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사회.북한.국제

Home>월간중앙>정치.사회.북한.국제

[특별기고] 5월 20일 취임한 대만 총통 라이칭더는 누구 

맹모지교로 입신양명한 라이칭더, 양안(兩岸) 위기에서 대만 구할까 

광산촌 소년이 초인적 극기로 의사, 정치인, 지도자로 성장
전임 총통 차이잉원 정책 계승 전망… 양안 평화유지 과제로


▎대만 총통 선거 발표 직후 기뻐하는 라이칭더. 모친이 가르친 독립적 생활방식과 모범적인 사회생활이 광산촌 소년을 의사로, 정치인으로, 대만 지도자로 만들었다. / 사진:로이터
라이칭더(賴清德) 대만 총통은 1959년 10월 6일 구 타이베이현(현 신베이市) 완리향(萬里鄕, 현 완리구)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을 대만 북쪽 해안 광산촌에서 지냈다. 광부였던 그의 아버지 라이차오진(賴朝金)은 완리향 태생이었다. 1960년 1월 8일 탄광서 일하던 중 화재로 인한 일산화탄소 중독으로 33세로 생을 마감했다. 라이칭더가 태어난 지만 1살이 안 됐을 때였다. 이런 이유로 라이칭더의 모친 라이위아주(賴余阿珠, 과거 대만은 아내가 남편 성을 따랐다)는 홀로 6명의 자녀를 키워야 했다. 라이칭더는 종종 자신의 성공에 대해 “어머님의 영향력 덕분”이라고 말한다. 라이칭더에 따르면 그의 모친은 의지력이 강한 사람이다. 과거 라이칭더는 “어머니는 자녀들에게 긴말을 하지 않지만, 내 인생 가치관과 태도는 어머니로부터 배웠다. 어머니는 내 인생에서 가장 많은 영향을 미친 분이며, 내가 가장 그리워하는 대상이다. 어머니는 내가 본 사람 중 가장 강한 분”이라고 말한 바 있다.

지금은 교통이 편리해서 타이베이시 중심에서 라이칭더가 어린 시절을 지내고 가족이 함께 살던 완리향은 차로 30~40분이면 갈 수 있다. 그러나 라이칭더가 생활하던 약 60년 전을 생각하면 적어도 차를 타고 반나절은 이동했을 것이다. 필자가 친숙한이 지역을 최근 다시 찾은 이유는 라이칭더가 총통 후보가 되면서 이 지역이 조명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라이칭더가 당선된 이후에는 관광 유적지가 됐다. 현재 탄광의 모습을 간직한 이곳에는 라이칭더가 살던 집이 그대로 있다.

독립심 강하고 부지런한 모친 슬하에서 자라


▎부총통 샤오메이친은 중국어, 영어, 대만어 및 대만과 미국 문화에 능숙한 ‘국제 인재’다. / 사진:로이터
라이칭더 친구들의 말에 의하면 라이칭더는 중학교 2학년 때 급성 맹장염에 걸려 급히 수술비와 입원비가 필요했다. 라이칭더 가정 형편을 아는 선생님이 학교에서 모금해서 라이칭더를 도와주려 했다. 라이칭더가 방과후에 돈이 든 모금봉투를 집으로 가져가자 그의 모친은 봉투를 열어 보지도 않고 학교에 돌려주라고 했다고 한다. 그의 모친은 “반 친구들이 앞으로 서로 다른 길을 가면 돈을 돌려줄 수 없을 것이며, 인생에 진 빚은 평생을 갚아도 갚을 수 없는 것”이라고 말한 것으로 전해진다. 라이칭더 모친은 그만큼 독립심이 강하고 남으로부터 물건이나 돈을 빌리는 일을 하지 않았으며, 모진 일도 부지런히 해서 가족을 부양한 인물이다. 라이칭더의 기억에 모친은 그가 일어났을 때 이미 출근해서 집에 없는 분이었다. 또 하교 후 집에 돌아와 잠들 때까지도 모친을 못 봤다고 한다. 경제적으로 어려웠으나 그의 모친은 남의 돈이나 선물을 받지 않고 주지도 않으며 자신의 노력만으로 생활했다.

이러한 이유로 라이칭더는 정치를 시작한 뒤로 봉사활동은 하지만 선물이나 돈을 주고받는 일은 하지 않는다. 그래서 생긴 별명이 ‘별종 정치인’이다. 그만큼 청렴하다는 뜻이기도 하다. 자신의 자녀 결혼식에 라이칭더가 주례를 봐줬다는 민주진보당(민진당) 원로 정치인은 필자에게 “라이칭더가 청렴함과 근면 검소함이 없었다면 수많은 선거에서 이기고 행정원장, 부총통 그리고 총통까지 될 수 있었겠느냐?”고 한 적이 있다. 민진당 내 많은 계파 정치원로들이 라이칭더를 인정하는 것은 물론, 그가 주위의 갖은 비방을 극복하고 선거에서 승리한 것은 다 이유가 있다는 얘기다.

