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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중앙 특별기획시리즈] 한국 경제의 개척자들(17) 박인천 금호아시아나그룹 창업자 

근검과 집념 일관한 경영인… 영면 하루 전까지 금호문화재단 출근 

‘정도경영’ 중시한 박인천, 광주여객·삼양타이어를 성공의 발판으로
기업 인수와 사업 다각화로 70년대 국내 10위권 대기업집단 발돋움


▎박인천은 만 45세인 늦은 나이에 사업가의 길에 접어들었다. / 사진:금호건설
창업자 박인천(1901~1984)은 조선왕조의 운명이 경각에 있던 1901년 전남 나주시 다시면 신석리 동산부락에서 빈농(貧農) 박옥용(朴玉容)의 4남2녀 중 3남으로 태어났다. 다시면은 동북부의 금성산을 제외한 대부분의 지역이 낮은 구릉성 산지다.

박인천은 숫자 계산에는 밝았으나 가정 형편이 어려워 학업은 언감생심이었다. 그가 7세가 되던 해에 부친이 사망하면서 가족의 생계를 어머니와 장남 성천이 도맡았다. 박인천은 일찍부터 장사에 나섰지만 번번이 실패하고 23세인 1924년 전남 영광경찰서 순사로 입직했다. 이후 1929년에는 오늘날 9급 공무원 시험에 해당하는 보통문관 시험에 합격했다. 당시 이 시험에는 학력 제한이 없었다. 그는 보통문관 시험 합격과 동시에 당시로는 늦은 나이인 29세에 이순정과 결혼했다.

박인천은 1930년 경찰 간부로 승진하는 등 승승장구했다. 순사부장을 거쳐 경부까지 진급했다. 경부는 현재의 경감에 해당하는 계급으로 사실상 현장수사의 최고 책임자였다. 박인천은 1945년 해방무렵 경부 계급을 끝으로 21년간의 경찰 생활을 청산했다. 그는 경찰로 근무하면서 인심을 잃지 않았으나, 일제강점기 경찰 이력은 주홍글씨로 남았다.

공직 사퇴 이후 생활고에 시달렸던 박인천은 약품 배달로 돈을 모아 택시운수업에 착수했다. 이 무렵 광주에 거주하던 약 8만 명은 열악한 교통여건으로 고통 받았다. 1941년 태평양전쟁을 빌미로 일제가 대다수 자동차를 징발한 탓에 철도도 다른 지역보다 발달이 더뎠다. 박인천은 경찰 재직 시절 친분이 있던 강진의 갑부 유재의(劉載義)에게 거금 10만 원(圓)을 빌려 중고 택시 2대(1935년형 포드 5인승 1대, 1933년형 내쉬 1대)를 16만원에 구입했다. 당시 10만원은 쌀 1400여 가마에 해당하는 거금이었다. 이후 광주시 황금동 87번지의 건물 40평, 창고지 30평을 임차한 그는 오종교, 양귀매 등 운전기사를 확보했다. 1946년 4월 7일 건물 입구에 ‘광주택시’라는 나무 간판을 달고 영업을 개시했다. 만 45세였던 그는 늦은 나이에 사업가의 길에 접어들었다.

박인천이 가장 신경 쓴 부분은 확실한 자동차 정비와 정시(定時) 배차였다. 이 무렵 광주의 주요 도로는 비포장 자갈길이었다. 영업용 승용차 대부분이 중고차여서 고장이 빈번했다. 이 탓에 승객들과의 약속 시간을 어기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확실한 정비와 정시운행으로 호평을 받은 광주택시는 광주의 명물이 됐다. 당시 광주 시민들은 회갑연이나 결혼식 등 특별한 행사가 있으면 택시로 시내를 한 바퀴 여행했다. 광주택시에 대한 수요가 많았던 이유다.

‘정시 배차’ 승부수 띄운 박인천

택시사업으로 성공한 박인천은 버스 운수업에도 진출했다. 광주를 중심으로 한 전라남도에 정기여객버스 운수업이 개시된 것은 1930년대다. 해방 전까지 이 일대의 여객버스는 일본인이 경영하던 남조선철도주식회사 자동차부(自動車部)가 사실상 독점했다. 한국인 소유의 여객업체들이 활성화된 것은 해방 이후부터다.

