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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 정신의 미학(101)] ‘북학파’ 이끈 문장가 연암(燕巖) 박지원 

이용후생(利用厚生)으로 ‘상공업사회 조선’ 꿈꾼 혁신가 

청나라 기술문명 받아들여 안의 현감으로 있으면서 실생활에 접목
[열하일기] 등 ‘법고창신’하며 문체 혁신, 조선의 고루한 관습 풍자


▎김윤수 지리산문학관장이 연암물레방아공원에서 박지원과 안의(安義)의 인연을 설명하고 있다. / 사진:송의호
"생각하면 박녀의 마음이 어찌 이렇지 않았으랴! 젊은 과부가 오래 세상에 남아 있으면 친척들이 길이 불쌍히 여기는 신세가 되고, 동리 사람들이 함부로 추측하는 대상이 됨을 면치 못하니 속히 이 몸이 없어지는 것만 못하다고….”

조선 후기 문장가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 1737~1805)이 쓴 [열녀 함양 박씨전(烈女咸陽朴氏傳)]의 뒷부분이다. 함양 박씨(박녀)는 19세에 고을 아전 집안 임술증의 처가 되었는데 혼사를 치르고 채 반년이 못 돼 남편이 폐결핵으로 죽었다. 박녀는 예를 다해 지아비 상을 치르고, 도리를 다해 시부모를 섬겨 칭찬이 자자했다. 그러나 박녀는 남편 삼년상을 마친 뒤 음독했다.

당시 연암은 지금의 함양군 안의(安義)면 현감으로 있었다. 어느 날 그가 동헌에서 새벽에 잠이 깨었는데 밖이 소란스러웠다. 알고 보니 당직 아전 가운데 박녀의 숙부가 있어 급히 구완해 달라는 연락이 온 것이다. 연암은 그렇게 박녀를 알게 됐고 남편을 따라 바로 죽지 않은 절의를 이렇게 마무리했다. “아! 슬프구나. 성복(成服)하고도 죽음을 참은 것은 장사 지내는 일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요, 장사 지내고도 죽음을 참은 것은 소상이 있었기 때문이요, 소상 지내고도 죽음을 참은 것은 대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대상이 끝났으니 상기(喪期)가 다한 것이요, 한날한시에 따라 죽어 마침내 처음 뜻을 완수했으니 어찌 열녀라 아니 할 수 있겠는가.” 연암은 남편을 따라 바로 죽어야 열녀로 기리는 과부의 순절(殉節) 풍속을 문제 삼은 것이다.

6월 19일 안의를 찾아 김윤수 지리산문학관장과 함께 박지원의 자취를 답사했다. 박지원은 본래 서울 노론 명문가에서 태어났다. 가문은 임진왜란 공신과 선조 부마 등을 배출했고, 연암의 조부 박필균은 경기도 관찰사와 호조 참판을 지냈다. 20세 무렵 박지원은 과거시험을 준비했지만 혼탁한 벼슬길에 나서야 할지 번민했다. 소과에서 장원을 차지했던 박지원은 1765년 첫 과거에서 낙방한다. 그는 이후 과거를 접고 새로운 시대정신을 탐색한다.

함양 안의(安義) 현감으로 5년 동안 ‘선정’


1768년(영조 44) 박지원은 파고다공원인 백탑 근처로 이사하면서 이웃에 사는 박제가·이서구·유득공 등과 교유했다. 또 홍대용·이덕무 등과 자주 만나면서 이용후생(利用厚生)을 이야기한다. 이들은 도시에서 나고 자란 집권 노론 가문의 자제들로 국제 정세에 밝고 변화에 민감했다. 나아가 조선의 낙후된 현실을 타개하기 위해 청나라의 발전상을 연구한다. 실학의 한 흐름인 이른바 북학파가 등장한 것이다.

1786년 연암은 음직으로 선공감 감역이 됐다. 그가 집안 생계를 책임져야 할 형편이어서 나이 50에 처음 벼슬길에 나선 것이다. 그 뒤 평시서 주부, 의금부 도사, 제릉 영, 한성부 판관을 거친다. 이 무렵 동갑내기 아내가 세상을 떠났다. 친지들은 새 장가를 들거나 첩을 들이라고 조언한다. 그러나 박지원은 단호히 거부한다. 그는 고추장을 만드는 등 먹는 일을 스스로 해결하며 68세 삶을 마칠 때까지 독신으로 지냈다.