라이칭더 집안 얘기를 아는 사람들의 말에 따르면, 라이칭더의 외할아버지는 지주였다. 즉 라이칭더의 모친은 부유한 집안의 딸이었던 것이다. 외할아버지는 혼사를 정해 딸이 좋은 곳으로 시집가기를 바랐으나 라이칭더 모친은 결혼식 날 탈출을 감행했다. 그 이후 라이칭더의 모친은 라이칭더의 아버지를 만나 결혼했는데, 그 결말은 앞서 언급했듯이 동화책에 나오는 행복과는 거리가 멀었다. 라이칭더 유년기에 그의 모친은 종종 라이칭더를 데리고 친척집을 찾았는데, 가족들에게 조차 경제적 어려움을 말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처럼 모친이 독립심이 강했기에 자녀들도 서로 가정일을 분담하며 지냈다. 이것이 라이칭더가 독립적이며 자주적인 정신과 생활 자세를 배우는 산교육이 됐다. 라이칭더의 모친은 그가 의사가 되기를 바랐고, 결국 각고의 노력 끝에 의사가 됐다.

모친 가르침 가슴에 새기며 독하게 의학 공부


▎라이칭더 총통이 과거 유년기 시절 거주했던 자택. 라이칭더는 학교 성적이 우수했지만 거만하지 않고 친구들과 잘 어울리며 어려운 이를 돕는 성격의 소유자였다. / 사진:김진호 교수
라이칭더는 완리향에서 완리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타이베이 소재 명문 젠궈고등학교(建國中學, 한국의 경기고등학교에 해당) 진학 시험에 합격하여 가족을 떠나 지내게 된다. 그의 초등학교와 중학교 선생님들의 증언에 따르면 라이칭더는 학교 성적이 우수했지만 거만하지 않고 친구들과 잘 어울리며 어려운 이들을 돕는 성격의 소유자였다. 라이칭더는 어릴 적 사찰(불교, 도교) 행사나 장례식 등 사람이 모이는 행사에 관심이 많았다. 이를 눈치챈 그의 모친은 라이칭더에게 “그런 활동은 도움이 되는 것이 아니니, 다시는 가지 말라”고 훈계한다. 어느 날은 라이칭더가 야생 거북이를 잡아서 집에 들고 갔는데, 모친은 아들이 애완동물을 기르면 공부에 방해가 될 것으로 판단하고 아들 몰래 거북이를 방생했다.

라이칭더는 타이베이 친구집에서 숙식하며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국립 대만대학 재활의학과에 진학, 학사학위를 받는다. 대학 시절에는 학비와 생활비를 충당하기 위해 매주 이틀씩 가정교사를 했다고 스스로 말한다. 대학교 2학년 재학 중에 당시 친구 동생의 고등학교 입학시험에 보호자로 갔다가 같은 입학시험장에서 한 보호자를 만나게 된다. 지금의 아내인 우메이루(吳玫如, 현재 대만은 결혼후 남편의 성을 따르지 않는다) 여사다. 라이칭더는 대학 졸업 전까지 그녀에게 마음은 있으나 준비가 안되 자신의 마음을 전하지 않았다고 한다.

라이칭더는 대학 졸업 후 군에 입대해 진먼현(金門縣, 금문도)에서 보건부대 장교로 근무했다. 퇴역 때 우수장교 10인에 선정됐을 정도로 모범적이었다고 한다. 제대 후에는 타이베이시 완화구(萬華區) 런지병원(仁濟醫院)에서 1년간 물리치료사로 일한 후 타이난(臺南)에 있는 국립 성공(成功)대학교 대학원 의학과(전문의학대학원)에 입학, 졸업후 은사의 권유로 성공대학교 부속병원 소속 의사가 된다. 그가 타이난으로 유학을 가게 된 이유는 물리치료사로 일하던 어느 날 환자 한명이 유학을 권해서라고 그의 지인이 전한다. 그 충언에 그는 일과 시험을 병행했고, 그 결과 성공대학 의대 제3기생으로 당당히 입학하게 됐다. 졸업 후에도 성공대학 부속의대에 남아 타이난에서 생활했고, 정계에 있던 2003년부터 3년간 휴가를 활용해 방미하며 학기제인 하버드대학교 공공위생학 석사 학위도 취득한다.