박인천은 광주 인근의 노선별 승객 수, 자금 동원능력, 사업전망 등을 면밀히 조사했다. 이후 1948년 9월 6일에는 ‘광주~장성’, ‘광주~화순’ 왕복 노선의 ‘광주여객’을 설립했다. 자본금은 박인천이 단독으로 출자한 1000만원(圓)이었다. 박인천이 대표 취체역을 맡았으며 그 외 취체역은 박동복과 유재의가 맡았다. 손영식은 감사역을 맡았다.

광주여객의 첫 운행은 1948년 11월 5일 광주~장성노선으로 시작했다. 요금은 1㎞당 160전(錢)으로, 약 23㎞ 거리인 광주에서 장성까지 1인당 35원80전이면 충분했다. 광주여객은 이 노선 외에도 광주~화순, 광주~담양 노선을 1일 2회씩 왕복 운행했다. 이후 광주~나주, 광주~곡성 노선도 추가했다.

박인천은 운행 초기부터 고장과 운휴가 빈번했던 기존 업체들과는 달리 운행시간 준수, 차량정비 만전 등으로 지역주민들의 신뢰를 얻었다. 광주여객은 위 노선들을 ‘독점’한 탓에 호황을 누렸다. 설립 1년 만인 1949년에는 버스를 13대 보유했으며, 광주~장흥 노선도 신설했다. 이 밖에 순창, 동복, 영광 등지로 노선도 연장했다. 1950년 6월에는 광주~순천 노선을 신설했으나 6·25전쟁 발발로 영업이 불가했다. 광주여객 소속 버스들이 대부분 징발되고 나머지는 박인천이 피란 도중 도난, 파손됐다. 피란에서 복귀한 박인천은 부서진 차체와 부품들을 수거해 목탄(木炭) 버스 2대를 조립한 뒤 1950년 10월부터 버스사업을 재개했다.

목탄차는 1941년 일제가 태평양전쟁 수행 목적으로 민수용 휘발유 배급을 중단하면서 국내에 처음 등장했다. 목탄차는 수용인원 30여 명의 버스 후미에 250㎏이 넘는 숯불 화통과 냉각관, 여과기 등을 부착하고 화부(火夫)가 풀무질해서 얻은 가스를 에너지로 사용한다. 냉난방 시스템이 없으며 속도가 느린 데다 출력도 형편없어 언덕길을 오를 땐 승객들이 하차해서 버스를 밀어 올렸다. 그럼에도 교통수단이 턱없이 부족한 덕분에 광주여객은 전쟁특수를 누렸다. 이후 광주여객은 전라남도 전역으로 노선망을 확대, 휴전 무렵에는 전북지방과 부산까지 노선을 확대했다.

전국 굴지의 여객업체로 도약


▎박인천은 택시 2대로 ’광주택시’를 창업했다. 이은상 선생 자택 앞에 대기 중인 광주택시 포드 디럭스 5년형(앞)과 내쉬 33년형(뒤). / 사진:금호건설
이 무렵 광주여객의 노선 확보는 전쟁 그 자체였다. 다른 행정구역으로 노선을 확대할 경우 해당 지역의 경쟁업체들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진출을 방해했기 때문이다. 특히 전라도 버스가 경상도로 진출했던 탓에 광주여객이 받는 고통은 컸다. 경상도 곳곳마다 지역 경쟁업체들이 불량배들을 동원해 광주여객 승무원을 위협하거나 구타했다. 그러나 경상도를 오가는 전라도 출신 승객들이 이용함으로써 광주여객은 성장을 이어갔다.

광주여객은 충청남도, 경상도 지역으로 활발하게 노선을 확장했다. 1959년에는 140개 노선에 버스 139대를 보유했으며, 1960년 삼광여객, 1961년 전남여객을 잇달아 인수했다. 1966년 5월에는 논산~공주~천안노선, 같은 해 7월에는 서울~천안노선 면허를 취득했다. 또한 1967년 12월에는 서울~광주 노선을 개통했다. 덕분에 광주지역 승객들은 중간에 버스를 갈아타지 않고도 서울로 이동할 수 있게 됐다. 광주여객은 창업 19년 만에 조그마한 지방운수업체에서 전국 굴지의 여객업체로 도약했다.

