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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석의 19세기 미시사 탐구(18)] 조선시대 법률가와 의사는 어떤 대우를 받았을까 

지배층 아닌 중인에 불과… 문·무과보다 낮은 ‘잡과’ 통해 선발 

정치가·군인이 대접 받아… 천문학자·지리학자는 천대
중국 무역에 관여하던 통역관은 많은 재산 축적하기도


▎조선시대 의사라고 하면 [동의보감]의 저자인 허준 외에는 잘 떠오르지 않는다. 사진은 소매 안에 넣을 수 있게 만든 ‘휴대용 동의보감’. / 사진:국립전주박물관
대학입시를 앞둔 학생이나 학부모가 선호하는 학과를 꼽는다면 문과에서는 법과, 이과에서 의과라고 하면 큰 잘못은 아닐 것이다. 현재 우리 사회에서 의사와 법률가가 차지하는 위상을 생각한다면 이는 당연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의사나 변호사가 되기 위해 의과대학(의학전문대학원)이나 법과대학(법학전문대학원)에 들어가려면 영어와 수학을 잘해야 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현재의 직업과 그 성격이 같지는 않지만, 조선시대에도 법률가와 의사가 있었다. 조선시대 의사라고 하면 웬만한 사람은 [동의보감]의 저자인 허준을 떠올릴 것이다. 그런데 허준 외에 유명한 의사는 더 이상 생각나지 않고, 법률가로 알려진 사람도 기억나는 사람이 없는 것 같다. 500년이나 존속한 조선인데, 금방 이름이 생각날 정도로 유명한 의사나 법률가가 없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조선시대 유명한 법률가나 의사를 우리가 잘 떠올리지 못하는 이유는 어떤 인물이 있었는지 중·고등학교에서 배운 일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조선시대 의사와 법률가는 양반이 아니라 대부분 중인이었는데, 중인은 조선의 지배층이 아니므로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다. 양반 정치가나 군인처럼 지배층에 속한 조선시대 인물에 관한 자료는 매우 많이 남아 있지만, 지배층이 아닌 중인 신분의 의사나 법률가에 관한 자료는 그렇게 많지 않다.

이렇게 이들에 관한 역사적 자료가 적으니 자연히 이를 연구하는 연구자도 많지 않고, 사회적 관심도 적을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전문적으로 조선시대 의학이나 법학을 연구하는 사람이 아니고서는 당대 의사나 법률가에 대한 정보를 가진 사람이 그렇게 많지 않다. 우리가 중·고등학교에서 조선시대 법률가나 의사에 대해 배운 일이 많지 않다는 것은 이들에 관한 역사적 자료가 적고, 이 분야를 연구하는 연구자가 적다는 의미다.

21세기 한국에서 의사와 법률가는 누구나 되고 싶어 하는 최상층 직업이지만, 조선시대에 이들은 전문적 기술과 지식으로 양반 통치에 봉사하는 중인에 불과했다. 그리고 기술과 전문지식을 갖춘 사람들의 신분이 양반이 아니었다는 사실은 조선에서는 전문지식을 그다지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지금은 좋은 대학에 가기 위해 반드시 영어와 수학을 잘해야 하지만, 조선시대 양반들은 외국어를 배우지 않았고, 수학을 공부할 필요성도 거의 느끼지 않았다. 수학이나 외국어가 필요한 직업은 대부분 중인계층 사람들이 맡아서 일하는 분야였다. 그러나 국가를 운영하기 위해서는 의학이나 법학은 물론이고 외국어와 수학을 잘 하는 사람들이 필요하므로, 조선은 건국 초기부터 이런 능력을 가진 인력을 선발하는 제도를 갖추고 있었다.

시험 과정도 간결했던 잡과

조선시대 관리가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과거에 합격해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과거에 급제한 사람이 출세가 빨랐던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과거제도를 얘기할 때면 주로 문과만을 얘기하기 때문에 무과의 존재에 대해 사람들은 별로 관심이 없다. 조선 최고위직 관료인 정승(영의정, 우의정, 좌의정)을 지낸 사람들은 거의 문과 출신인 것만을 보더라도 조선시대에 문과가 무과보다 훨씬 중요했다는 점은 분명하다.