당시 대만 청년들의 꿈은 일류 대학 졸업 후 미국 유학이었다. 미국 일류대학에서 공부하고 싶다는 라이칭더의 꿈도 그의 꾸준한 의지와 노력으로 결국 성취하게 된다. 라이칭더는 미국에서 보낸 시절이 가족과 함께 좋은 추억을 만든 ‘인생의 가장 행복했던 시기’라고 회상한 바 있다. 그의 큰 아들 라이팅위(賴廷與)는 미국 워싱턴대학교 전기공학 박사가 됐으며, 둘째 아들 라이팅옌(賴廷彦)도 미국에서 생화학을 전공하고 귀국하여 계속 학업을 이어갔다. 그의 두 아들 모두 독립적인 성격이 라이칭더와 유사하다. 라이칭더의 아내는 대만전력(臺電)에서 일했는데, 늘 조용히 내조하는 성격이라고 한다.

국립 성공대학 병원과 타이난 신러우(新樓)병원 의사였던 그는 1994년 천딩난(陳定南)이 대만 초대 민선 성장(省長)으로 출마했을 때 ‘전국 의사 지원협회’의 총위원장을 맡게 된다. 정치에 연을 맺게 된 계기다. 지난해 총통으로 당선되기 30년 전의 일이다. 1996년 라이칭더는 민진당 의사출신 입법위원 홍치창(洪奇昌)의 추천으로 타이난시 제1선거구에서 출마해 제3대 전국대표대회 대표로 당선된다. 1998년에는 타이난 시 선거구에서 제4대 입법위원으로 당선되며, 이후 2008년 제7대 입법위원 선거까지 잇달아 당선되 4선 위원이 된다. 2010년에는 제1대 타이난 시장선거에 출마해 당선되고, 2014년 제2대 시장선거에서 연임한다. 2017년 차이잉원(蔡英文) 총통이 지명해 행정원장으로 임명되지만 민진당이 2018년 11월 지방선거에서 참패하면서 다음해 1월 14일 사임한다.

2019년에 중화민국 총통선거 당내 예비선거에 출마하지만 당시 연임을 준비하던 차이잉원(蔡英文) 총통에게 패했고, 이후 민진당 부통령 후보가 된다. 2020년 1월 11일 민진당이 총통 선거에 승리하면서 같은 해 5월 20일 부총통으로 취임한다. 그러나 2022년 11월 민진당은 지방선거에서 또 참패하게 되고, 이때 라이칭더는 민진당 대표 보궐선거를 통해 당 주석에 당선된다. 이후 라이칭더가 민진당 후보로 총통 선거에 출마, 당선된다. 그의 모친이 가르친 독립적 생활방식과 모범적인 사회생활이 광산촌 소년을 의사로, 정치인으로 그리고 대만의 지도자로 만든 것이다.

라이칭더 총통 당선인과 부총통 당선인 샤오메이친(蕭美琴)은 2024년 1월 13일 총통 선거에서 40.05%의 득표율로 승리했다. 과거 차이잉원 총통이 연임할 때 득표율(57%)에는 부족하고 입법위원도 과반을 넘기지 못한 상황이다. 라이칭더의 국내 정치가 그리 쉽지 않을 것으로 예상되는 이유다.

부총통은 미국 문화에 능숙한 국제 인재


▎대만인들 다수는 “대만은 독립국”이라는 인식을 갖고 있다. 라이칭더 총통이 중국과의 관계를 어떻게 유지할 것인지에 관심이 깊은 이유다. 사진은 대만 타이베이 전경. / 사진:로이터
부총통이 된 샤오메이친은 타이난 출신 선교사 아버지(샤오칭펀, 蕭淸芬)와 미국인 모친(蕭邱碧玉, Peggy Cooley) 사이 일본 고베에서 출생한 대만인이다. 중국어, 영어, 대만어 및 대만과 미국 문화에 능숙한 ‘국제 인재’다. 그는 얼마 전까지 시간을 내서 일본어도 학습했다고 한다. 대만사회에서 의사와 정치인으로 성장한 총통과 대만과 미국에서 민진당과 정부의 국제업무에 종사한 부총통의 조합으로 대만은 새로운 정치환경을 맞이하고 있다.

