된다. 대만은 미국 팹리스 기업이 설계한 반도체를 위탁생산하는 데 특화돼 있다. 이러한 반도체 제조 회사를 파운드리(Foundary)라고 부른다. TSMC가 대표적이다. 한국은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메모리 반도체를 만든다. 일본은 반도체를 생산하는 데 필수적인 소재·장비를 제공한다. 신에쓰화학, 도쿄일렉트론 등의 기업이 여기에 해당한다.

주식시장 ‘초격차’ 반도체에 주목


▎인천 연수구 인천신항 컨테이너 터미널 모습.
이들 CHIP4 국가 간의 협력이 긴밀하게 이뤄지면 중국 등 후발주자가 반도체 시장에서 경쟁력을 쌓기가 쉽지 않을 공산이 크다. 실제로 중국의 반도체 기업 SMIC는 7나노 반도체 생산에 성공했다고 발표했으나, 첨단장비를 도입하지 못한 상황이어서 수율 개선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국은 이러한 세계정세를 십분 활용해 첨단기술 분야에서 위치를 공고히 할 필요가 있다.

마지막은 다시 주식 얘기다. 한국은 2000~2010년대 철강, 화학, 조선, 기계, 휴대폰, 자동차 등 전통 제조업 분야에서 강한 글로벌 경쟁력을 구축해 왔다. 다만 이들 분야는 중국 제조업의 저가 물량공세 및 기술발전으로 인해 점차 경쟁력이 약화되고 있다. 각 분야의 고급화 시장에서의 경쟁우위는 유지해 가겠지만 매스(Mass) 시장에서의 점유율 하락은 점차적으로 진행될 공산이 크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이 2024년 경쟁력을 지켜나갈 수 있는 분야, 다시 말해 중국과의 초격차를 유지할 수 있는 분야는 무엇일까? 반도체다. 미·중 기술패권 경쟁이 중국의 기술 추격을 뿌리치는 데 도움을 주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은 반도체 첨단장비의 중국 수출을 금지하는 등 중국의 첨단 반도체 개발을 가로막으려 하고 있다.

한국은 이를 틈타 반도체 기술 고도화에 박차를 가하는 중이다. AI 발전으로 인해 초정밀·고성능 반도체 수요는 앞으로 더욱 커질 전망이다. 미국의 AI 투자 확대와 이에 힘입은 한국 반도체의 성장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 김영환 NH투자증권 투자전략부 연구원 yh.kim@nhqv.com

202401호 (2023.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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