박인천은 버스사업을 통해 축적한 자금으로 1954년에는 전남지역의 최대 생사(生絲) 생산업체인 전남제사를 인수했다. 이 회사는 일제강점기인 1926년 5월 25일 광주군 광주면 교사리에서 일본인 희다우장(喜多又藏), 촌상정조(村上貞造), 호남의 거부(巨富) 현준호(1889∼1950) 등이 자본금 200만원(圓)으로 설립한 회사였다. 전남제사는 200부(釜)의 생산시설을 확보, 누에고치를 이용해 생사(生絲)를 생산했다. 생산한 생사는 주로 일본 방적공장에 수출했다. 부산의 조선제사(朝鮮製絲)에 이어 국내에서 둘째로 규모가 컸다. 종업원 1000여 명의 전남제사는 박인천이 인수하기 이전 해방과 동시에 미군정에 귀속, 전남대학교 측에서 경영했다.

이 무렵 광주여객은 경쟁업체 인수·합병에 박차를 가했다. 노선 확장이 목표였다. 노선 확충이 버스여객사업의 성패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다만 노선을 신설할 경우 정부는 면허를 잘 내주지 않았다. 시간도 많이 소요되고 번거로웠다. 신설노선의 사업성도 간과할 수 없었다. 가장 손쉬운 방법은 사업성이 검증된 기존 노선을 매입하는 것이었다. 1950년대 중반 광주여객은 지속적인 인수를 통해 사세를 확장해 나갔다.

1960년 9월 5일에는 광주시 금남로 5가 1번지에서 자본금 5000만환(圜)의 삼양타이어공업주식회사(금호타이어)를 설립했다. 상호 삼양(三洋)은 박인천, 박동복(朴東福, 박인천의 동생), 박상구(朴祥求, 박인천의 조카) 세 사람이 5대양 6대주를 향해 번창하도록 하자는 의미였다. 사실 삼양타이어공업주식회사 설립은 자동차가 전국적으로 증가하는 것 외에도, 광주여객 타이어 자체 수요를 충당하기 위한 조치였다.

운수업자들은 시중에 불법 유출된 외국산 군용 타이어를 확보하기 위해 치열한 경쟁을 벌였다. 이 무렵 국내에는 1958년 10월부터 재가동한 조선다이야(한국타이어 전신)를 비롯해 1952년 1월에 설립된 흥아(興亞)타이어와 1954년 1월에 설립된 동신화학(東信化學) 등 5개사가 장악하고 있었다. 국내 타이어 수요 대비 과잉 공급은 물론, 변변치 못한 품질이 문제로 지적됐다.

국내 최초의 자동차 타이어 생산은 1939년 9월 15일 일본의 브리지스톤이 부산에서 아사히(朝日)고무의 자회사를 설립, 재생고무를 이용해 승용차 타이어를 생산한 것이다. 그러나 당시 국내에는 자동차가 적어 사업이 지지부진했다. 브리지스톤사는 1941년 5월 2일 불입자본 210만원(圓)의 조선다이야공업주식회사를 설립했다. 조선다이야는 1942년 10월 경기도 시흥군 동면 도림리365의 도림천변 일대에 일산(日産) 300본의 공장을 마련했다. 1945년 해방과 동시에 소유권이 정부에 귀속되면서 한국타이어로 개명됐으나 경영난을 겪던 1962년 효성그룹이 인수했다.

국내 최대 타이어 메이커로 자리매김


▎1959년 박인천(가운데) 금호그룹 창업회장이 무등산 관광개발을 위한 첫 현지조사를 하면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박 창업회장은 무등산개발 추진위원장으로 무등산 관광개발을 위해 노력했다. / 사진:금호건설
박인천은 광주시 양동 60번지의 전남제사 창고(건평 309평)를 개조했다. 이 밖에도 기술자 스카우트와 40대의 기계를 설치했다. 덕분에 하루 20본의 생산능력을 확보한 그는 1961년 4월부터 생산을 개시했다. 그러나 삼양타이어는 소비자들로부터 ‘호박타이어’란 별명을 얻을 만큼 품질에 문제가 많았다. 품질향상과 생산능력 확대에 지속적인 투자가 요구돼 경제적 부담이 컸다. 광주여객에서 벌어들인 수입금 전액을 삼양타이어에 투입함은 물론, 고리(高利)의 악성 사채자금까지 동원해야 했다.