이러한 새로운 대만 정치 지도자 등장의 의미는 대만 정치의 새로운 변화를 의미한다. 그리고 민진당은 차이잉원 총통의 연임에 이어 3연속 집권이라는 결과를 맞이한다. 1996년 중화민국 총통선거 이후 정당 최장 연속 집권이라는 기록도 세웠다. 다음 선거에서 민진당과 국민당의 대결이 더욱 격해질 수 있다는 판단이 서는 이유다. 퇴임을 1주일 남긴 차이잉원 총통은 2024년 5월 13일 라이칭더 부주석과 샤오메이친 전 주미대사 등 13명의 정부 관료들에게 그들의 뛰어난 리더십과 발전을 위한 끊임없는 노력에 감사를 표하며 표창(中山훈장)했다. 차이잉원 총통은 라이칭더 신임 총통이 ‘자신과 함께 같은 정치 여정’에 있어 국가 발전의 중요한 기반을 마련해준 것에 대해 감사를 표했다. 퇴임을 앞둔 차이잉원 총통의 이러한 언급은 라이칭더 신임 총통이 차이잉원 총통의 길을 이어가라는 무언의 지시와 같은 의미로 볼 수 있다. 민진당의 3연임을 달성한 차이잉원 총통의 의지가 라이칭더 집권 초기에 큰 변화를 일으키기 어려울 것이라고 보는 것이 대만 정치학자들의 예측이다. 그러나 일각에선 라이칭더가 자신의 방식, 순서 및 속도로 라이칭더의 계획된 계단식 변화를 추구할 수도 있다고 보고 있다. 그의 인생과 같이 계획대로 천천히 계단을 오르듯 추진될 것이라고 본다.

필자가 대만에서 만난 정치권 관계자들은 대부분 민진당 내부 일에 대해 얘기하길 꺼려했다. 민진당 3연임은 대만 민주화 이후 민진당, 국민당 모두 처음이기 때문이고, 민진당 내부도 복잡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 밖에도 중국의 대만 공세와 민간의 양안 교류 및 대만과 미국, 일본과의 관계 등이 셈법을 복잡하게 한다. 라이칭더 총통에 대한 중국의 압박도 한층 거세지고 있다. 미국의 대만에 대한 관심과 향후 협력도 주요 이슈로 떠오르고 있는 상태이기에 미국의 인도·태평양 전략과 미·중관계는 대만에 매우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한다.

양안 관계 대처와 경제발전 해결 주력할 듯

최근 미국 의회 조사국 의회에 제출한 보고서에 따르면 라이칭더 총통은 차이잉원 총통의 양안 정책의 기조를 따르겠다 약속했다. 양안 긴장을 높이는 대만 독립 정책을 추진하지 않겠다는 약속도 했다. 이러한 이유는 라이칭더 총통이 미국에 양안 관련 입장을 드러내 미국의 이해와 신뢰를 얻으려는 의도로 보인다. 작년 총통 선거 당시 미국 정계는 라이칭더에 대해 ‘회의적’이라는 소문이 있었다고 한다.

라이칭더 총통은 과거 대만 독립을 주장하며 중국의 압박에 대만의 국제사회와의 연대를 강하게 주장해 왔다. 2019년에는 “민진당의 입장이 반공이지만 반중은 아니다. 중국에 의한 통합 반대”라고 전제하면서도 “중국 공산당이 확장을 추구하고 국제 질서를 변화시키고 있다”고 비판하기도 했다. 정치적 슬로건이 대만 주권에 대한 깊은 관심과 표명이었다.

라이칭더 총통과 샤오메이친 부총통은 미국의 동아시아 전략에 부합하는 방식으로 대만의 대외정책에 초점을 맞출 것으로 예상된다. 또한 경제적 측면에서 라이칭더 총통이나 샤오메이친 부총통이 모두 타이난과 깊은 인연이 있고, 이곳이 민주화를 대표하는 천수이볜 전 총통의 정치적 고향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타이난 발전과 연관된 난커(南科, 타이남 과학원구)의 반도체 산업과 인프라에 적극적인 투자가 있을 것이란 예측도 나온다. 동시에 라이칭더 정부의 중국에 대한 태도도 어느 정도 강약을 조절하며 대만 사회의 안전과 경제적 발전에 더 많은 기회를 창출할 가능성이 높은 상황이다.

대만이 국가인가 아닌가의 문제도 대만 사회에 중요한 이슈다. 최근 대만 사람들의 입장은 “대만은 국가”로 요약된다. 미국과의 관계를 중시하면서도 대만의 이익을 고려해야 하는 대만 사람들은 중국과 관계를 어떻게 유지하며 대만에 도움이 되는 정책을 펼쳐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깊은 관심을 갖고 있다. 젊은이들이 생각하는 급여 인상문제와 이들이 소유할 수 있는 주택 문제 해결도 현안으로 등장할 가능성이 높다. 다음 선거를 안중에 두어야 하기 때문이다. 중국의 위협에 대처하는 것이 필요하지만 민심을 만족시킬 수 있는 경제 발전도 라이칭더 정부의 중요한 국가 현안인 것이다.

- 김진호 단국대 정외과 교수(대만 중앙연구원 방문학자) haisan88@naver.com

202406호 (2024.05.17)
목차보기
  • 금주의 베스트 기사
이전 1 / 2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