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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 정신의 미학(100)] 임진왜란 사수한 동래부사 충렬공(忠烈公) 송상현 

문관으로서 살신성인(殺身成仁) 이루다 

아버지 이어 문과 급제 뒤 동래부사 맡아 신의로 백성들과 혼연일체
“죽을지언정 길 빌려주기 어렵다” 왜적에 맞서… 부산의 정신적 지주


▎충렬사 안락서원 조덕래 사무국장이 사당의 내력을 설명하고 있다. / 사진:충렬사 안락서원 조덕래 사무국장이 사당의 내력을 설명하고 있다.
"공(公)이 부임한 이듬해 왜적이 쳐들어왔는데 동래는 해변이므로 먼저 적을 맞닥뜨렸다. 성이 함락되려 하자 공은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을 알고 조복(朝服, 관원이 조정에 나아갈 때 입는 예복)을 가져오게 하여 갑옷 위에 입고 의자에 걸터앉아 적이 들이닥쳐도 미동도 하지 않았다.” 영의정을 지낸 상촌 신흠이 남긴 천곡(泉谷) 송상현(宋象賢, 1551~1592) 동래부사의 최후 모습이다.

송상현이 세상을 떠나고 63년이 지나 우암 송시열은 후손의 요청으로 천곡의 짧은 생애를 정리한 행장을 짓는다. 급박한 당시 정황은 행장에 더 자세히 나온다. 동래를 넘어 전쟁에 대비하지 못한 조선이 일거에 무너지는 처절함이 행간에 배여 있다. “4월 13일 왜적이 국경을 침범하여 14일 부산을 함락하자 첨사 정발이 순사했다. 15일 동래부성으로 진격해왔다. 처음에 경상병사 이각은 병사를 거느리고 입성하여 함께 지킬 계략을 세웠으나 적세가 매우 성함을 보고 곧 뛰쳐나가려 하는지라 공이 의로써 함께 죽기를 요청하자 이각은 ‘나는 스스로의 진영이 따로 있으며 이곳은 나의 관할 지역이긴 하나 성을 지키는 것은 공의 책임이오’ 하고는 노약자 30명을 내어주고 마침내 도망쳤다. 공은 개연히 군중 앞에 맹세하고 성에 올랐다. 그가 방어에 나서면서 총탄이 쏟아졌지만 의기는 평안했다. 왜적은 드디어 성을 넘어 들어왔다. 공은 사태가 이미 어찌할 수 없음을 알고 갑옷 위에 조복을 갖춰 입었다. 얼마 뒤 적이 들이닥쳤는데 그 가운데 평조익(平調益)이란자가 있었다. 그는 성곽 옆을 가리키며 눈짓으로 피할 것을 권했으나 공은 응하지 않았다.”

무슨 까닭일까. 평조익은 일찍이 통신사 평조신을 따라 조선을 드나들며 송상현을 만난 적이 있었다. 그때 송상현이 호의를 베풀어 평조익은 언젠가 보답할 것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 평조익이 동래성에서 곤경에 빠진 송상현을 조우한 것이다. 평조익은 순간 송상현이 자신의 호의를 깨닫지 못한 줄 알고 손으로 옷을 잡아당겼으나 그는 이미 마음을 정한 뒤였다. 송상현은 의자에서 내려와 임금이 있는 북쪽을 향해 네 번 절했다. 그리고는 아버지 앞으로 마지막 글을 남겼다. “외로운 성은 달무리처럼 적에게 포위됐는데 진을 친 우리 군은 도와줄 기척이 없으니. 군신(君臣)의 의(義)는 무겁고 부자(父子)의 은정(恩情)은 가볍습니다.”

‘죽음의 땅’ 동래 부사로 밀려난 문신


송상현은 다시 자리에 앉았다. 곧이어 그는 왜적의 공격을 받고 쓰러졌다. 이때 나이 42세. 시호는 충렬(忠烈)이다.

4월 30일 부산시 부산진구 송상현광장을 찾았다. 광장은 지하철 부전역과 양정역 사이 중앙대로를 따라 조성돼 있다. 서울의 광화문광장처럼 부산의 중심에 들어선 랜드마크다. 광화문광장에 세종대왕과 이순신 장군 동상이 세워져 있듯 이곳에는 송상현 동래부사의 동상이 빌딩 앞에 우뚝 서 있었다. 동래부사는 동래부를 이끈 지금의 부산시장쯤 된다.