박인천은 낙심하지 않고 전문 기술자를 유치하는 등 끝없이 품질 향상을 위해 노력했다. 그 결과 1965년 3월 KS마크 획득에 성공, 군납업체로 지정됐다. 이후 본격적인 매출 신장의 기회를 얻었다. 당시 삼양타이어는 전체 군납 물량의 20%를 차지하는 등 군납은 삼양의 경영 안정에 크게 기여했다. 1965년 10월에는 태국에 타이어 200본을 수출하면서 삼양타이어는 정상궤도에 진입했다. 1969년에는 연산 25만 본 규모로 생산능력을 확장했으며, 1973년에는 미국 유니로얄로부터 레디알 타이어 개발 기술을 제공받는 데 성공했다. 이후 1974년에는 국내 최대 타이어 메이커로 부상했다.

광주여객의 본격적인 다각화 작업은 1970년대부터 본격화했다. 구체적으로 광주여객은 1970년 고속버스사업에 참여하며 사업 다각화에 박차를 가했다. 당시(1967년 개통)는 서울과 인천을 잇는 경인고속도로와 경부고속도로(1968년 착공)가 탄생한시점이다. 서울과 부산을 잇는 428㎞의 경부고속도로는 1970년 7월 7일 완공됐다. 전국이 ‘하루 생활권’으로 재편성되자 고속버스사업은 자연스레 블루오션이 됐다.

경부고속도로 완공되자 고속버스 도입

이 무렵 한진, 한남, 천일고속 등이 고속버스 시장을 ‘지배’하고 있었다. 후발주자였던 광주여객은 선발업자들과의 경쟁에서 우위를 확보하기 위해 해외 차관자금으로 1971년 1월까지 40대의 벤츠고속버스를 도입했다. 경쟁업체인 한일고속, 천일고속, 한남고속 등 3사도 각각 벤츠버스를 40대씩 도입했다.

광주여객은 1970년 5월 5일 서울~대전 노선을 시작으로 그해 11월까지 서울~대구, 김천, 부산, 경주, 대전~부산 등 6개 노선을 차례로 개설하고 벤츠버스를 투입했지만 영업이 부진했다. 경쟁사들보다 차량이 턱없이 부족했으며, 당시 도입한 벤츠버스에는 에어컨이 장착되지 않아 첫 운행 2~3개월 후에 닥쳐온 무더위에 속수무책이었다. 다행히 광주여객은 같은 벤츠고속버스를 운행하던 한일, 천일, 한남 등과 함께 1970년 7월 1일 공동운수협정을 체결함으로써 영업 부진을 조금씩 타개해 나갔다.

삼양타이어 또한 지속적인 투자가 요구되는 가운데 광주여객의 재무구조는 점차 열악해졌다. 고금리의 사채를 많이 끌어다 쓴 것이 화근이었다. 한계상황의 광주여객은 1972년 8월 3일 0시를 기해 기습적으로 발표된 ‘8·3 조치(8·3 사채 동결 조치)’ 덕분에 극적으로 회생했다.

8·3조치는 경제 안정과 성장에 관한 대통령 긴급명령 15호를 의미한다. 정부는 탈세의 온상인 사채시장을 제도권 금융으로 흡수하기 위해 기습적으로 조치를 시행했다. 기업들은 끌어다 쓴 사채를 주거래은행에 신고해야 했다. 원리금은 8월 3일 이후 3년 거치 5년 균등 분할 상환하도록 됐다. 정부는 이자율도 월 1.35%를 초과할 수 없도록 규정했다.

1960년대 초 정부 주도의 공업화 추진에 따라 기업 수와 규모가 확대되면서 이를 뒷받침할 금융 수요도 빠르게 증가했다. 그러나 지하금융의 상징인 사채시장 규모가 제도권 금융을 능가한 탓에 절대다수의 기업들은 악성 고금리에 시달렸다. 오너 경영인들이 개인 돈을 자신 소유 기업에 고금리 사채를 놓아 기업 부실을 촉진하는 등 도덕적 해이가 비일비재했다.