조선시대 궁중에서 임금에게 문안을 드리고 정사를 논의할 때 문관은 동쪽에 서고 무관은 서쪽에 섰으므로, 문관은 동반이라 하고 무관은 서반이라고 했다. 조정에서 조회할 때 서 있는 방향에 따라 동반과 서반이라 했고, 이 둘을 합해서 양반이라고 한 것이다. 이처럼 양반이라는 말은 원래 문관과 무관을 함께 일컬을 때 쓰는 용어였는데, 후에 양반은 지배층을 의미하는 단어가 됐다.

조선시대의 양반들은 문관과 무관 외의 일은 하지 않았으므로, 국가에서 필요한 수많은 전문기술직은 양반이 아닌 계층의 사람들이 맡아서 했다. 그런데 이런 일을 맡을 사람의 수준을 일정 정도 유지하기 위해서는 적절한 선발과정을 거칠 필요가 있었다. 이들 전문직 인원을 선발하기 위한 시험이 바로 과거의 잡과(雜科)다. 조선시대 문과와 무과 외에 잡과라는 과거시험이 있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이 방면에 특별히 관심을 가진 사람이 아니면 잘 모를 수도 있다.

원래 과거시험은 3년에 한 번 치르는 것이 원칙으로, 이를 식년시(式年試)라고 불렀다. 식년시는 육십갑자에 자(子), 묘(卯), 오(午), 유(酉)자가 들어가는 해에 치르는 과거시험이었다. 그리고 나라에 경사가 있을 때 실시하는 증광시(增廣試)가 있었다. 그런데 조선 후기로 가면서 식년시와 증광시 외에 다양한 이름의 과거가 생겨났다. 이런 종류의 과거 중에는 단 한 차례의 시험으로 급제자를 결정하는 것이 많았다.

특히 19세기 들어 문과와 무과는 3년에 한 번씩 치르는 식년시 외에 단 한 차례로 급제자를 결정하는 부정기 시험이 더 자주 있었다. 한 번에 10만 명 이상이 서울에 모여 시험을 치르는 일이 많았고, 19세기 중반이 되면서 20만 명 이상이 치른 시험도 여러 차례 있었다. 그러나 이런 부정기 과거시험은 문과와 무과만 실시했고, 잡과는 실시하지 않았다. 잡과는 식년시와 증광시에서만 실시했다.

같은 과거시험이라 하더라도 잡과는 문과나 무과에 비해 격이 떨어진다고 할 수 있는데, 우선 ‘잡과’라는 이름부터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는 인상을 준다. 실제로도 문과와 무과는 3단계의 시험을 거치지만, 잡과는 2단계뿐이었다. 문·무과는 제2단계 시험의 합격자를 임금이 친히 참석한 자리에서 다시 시험을 봐 최종 합격자를 정했지만, 잡과는 제2단계 시험에서 합격자를 결정했다. 그리고 합격증서에 찍는 도장도 문·무과는 붉은색 종이에 어보(임금의 도장)를 찍었지만, 잡과는 흰 종이에 예조의 도장을 찍었다.

조선시대에는 양반이 아니면서도 나라에 꼭 필요한 일을 맡는 사람이 많았다. 그들의 직업은 매우 다양한데, 대표적으로 통역관, 의사, 음양학자, 법률가 등을 꼽을 수 있다. 국가에서 필요한 전문기술직은 다양하지만, 이 가운데 위 네 가지 분야에만 잡과가 설치됐다. 통역관 선발은 역과(譯科), 의사 선발은 의과(醫科), 천문학자나 지리학자 선발은 음양과(陰陽科), 법률가 선발은 율과(律科)를 통해 이뤄졌다.

