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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탐방] 뮤지컬 ‘푸에르자 부르타’ 관람기 

현대인의 고질병 ‘스트레스’를 해결해주는 공연 

김태욱 월간중앙 기자
전 세계 36개국에서 공연해 폭발적 인기… 무대와 객석 경계 없애
주연 배우 “관객의 감정 표출 나쁜 것 아냐… 꾸밈 없는 모습 중요”


▎아르헨티나에서 온 뮤지컬 푸에르자 부르타 출연배우들은 “한국에서의 무대는 대단히 특별하다”고 입을 모았다. 왼쪽에서 두번째가 에밀리아노 와이셀피츠 주한 아르헨티나 대사.
정장을 입은 한 남성이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걸었다. 관객을 등진 채 묵묵히 걷는 이 남성은 조금씩 빠르게 걷기 시작했다. 느릿느릿 걷던 그는 잰걸음으로 어딘가를 서둘러 갔다. 이내 그는 빚쟁이에게 쫓기듯 뛰기 시작했다. 아무도 그의 목적지가 어디인지 몰랐다. 남성도 자신이 어디로 향하는지 말하지 않았다. 입을 꾹 닫은 채 어디론가 향할 뿐이었다.

정신이 혼미해질 무렵 소스라치게 놀랐다. 난데없이 하늘에서 거대한 굉음이 들려왔다. 천장에는 한 여성이 활짝 웃고 있었다. 관객들이 일제히 놀라 뒷걸음질 치자 여성은 방긋 웃었다. 여성의 웃음에는 의미를 알기 어려운 희열이 담겨 있었다.

좀처럼 콘셉트를 파악하기 어려운 이 무대는 전 세계 36개국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구가하는 뮤지컬 ‘푸에르자 부르타(Fuerza Bruta)’다. 스페인어로 푸에르자 부르타는 ‘잔혹한 힘’을 의미한다. 지난 2005년 아르헨티나에서 탄생한 이 뮤지컬은 ‘현대인의 스트레스’를 모티브로 탄생했다. 푸에르자 부르타의 특징은 무대와 객석의 경계가 없다는 것이다.

관객들이 공연장 안으로 입장하는 순간 뮤지컬의 막이 오른다. 그때부터 공연장의 모든 장소가 무대로 바뀐다. 배우들이 관객에게 먼저 다가가 손을 내밀기도 하면서 공연 중반쯤에는 관객과 배우의 경계가 허물어진다. 뮤지컬 말미에는 배우들이 무대 아래로 내려와 관객들에게 사진 촬영을 함께 권하기도 한다.

‘걷는 남성’과 ‘천장에서 웃는 여성’은 모두 푸에르자 부르타의 대표 퍼포먼스다. 공연장을 한 바퀴 비행하는 ‘보요(Bollo)’도 빠질 수 없는 퍼포먼스다. 공연 관람을 마친 뒤 정장을 입은 남성과 천장에서 웃음을 지은 여성을 만나보고 싶었다. 1월 11일, 주한 아르헨티나 대사관에서 두 주인공들을 만났다.

공연장의 모든 장소가 무대로 변해


▎푸에르자 부르타의 하이라이트인 ‘보요(Bollo)’ 공연 모습. / 사진:크레센트엔터테인먼트
“우리가 관객에게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따로 없습니다. 그날 관객이 느낀 메시지가 곧 정답입니다.” 그날 무대 위에서 정장을 입은 채 걷던 남성이 기자에게 답했다. 허무했다. 내심 ‘자유’, ‘현대인의 삶에 대한 고찰’ 등 철학적인 메시지를 내놓을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기 때문이다.

기자의 실망한 표정을 눈치챈 듯 그가 설명을 이어갔다. “관객이 느낀 감정이 곧 정답입니다. 세상에는 항상 정해진 답이 있는 것은 아니잖아요. 좋음과 나쁨, 우등과 열등을 타파하자는 의미”라고 설명했다. 누군가 이미 규정한 삶을 살아가기 바쁜 현대인들에게 ‘해방감’이라는 작은 선물을 선사하고 싶다는 말도 덧붙였다.