박인천은 1946년 창업 이래 최대의 위기를 정부 덕분에 넘길 수 있었다. 1973년 전주~순천 간 고속도로(181㎞) 개통으로 호남고속도로(순천~회덕 분기점)가 완성되면서 광주여객은 호남지역을 여행하는 고속버스 시장을 사실상 독점했다. 광주여객은 후발주자였음에도 국내 고속버스업계의 왕자로 부상했다. 삼양타이어도 경제 성장에 따른 소득 증대로 자동차 보급이 확대되면서 굴지의 타이어 메이커로 성장했다. 금호그룹 쌍두마차가 완성된 순간이다.

광주여객이 대기업집단으로의 모습을 갖추기 시작한 것은 1970년대 수출 드라이브 정책에 편승한 덕분이었다. 1973년에 정부는 자주국방과 자립경제 건설을 목표로 중화학공업화를 선언한 직후 철강, 조선, 전자, 자동차, 석유화학, 요업 등 6개 업종에 집중 투자했다. 정부는 1975년 투자재원 조달을 위해 ‘1980년 수출 100억 달러’ 목표 설정 및 종합무역상사제를 신설했다. 당시 정부는 자본금 10억원 이상, 해외지사 10곳 이상, 단일 품목 50만 달러 이상을 수출하는 7개 품목 이상의 무역업체에 파격적인 혜택을 제공했다. 그해 삼성물산, 대우실업, 쌍용, 국제상사, 한일합섬 등이 종합무역상사로 지정됐다.

금호그룹, 10위권 대기업집단 부상


▎1960년대 초반 투입된 광주고속 (현 금호고속) 차량 모습. / 사진:금호건설
광주여객도 정부의 수출 드라이브 정책에 편승하기 위해 1972년 10월 창업자 박인천의 아호인 ‘금호’에서 유래한 금호실업(무역업)을 설립했다. 박인천의 장남 박성용(1931∼2005)이 경영에 참여하면서 금호실업 설립이 시작됐다. 박성용은 서울 중앙중학교 졸업 후 1950년에 서울대 문리대에 입학했으나 중퇴하고 1955년에 미국으로 유학을 떠난 인재였다. 그는 1965년 미국 명문 예일대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1968년에 귀국한 그는 대통령실 비서관을 거쳐 1971년에 서강대 경제학과 교수를 역임했다. 이 무렵 박성용은 금호그룹 경영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이후 금호실업은 그룹의 주력기업으로 자리매김했다. 동시에 수출 제고를 위해 적극적으로 다각화 작업에도 착수했다. 1973년 4월에는 모빌코리아윤활유공업을 설립했으며 그해 6월에는 곡성제사를 인수했다. 그해 8월에는 광주고속관광을 설립하고 10월에는 삼양타이어가 전남제사를 인수·합병했다. 그해 12월에는 금호전자를 설립했으며 1974년 6월에는 광주투자금융을 설립했다. 이후 11월에는 광주고속이 경쟁업체인 한남고속을 흡수했다.

1975년 9월에는 금호실업이 호남지방의 대표 은행인 광주은행에 지분 참여했다. 1976년 1월에는 삼양타이어가 유니로얄판매를 인수하고 그해 3월과 8월에는 금호실업이 극동철강과 마포산업을 각각 인수해서 그해 12월 금호실업은 국내 11번째로 종합무역상사에 지정됐다. 금호석유화학도 같은 해 12월에 설립됐다.

금호의 기업 인수는 이후에도 계속됐다. 금호전자는 1977년 2월과 8월에 천우사 전자공장과 동남전기 안양공장을 각각 인수해서 몸집을 불리고 그해 6월에는 금호실업이 명천기업을 인수했다. 그해 8월에는 제일토건을 인수, 1978년에는 ‘금호건설’로 상호를 변경했다. 금호는 마구잡이로 설립 내지는 인수한 기업들을 콘체른식으로 관리했다. 금호실업이 지주회사 역할을 했다. 그룹 출범 4년 만인 1977년 계열사 12개의 금호그룹은 국내 10위권의 대기업집단으로 급부상했다.

1980년대에 들어 금호그룹은 종합상사를 자진 반납하는 등 경영여건이 또다시 악화됐다. 1970년대 중반 이후의 무분별한 확장정책이 초래한 결과였다. 난국 타개 방편으로 전기, 전자, 철강사업을 매각하는 등 대대적인 구조조정을 단행했다.