잡과에서 선발한 인재들이 맡은 역할은 통역관은 외국과의 외교에서 통역을 담당하고, 의사는 사람들의 건강을 돌보며, 음양학자는 달력 제작이나 묫자리의 선택 그리고 길흉을 점치는 일을 맡았고, 법률가는 수많은 법률 관련 서적과 임금의 명령을 체계적으로 정리해 필요할 때 바로 해당 법률을 적용하는 일을 담당했다.

의과·율과는 하위 분과도 없어


▎조선시대 과거시험에서 의사 등을 선발하던 잡과는 문과나 무과에 비해 격이 떨어졌다. 사진은 4월 13일 서울 강남구 못골한옥어린이 도서관에서 어린이 독서경연을 과거시험 방식으로 재현한 ‘일필휘지’에 참가한 어린이들이 시제에 맞춰 문제를 푸는 모습. / 사진:연합뉴스
과거시험 잡과의 네 분야 가운데 의과와 율과는 하위 분과가 없었고, 역과와 음양과는 하위 분과가 있었다. 통역관을 선발하는 역과에는 중국어·몽골어·일본어·만주어 등 네 분과가 있었고, 음양과에는 천문학·지리학·명과학 등 세 분과가 있었다. 통역을 담당하는 관청은 사역원(司譯院)인데, 네 가지 외국어의 하위 분과가 있었다. 중국어는 한학(漢學)이라는 이름으로 불렀는데, 가장 중요한 분야였다. 19세기에 중국을 지배한 것은 만주족의 청나라지만, 중국과의 외교에서 사용하는 언어는 주로 중국어였다. 몽골어는 몽학(蒙學)이라 했다. 실제로 몽골어를 쓸 일은 별로 없었지만, 몽골이 한때 강성한 국가였으므로, 비상시를 대비해 몽골어를 할 수 있는 인원을 확보해 둘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일본어는 왜학(倭學)이라고 했는데, 일본에 사절단이 가거나 왜관의 일본인과 의사소통을 위해 필요한 외국어였다. 만주어는 여진학(女眞學) 또는 청학(淸學)이라는 이름으로 불렀는데, 압록강을 경계로 조선과 마주한 여진족의 언어였다. 여진족은 자신들의 명칭을 만주족으로 바꾸고, 이들이 명나라를 없애고 청나라를 건국했으므로 중요한 외국어였다. 그러나 청나라를 세우기 전에도 여진족과의 의사소통을 위해 만주어 통역관이 필요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의사는 반드시 필요한 존재였으므로, 조선시대에도 의사를 선발하는 과거가 반드시 필요했다. 그런데 의과에서 선발하는 의사는 일반 서민을 치료하는 의사를 뽑는 것이 아니었다. 이들 잡과의 의과 출신자들은 내의원(內醫院)을 중심으로 한 조정의 의료기관에서 근무했다. 그리고 이들이 맡은 가장 중요한 일은 왕을 비롯해 왕실 사람들의 건강을 돌보는 일이었다.

음양과를 담당하는 관청은 관상감(觀象監)이다. 음양과의 각 분과에서 하는 주된 일을 살펴보면 천문학은 달력 제작이고, 지리학은 왕실의 묫자리 등을 잡는 일이며, 명과학(命課學)은 국가 행사에 있어 길일을 선택하는 일이었다. 천문학은 수학이 필요한 순수한 자연과학 분야였지만, 지리학은 풍수지리를 말하는 것으로 지금의 지리학과는 다르다. 그리고 명과학은 운명과 길흉을 점치는 일이나 좋은 날을 잡는 것을 전문으로 했다.

율과는 법률을 담당하는 형조(刑曹)의 소관이었다. 이들은 법률에 대한 전문지식을 바탕으로 상부의 질의에 답변하는 것이 임무였지만, 공부를 많이 한 관리나 수령에 비해 전문적 지식이 못 미치기도 했다. 율과 합격자에게는 특별히 이권이 될 만한 것이 없으므로, 이들은 대부분 매우 곤궁했다고 한다.