1792년(정조 16) 박지원은 경상도 안의 현감으로 나간다. 연암은 여기서 5년 동안 선정(善政)에 힘쓰는 한편 왕성하게 글을 썼다. “연암은 안의에서 수령으로 득의(得意)의 시절을 보냅니다. 사적비가 서 있는 안의초등학교가 관아인 동헌 자리입니다.” 김윤수 관장은 남아 있던 관아는 일제강점기에 모두 뜯겼다고 설명한다.

안의초등학교 교정에 실학을 천착한 이우성이 지은 ‘연암 박지원 선생 사적비’가 세워져 있다. 박지원은 현감 시절 [열녀 함양 박씨전] 등 [연암집]에 실린 40여 편을 창작했다. 그는 또 이곳에서 자신의 문집을 정리하면서 편제에 ‘연상각선본(煙湘閣選本)’ ‘공작관문고(孔雀館文稿)’ 등 이곳 관아 건물의 명칭을 붙여 자신의 안의 시절을 기념했다.

옛것을 본받아 새롭게 창조하자는 ‘법고창신’


▎안의현 시절 이방 등이 머물던 관아인 질청 자리엔 지금 사찰이 들어섰다. / 사진:송의호
이와 함께 연암은 평소 깊이 연구한 과학기술을 이 고을에서 실제 구현했다. 연경(燕京, 북경)에서 체득한 지식으로 장인에게 직접 기술을 가르쳐 베틀과 양수기, 물레방아 등 새로운 생산기구를 제작해 사용토록 한 것이다. 또 자신이 연경에서 배운 벽돌 제조 기술을 활용해 관아의 부속건물인 백척오동각(白尺梧桐閣)·공작관·하풍죽로당(荷風竹露堂) 등을 새로 짓고 연지(蓮池)를 조성했다. 장차 도래할 상공업사회를 앞당길 이용후생이다. 이는 18세기 전반 성호 이익을 중심으로 토지개혁론 등 농경사회 골격을 유지하려 했던 남인 실학파와 다른 점이다.

이러한 연암의 생각은 북학파가 연행(燕行)을 통해 청나라 발전상을 깊이 연구한 결과였다. 정옥자 서울대 명예교수는 “이들이 제창한 대표적인 것으로 용거(用車, 수레 이용)·용벽(用甓, 벽돌 이용)을 들 수 있다”고 정리한다. 낙후 원인을 물류가 원활치 못한 데 있다고 봐 수레를 활용하자고 주장한 것이다. 그때까지 조선의 이동 수단은 인력거가 중심이었다. 수레는 물류 혁명인 마차로 이어지고 마차가 다니려면 신작로 건설이 필수적이다. 그래서 수레를 농경에서 상공업사회로 바꿀 방편으로 인식한 것이다. 또 이들은 주택·성곽·누대·분묘·창고 등 건축에 광범하게 쓰일 벽돌의 제조 기술을 도입하자고 주장했다. 용거와 용벽을 가난 구제와 부강의 방책으로 본 것이다.

문장은 ‘법고창신(法古創新)’을 내세웠다. 연암이 쓰기 시작한 이 표현은 고사성어처럼 친숙하다. 옛것을 본받아 새롭게 창조하자는 박지원의 문장론이 집약된 말이다. 이는 옛것을 본받는 법고에 집착하면 때가 묻을 수 있고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창신에만 경도되면 근거가 없어져 위험하다는 것이다. 연암은 몸소 파격적이고 참신한 소품체 산문을 많이 지었다.

벼슬에 나서기 전인 1777년(정조 1) 박지원은 왕위 교체로 정국이 불안하고 가정 형편까지 어려워 서울을 떠난다. 그는 대신 개성 인근 황해도 금천군 골짜기 연암협(燕巖峽)으로 들어갔다. 그의 아호 연암은 여기서 유래한다. 박지원은 거기서 명성을 듣고 찾아온 개성 선비들을 지도하는 한편 국내외 농서를 두루 읽고 초록했다. 이게 바탕이 돼 훗날 [과농소초(課農小抄)]를 저술한다.