이 와중에 금호그룹은 창업자들 간에 지분분할 문제로 내홍(內訌)을 겪었다. 박인천이 1946년에 광주택시를 시작할 당시 맏형 박성천의 차남인 박상구가 경영에 참여했다. 박인천은 자금조달 및 관청업무를 담당했으며, 목포상고를 졸업한 박상구는 경리 등 회사의 살림 일체를 도맡았다. 1948년에 광주여객을 설립하면서 박인천의 남동생 박동복도 경영에 참여했다. 1906년생인 박동복은 다시공립보통학교를 거쳐 1926년부터 경찰에 입직(入直)한 인물이다. 해방 이듬해인 1946년에는 목포경찰서장을 역임했다. 이후 전라남도 경찰국소속 경찰학교장으로 재직한 그는 1948년 광주여객 설립과 함께 경찰생활을 청산하고 광주여객 경영에 참여했다. 여객운수업은 특성상 경찰과의 연관성이 많아 경찰 고위직 출신의 도움이 필요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광주여객은 박인천, 박동복, 박상구 등의 공동경영체로 운영됐다. 이들 간의 지분 분할 움직임이 가시화된 것은 박인천의 아들들(성용, 정구, 삼구)이 경영에 참여하면서부터였다. 1979년 12월 27일에는 삼양타이어 분리를 놓고 주주들 사이의 갈등이 언론에 노출됐다. 박동복은 금호전기, 모빌코리아 등을 분리해서 독립했다. 박상구는 자신의 몫으로 삼양타이어를 요구했다.

뛰어난 인재보다 근면 성실한 사람을 재목으로 키워


▎박인천(왼쪽) 금호그룹 창업회장 이 죽호학원 학생들과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죽호학원은 1959년 12월 지역의 인재를 육성하기 위한 일념으로 설립됐다. / 사진:금호건설
1980년 2월 26일 삼양타이어 주주총회에서 분리 독립 안건이 통과됐으나 1981년 8월 금호실업이 삼양타이어를 흡수하면서 사촌 형제들 사이의 관계가 급격히 악화됐다. 이후 양측 간의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졌는데, 항간에서는 이 사건을 국제그룹 해체 의혹과 연합철강 인수자 선정 의혹과 함께 5공화국의 대표적 정경유착 비리 사건으로 평가했다. 1981년 박상구가 삼양타이어 지분을 25억원에 넘기고 금호그룹을 떠남으로써 떠들썩했던 내홍(內訌)이 마무리됐다.

박인천 회장은 금호그룹이 제2의 도약을 준비하던 1984년 6월 16일에 서울 용산구 동빙고동 1-103의 자택에서 향년 84세로 영면했다. 그는 뛰어난 인재보다 근면 성실한 사람을 재목(材木)으로 키우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정도경영은 물론 성실한 납세를 기업경영의 신조로 삼았다. 젊은 시절 20여 년 동안의 공직생활을 통해 체득된 공인정신 때문으로 추정된다.

동시에 그는 사람을 한번 믿으면 끝까지 믿었다. 신세를 지면 몇 배로 갚을 뿐 아니라 근검과 집념으로 일관한 소박한 경영인이었다. 그는 마지막 순간까지 호남의 발전에 진력했다. 1959년 12월에는 광주시 북구 운암동에 죽호학원(금호중고, 금파공고, 금호중앙여고)을 설립, 지역 청소년들의 교육에 최선을 다했다. 박인천의 묘소가 죽호학원 캠퍼스 내에 위치할 정도였다. 그는 영면 하루 전까지 금호문화재단에 정상 출근할 만큼 말년에는 남도의 문화예술에도 애정을 많이 쏟아부었다. 또한 한국의 간판 기업집단 총수인 박인천은 광주상공회의소 회장을 맡으며 호남지역 상공업 발전을 위해 헌신한 창업기업인이었다.

※ 이한구 - 고려대학교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경제학 석사를, 한양대학교에서 경제학 박사를 취득했다. 수원대학교에서 경제학을 강의하며 경상대학장, 금융공학대학원장을 지낸 뒤 현재 명예교수로 있다. 국내기업사 연구의 권위자로 (사)한국경영사학회 부회장을 지냈다. 저서로 [일제하 한국기업설립운동사]와 [한국재벌형성사], [대한민국기업사], [한국의 기업가정신] 등이 있다.

202405호 (2024.0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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