조선시대에는 과거에 합격하지 못해도 관직을 얻을 수 있는 길이 여러 가지 있었다. 잡과에 해당하는 분야도 과거시험보다는 수준이 떨어지는 시험을 통해 필요한 관리를 충원했다. 그러나 해당 분야에서 출세하려면 역시 과거에 급제해야 했다. 예를 들어 통역관을 총괄하는 관청 사역원의 가장 높은 벼슬은 정3품인데, 이 벼슬은 중국어 급제자가 아니면 임명될 수 없었다.

그리고 의사의 가장 높은 벼슬은 내의원이나 전의감의 정3품 자리인데, 이 자리도 의과에 급제하지 못하면 차지할 수 없었다. 특히 내의원에서 임금을 직접 진찰하는 의사를 내의(內醫)라고 하는데, 이들 가운데 당상관이 되면 어의(御醫)라고 불렀고, 어의 중 가장 책임 있는 의사는 수의(首醫)라고 했다. 내의는 잡과의 의과 급제자만 될 수 있었다.

왕실 건강 돌보던 조선시대 의사


중국어 통역관이 하는 가장 중요한 일은 중국에 가는 조선 사신과 조선에 오는 중국 사신의 통역을 맡는 일이다. 그리고 일본어 통역관은 동래 왜관에서 일본인과 조선인 사이의 통역을 담당했다. 중국어 통역관은 중국과 조선 사이의 무역에도 관여해 상당히 많은 돈을 벌 수 있었다. 연암 박지원의 [허생전]에 나오는 변승업은 서울에서 가장 부자였는데, 그가 바로 중국어 통역관이었다. 중국에 가는 사신 행렬에 통역으로 함께 가는 일은 가장 유능한 역관들이 맡았다. 중국어 통역관이 가장 바라는 일은 바로 중국 사행에 동행하는 것이었다.

중국어나 일본어 통역관은 조선 근해에서 표류하다 육지에 닿은 일본인이나 중국인의 통역을 위해 해당 지역으로 출장을 가기도 했다. 19세기가 되면서 조선 해안에 외국인이 나타나는 일이 잦아졌는데, 이들과 의사소통하는 데에는 당연히 문제가 생겼다. 이때 지방 관청에서 통역관 파견을 요청하는 일도 있었다.

헌종 8년(1842) 2월 25일 중국 배가 난파해 현재 충남 보령시 장고도에 닿았다는 보고가 충청병영으로 올라왔다. 충청병영에서는 서울에 이 사실을 보고하고, 현지에 관원을 파견해 조사했다. 3월 11일에는 서울에서 중국어 통역관 김학면(金學勉)이 내려와 난파선의 중국인들을 조사했다.

난파선이 발견된 지 약 보름이 지나 서울에서 통역관이 와서 조사하고, 4월 2일에는 통역관 김학면이 중국인들을 인솔해 서울로 갔다. 규정에 따라 난파선의 중국인들을 육로로 중국으로 돌려보내기 위해서였다. 김학면은 순조 19년(1819)에 역과에 합격했고, 1832년 중국 사행에 통역관으로 간 기록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보면 오랜 기간 사역원에서 일한 유능한 인물이었음이 틀림없다.

의과에 합격한 의사에 관한 기록은 다른 잡과 합격자보다 훨씬 많이 남아 있다. 왜냐하면 의사는 임금을 비롯해 왕실의 건강을 책임질 뿐 아니라 임금의 명령으로 국가에 중요한 인물의 건강도 돌보기 때문이다. 그리고 왕실 사람의 병을 고쳤을 때 커다란 보상을 받는 일이 많았으므로, 이들에 관한 기록이 많이 남아 있다.

철종 3년(1852)에 의과에 합격한 이장혁(李章爀)은 소아과가 전문이었다. 그는 고종 11년(1874) 2월 순종이 태어날 때 담당 의사였고, 그해 6월 순종이 수두를 앓을 때도 잘 치료했다. 고종은 이장혁에 대해 “이장혁의 의술이 매우 정밀하고 밝았다”고 말할 정도였다. 고종은 이장혁에게 여러 차례 벼슬을 줬는데, 그가 역임한 수령 자리만 해도 여주 목사, 삭녕 군수, 이천 부사, 교하 군수 등이 있고, 정2품의 정헌대부 품계를 주기도 했다.