1780년 연암의 삼종형 박명원은 청나라 건륭제의 만수절(칠순)을 축하하는 특별 사행의 정사로 임명된다. 44세 박지원은 수행원 자격으로 이 연행에 합류했다. 그토록 염원한 기회가 온 것이다. 당시 조선 사회는 병자호란 이후 오랑캐 청나라를 정벌하자는 북벌론이 점차 퇴색하고 있었다. 대신 청나라 선진 기술을 배우자고 주장하는 사상이 싹트고 있었다. 연암이 그 흐름을 주도했다. 박지원은 홍대용·박제가·이덕무 등에 이어 마침내 청나라 실상을 직접 목격하게 된 것이다.

조선의 산문에 한 획을 그은 '열하일기'


▎문장가 박지원을 일거에 알린 청나라 연행록 [열하일기]의 표지. / 사진:실학박물관
연행은 고행길이었다. 그동안 연행은 연경까지 갔는데 이번에는 처음으로 황제 별궁이 있던 만리장성 너머 열하(熱河)까지 이어졌다. 압록강에서 연경은 2000여 리, 연경에서 열하까지는 700여 리. 거기다 폭염과 폭우가 교차했다. 연암은 당시의 견문을 개성이 뚜렷한 문장으로 표현했다. [열하일기]다. 여기엔 여행기는 물론 [호질(虎叱)] [허생전] 등 소설도 들어 있다. 그중 천신만고 끝에 깨달음에 이른 여행 체험 [일야구도하기(一夜九渡河記)] 한 대목을 옮긴다. “한번 떨어지면 강물이다. 그땐 물을 땅이라 생각하고, 물을 옷이라 생각하고, 물을 내 몸이라 생각하고, 물을 내 마음이라 생각하리라. 그렇게 한번 떨어질 각오를 하자 마침내 내 귀에는 강물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무릇 아홉 차례나 강을 건넜건만 아무 근심 없이 궤석에 앉았다 누웠다 하며 생활하는 것 같았다.”

[열하일기]는 조선의 산문에 한 획을 그었다. 박지원의 명성은 자자해졌다. 이후 문제도 생겨난다. 안의 현감 시절 연암은 뜻밖에 10년 전쯤 쓴 [열하일기]로 곤경에 빠진다. 정조가 문체를 지적한 것이다. “[열하일기]가 정통 고문을 벗어나 있다”며 속죄하는 글을 바치라는 어명을 내렸다. 뒤에는 다시 [열하일기]가 청나라 연호를 쓴 글이라는 공격을 받기도 한다.

안의면 소재지를 떠나 37도 폭염 속 지우천 곁 연암물레방아공원을 찾았다. 조금 더 올라가면 용추계곡·용추폭포가 나온다. 물레방아공원은 함양군이 물레방아 시원지라며 조성한 공간이다. 연암이 [열하일기]를 통해 조선에 처음 소개한 물레방아를 안의 현감 시절 개량해 베틀 등과 함께 만들어 실용화했다는 것이다. 국내 최대 규모라는 물레방아가 물의 낙차로 돌아가고 있었다. 붓을 든 연암의 동상도 세워져 있다. 공원 아래쪽 안심마을에는 연암 당대에 사용됐다는 대형 물레방아 확이 1987년 지우천에서 발견돼 전시돼 있었다. 이런 인연으로 함양군은 안의 일대에서 해마다 피서철인 8월 연암문화제를 열고 있다.

안의에는 일두 정여창 선생이 세운 광풍루(光風樓)가 있다. 그 뒤로 안의를 거친 현감의 선정비가 차례로 세워져 있다. 그러나 연암의 선정비는 보이지 않았다. 김윤수 관장은 “선생이 자기 선정비 건립 이야기를 듣고는 세울 경우 당장 때려 부수겠다며 단호히 거절한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1796년(정조 20) 연암은 5년에 걸친 안의 현감생활을 마친다. 그는 이후 서울로 돌아가 채용감 주부, 의금부 도사, 의릉 영을 지내고 이듬해 충청도 면천(지금의 당진군 면천면) 군수로 나간다. 여기서 연암은 어명으로 제주도 사람의 해상 표류기인 [서이방익사(書李邦翼事)]를 짓는다. 그는 또 이 시기 ‘농업을 장려하기 위해 널리 농서를 구한다’는 정조의 윤음(綸音)을 받들어 [과농소초]를 마무리해 올렸다. 정조는 이를 두고 “좋은 경륜 문자를 얻었다”며 장차 연암에게 농서대전(農書大全) 편찬을 맡기려 했다. 규장각의 문신들도 칭송이 자자했다.