바쁜 현대인들에게 ‘해방감’을 선물


▎푸에르자 부르타의 하이라이트인 ‘코레도르’ 공연 모습. / 사진:크레센트엔터테인먼트
“핵심은 억눌려 있는 에너지를 모두 해소하는 것이죠. 뮤지컬을 관람하는 그 순간만이라도 관객들이 속박된 삶을 벗어나 자유를 만끽했으면 합니다.”(배우 브루노 로페즈 아라곤)

푸에르자 부르타 뮤지컬은 중남미 축제를 대표하는 ‘카니발’에서 영감을 받은 작품이다. 카니발과 푸에르자 부르타 모두 ‘억압과 스트레스에서의 해방’을 의미한다. “일상생활에서 무기력함을 느끼던 이들도 푸에르자 부르타와 함께라면 강력한 힘을 얻는다. 마치 슈퍼맨이 된 것처럼 강해진다. 그게 억눌린 삶에서 해방됐다는 증거다. 직장에서 쌓인 스트레스를 잠시 내려놓고 자연 그대로의 상태로 돌아가는 거다.”(브루노)

이번엔 무대(천장)에서 아래를 내려다봐서 관객들을 놀라게 한 여성이 입을 열었다. “사실 관객들이 나를 보고 놀라는 게 당연하다. 천장에서 굉음이 들리면 사람이라면 당연히 놀란다. 놀라는 게 당연함에도 우리 사회는 아무렇지도 않게 대처하는 ‘강인함’을 요구한다. 자신이 놀라는 과정을 직접 보고 느끼면서 관객은 그동안 감춰왔던 감정이 무엇인지 알게 된다. 넘어지고 엎어지는 그 모습 자체가 우리들의 진정한 모습이다.”(배우 멜리나 세오아네)

배우들은 유독 한국에서만 느낄 수 있는 감정에 대해서도 설명했다. 브루노는 “뮤지컬 배우로서 한국에서 공연하는 건 축복이다. 멋지게 잘 차려입은 한국인 관객들을 보면 도전 의식이 생긴다. 퇴근 후 뮤지컬을 보러 오신 분들 중 다수는 넥타이를 맨 채로 관람한다. 그분들의 넥타이를 풀게 하겠다는 묘한 도전 의식이 생긴다. 다른 뜻은 없다. 그분들께 진정한 해방을 선사하고 싶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아르헨티나 대사가 무대에 깜짝 등장


▎푸에르자 부르타의 하이라이트인 ‘마일라’ 공연 모습. / 사진:크레센트엔터테인먼트
모두 네 명의 배우를 만났다. 그중 세 명은 아르헨티나 현지에서 온 배우들이었다. 놀랍게도 한 명은 에밀리아노 와이셀피츠 주한 아르헨티나 대사였다. 에밀리아노 대사는 평소에도 퇴근 후 고향인 아르헨티나에서 온 뮤지컬 배우들을 응원하기 위해 커피와 메디아루나(아르헨티나 빵)를 들고 뮤지컬 현장을 찾는다. 때로는 응원과 격려를 넘어 직접 무대 위에 올라 뮤지컬에 동참하기도 한다. 배우 마테오 토리노는 “동네에서 오랜 기간 알고 지낸 분 같은 푸근한 이미지에 놀랐다. 통상 ‘대사’ 혹은 ‘외교관’이 갖는 딱딱하고 권위적인 이미지와 달랐다”고 말했다.

“처음에 아르헨티나 대사가 무대에 인사하러 온다고 해서 그냥 ‘형식적인 악수’만 나눌 줄 알았다. 하지만 직접 만나고 보니 친근한 ‘동네 형’이 찾아온 느낌이었다. 아르헨티나 전통 음식인 메디아루나를 가져와 우리를 놀라게 하더니 요즘은 뮤지컬 마지막 부분에 직접 무대에 오른다. 이제는 빠져서는 안되는 푸에르자 브루타의 핵심 멤버로 거듭났다.” 배우 브루노도 추임새를 넣었다.


▎에밀리아노 와이셀피츠 주한 아르헨티나 대사(아래 두 번째)와 함께한 배우들.
에밀리아노 대사는 “사랑하는 고향 아르헨티나에서 온 귀빈들에게 처음엔 꽃을 가져가려 했는데, 꽃보다 실용적인 선물을 주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메디아루나 등 전통 음식이 배우들에게 도움이 될 것 같았다”며 “형식적인 아름다움을 타파하자는 게 푸에르자 부르타의 모토라고 알고 있다. 많은 분들이 이 뮤지컬을 찾아 아르헨티나와 푸에르자 부르타의 아름다움을 만끽했으면 한다”고 말했다.

- 글 김태욱 월간중앙 기자 kim.taewook@joongang.co.kr / 사진 최기웅 기자 choi.giung@joongang.co.kr

202402호 (2024.0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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