법공부로는 먹고 살기 어렵다는 푸념도

역과와 의과에 급제한 사람들은 부와 명예를 얻을 수 있는 길이 많았다. 이들에 비하면 율과는 그렇게 큰 이익을 얻기 어려웠던 것으로 보인다. 17세기 말 유희춘은 잡과 시험을 관리하는 시관이었다. 다른 과에 비해 율과를 배우는 인원이 적은 것을 보고 응시자들에게 그 이유를 물었더니 “율학을 공부해서는 먹고 살기가 어렵기 때문”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음양과의 천문학은 달력을 만드는 일이 가장 중요했다. 천문학자들은 청나라가 서양의 천문학 이론을 받아들인 것을 알고, 북경에 가서 이를 배워 와 조선 실정에 맞는 달력을 만들기 위해 매우 애를 썼다. 천문학은 순수한 자연과학 분야 지식을 바탕으로 한 학문인 반면, 지리학은 풍수지리를 말하는 것이고, 명과학은 주로 점치는 것과 관련된 일이었다. 그러므로 음양과 급제자도 부와 명예를 얻기 어려웠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시대 잡과의 네 분야는 21세기 대한민국에서도 여전히 중요하다. 의사와 법률가는 부와 명예를 모두 얻을 수 있어서 사람들이 가장 부러워하는 직업이 됐고, 외국어를 배우기 위해 학생은 물론 사회인들도 엄청난 시간과 돈을 투자하고 있다. 그리고 수학을 잘하지 못하면 좋은 대학에 들어가기가 매우 어렵다.

조선시대와 성격은 다르다고 하지만, 잡과시험의 역학은 현재의 외교부, 의학은 보건복지부, 율학은 법무부 등과 연결시켜볼 수 있다. 조선시대와 달라진 위상을 갖게 된 분야는 음양학이다. 음양과 가운데 천문학은 기상청이라는 국가기관에서 그 전통을 이어간다고 하겠지만, 지리학과 명과학의 전통을 이었다고 볼 수 있는 국가기관은 없다.

다산 정약용은 일찍이 19세기 초 국가의 골격을 새롭게 짜고, 각 부처의 구성을 세밀하게 구상한 [경세유표]라는 책을 저술했다. 다산의 이 국가개혁 구상에는 관상감도 물론 들어 있다. 다산은 관상감에 달력 제작 업무를 담당하는 천문학만 남기고 지리학과 명과학은 폐지해야 한다고 했다. 그는 풍수를 살펴 부모를 장사지내거나 혼인 또는 제사를 위해 날짜를 고르는 것은 모두 올바른 일이 아니므로, 이런 일을 담당하는 지리학이나 명과학은 필요 없다고 말했다.

무덤자리를 고르거나 점을 쳐 날짜를 잡는 일을 맡고 있는 정부 부서를 그대로 둘 필요가 없다는 다산의 생각은 당시로서는 획기적 발상이다. 왜냐하면 풍수지리나 날짜를 잡는 일은 위로는 궁중으로부터, 아래로는 일반 서민까지 모두 필요하다고 굳게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19세기 후반에 물밀 듯이 외세가 밀려오기 전까지 조선은 스스로 체제의 문제를 점검해보려는 생각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 이윤석 - 한국 고전문학 연구자다. 연세대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고, 2016년 연세대 국어국문학과에서 정년 퇴임했다. [홍길동전]과 [춘향전] 같은 고전소설을 연구해서 기존의 잘못을 바로잡았다. [홍길동전] 이본(異本) 30여 종 가운데 원본의 흔적을 찾아내 복원했을 뿐만 아니라 작품 해석 방법을 서술했다. 고전소설과 관련된 저서 30여 권과 논문 80여 편이 있다. 최근에는 [홍길동전의 작자는 허균이 아니다]와 같은 대중서적도 썼다.

202408호 (2024.0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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