1800년 연암은 세 번째 지방관인 강원도 양양 부사로 승진한다. 정조가 승하한 직후다. 그러나 그는 거기서 궁속(宮屬, 궁에 속한 종)과 결탁해 횡포를 부리던 승려를 징계하는 문제로 관찰사와 부닥친다. 이듬해 박지원은 늙고 병들었다는 핑계로 사직한다. 50대에 시작된 생계형 관직 생활이 끝난 것이다.

서울 북촌에서 임종, 묘소는 개성 선죽교 인근


▎이창규 함양연암문화제 위원장이 연암이 안의 현감 시절 설치한 것으로 추정되는 물레방아 확을 껴안아 보고 있다. / 사진:송의호
1805년(순조 5) 10월 연암은 서울 북촌 재동 자택에서 삶을 마쳤다. 유언은 “깨끗이 목욕시켜 달라”는 것뿐이었다. 여태 연암을 알리는 독립된 기념관은 없다. 묘소는 휴전선 이북인 선죽교 인근 개성시 은덕동 황토고개 아래에 있다. 무덤은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실전됐다가 발견돼 북한이 1990년대 봉분을 쌓는 등 정비했다.

연암은 손자 박규수를 두었다. 박규수는 평안도 관찰사로 있던 1866년 대동강을 무단 침입한 미국 선박 제너럴 셔먼호를 군·관민 합동으로 격퇴한 인물이다. 그는 또 개화파로서 1876년 판중추부사로 있으면서 일본과 강화도조약을 체결하는 데 앞장섰다. 김옥균·박영효 등이 그 영향을 받았다.

김택영은 [여한십가문초(麗韓十家文鈔)]에서 연암을 중국의 당송팔가(唐宋八家)에 비길 조선의 대표적 고문가(古文家)로 꼽았다. 김명호 성균관대 교수는 “연암은 고문의 전통을 계승하면서도 규범에 얽매이지 않고 소설식 문체와 조선 고유의 속어·속담·지명 등을 구사하여 기기(奇氣)와 기변(奇變)이 넘치고 민족문학적 개성이 뚜렷한 산문을 남겼다”고 평했다.

연암 박지원은 북학파를 이끌며 조선이 풍요해진다면 청나라의 기술문명을 과감하게 받아들일 것을 주장한 이용후생 실학자였다. 또 자유롭고 재치 있는 글로 백성들과 함께 호흡하며 고루한 사상을 혁신한 선비이기도 했다.

[박스기사] ‘원사(原士)’라는 글에 드러난 연암의 선비관

“많을수록 유익하고 오래갈수록 폐단 없는 것은 오직 독서”

연암 박지원은 호랑이를 통해 선비를 꾸짖는 작품 〈호질(虎叱)〉과 함께 선비와 독서에 대해 평소 떠오르는 생각을 메모했다. ‘원사(原士)’라는 글이다. 연암문학연구원 김혈조 전 영남대 교수는 “이 글에서 연암의 선비관을 엿볼 수 있다”고 말한다.

“무릇 선비(士)란 아래로 농(農)·공(工)과 같은 부류에 속하나, 위로는 왕공(王公)과 벗이 된다. 지위로 말하면 농·공과 다를 바 없지만, 덕으로 말하면 왕공이 평소 섬기는 존재다. 선비 한 사람이 글을 읽으면 그 혜택이 사해(四海)에 미치고 그 공은 만세에 남는다.” “천자는 ‘원래 선비(原士)’다. 그의 작위는 천자지만 신원은 선비인 것이다.”

“선비란, 뜻은 어린아이와 같고 모습은 처녀와 같으며, 1년 내내 문을 닫고 글을 읽는 사람을 말한다. 어린아이는 비록 연약해도 흠모하는 것에 전념하고 처녀는 비록 수줍어도 순결을 지키는데 굳건하나니, 우러러봐도 하늘에 부끄럽지 않고, 굽어봐도 사람에게 부끄럽지 않은 것은 오직 문을 닫고 글을 읽는 그 일인저!”

“명분과 법률이 아무리 좋아도 오래되면 폐단이 생기고, 쇠고기 돼지고기가 아무리 맛있어도 많이 먹으면 해가 된다. 많을수록 유익하고 오래갈수록 폐단이 없는 것은 오직 독서일 것이다.” “글 읽는 법은 일과를 정하는 것보다 더 좋은 게 없고, 질질 끄는 것보다 더 나쁜 게 없다.”

- 송의호 대구한의대 교수 yeeho1219@naver.com

202408호 (2024.0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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