광장 안내판에 내력이 적혀 있다. 부산시가 2010년 광장의 명칭과 설계를 공모했다고 한다. 송상현은 절체절명의 부산을 지키려 한 발짝도 물러서지 않은 채 죽음을 무릅쓴 수호신처럼 남아 있다. 그래서일까. 장군 출신인 박정희 전 대통령은 문신 관복 차림에 양손으로 홀을 받쳐 든 모습의 동상 아래 ‘충렬공송상현선생상’이란 글자를 직접 썼다.

동상을 두른 돌에 새긴 건립문은 민족문학작가회의 명예회장을 지낸 김정한 소설가가 지었다. 건립 연대는 1978년. 김정한은 “임진왜란 당시 오만무쌍한 왜적 무리와의 치열한 서전에서 조국을 지키기 위해 탁월한 판단력과 결사적인 투쟁으로 불멸의 공을 세우고 순사한 민족의 위대한 등불”이라고 표현했다.

작가는 이어 당시의 역사적 배경을 정리한다. “조선왕조는 초기 빈번한 외적의 위협에 대비하여 자주국방을 꾸준히 꾀해 왔다. 그러나 선조 대에 이르러 국사를 맡은 사람들이 부질없이 당파싸움에 휘말려 국방을 소홀히 하고 일신의 안일만 노릴 때 조정의 여러 요직을 역임하면서 공명정대 멸사봉공의 숭고한 신념을 고수하던 송공(宋公)은 드디어 간악한 무리의 미움을 받아 외침의 위협으로 죽음의 땅이라 일컫던 동래에 부사로 밀려나게 됐다.”

정성과 신의로 백성 다스리고 직무 수행


▎동래보국충정도. 붉은 조복을 입은 송상현 동래부사가 전투 현장을 지켜보는 그림으로, 충렬사 기념관에 전시돼 있다. / 사진:부산시 충렬사 관리사무소
행장에는 송상현이 10여 세에 경사(經史)에 통달했다고 나온다. 그는 15세에 초시인 승보시 장원을 거쳐 1576년(선조 9) 문과에 발탁되며 승문원 정자에 임명됐다. 이어 박사와 승정원 주서 겸 춘추관 기사관을 거쳐 경성판관이 됐다. 송상현은 이후 사헌부로 들어와 여러 번 지평·집의를 거쳐 호(戶)·예(禮)·공(工) 정랑이 됐다. 1584년(선조 17) 질정관으로 중국 연경에 갔으며 이듬해에도 중국을 다녀왔다. 그는 이후 사헌부 지평에서 은계도 찰방으로 좌천됐다가 돌아와 지평이 되고 백천군수로 나간다. 마지막엔 정3품 통정대부로 승진되며 동래부사로 부임했다.

그 무렵 조정은 두 갈래로 갈라졌다. 그는 벼슬길에 올라 곧았으므로 미움을 사 내외직을 반복했다. 조정은 그를 승진시킨 뒤 문무를 겸비했다며 왜적이 침입할 수 있는 험지로 배치했다. 천곡(그가 나고 자란 정읍의 마을 이름) 송상현은 동래에 부임해 오직 정성과 신의로 백성을 다스리고 직무를 수행했다. 아전과 백성들은 그런 수령을 부모처럼 모셨다.

우암은 스승인 사계 김장생과 천곡의 그 시기 일화를 기록했다. 사계는 당시 정산(定山, 청양군 정산면) 현감으로 있었는데 천곡이 시를 보내, 왜적이 이르면 반드시 죽을 뜻을 보였다. 사계는 그 기개를 흠모해 현아(縣衙) 벽에 새기고 천곡의 사수(死守)를 조금도 의심치 않았다는 것이다. 천곡과 사계는 그렇게 허물없는 사이였다고 우암은 신도비에 썼다.

그뿐 아니다. 천곡은 사계의 아들이자 우암의 선배인 신독재 김집과도 특별한 사이였다. 신독재는 젊어서 일찍이 천곡에게 가르침을 받았고 높이 받드는 정성이 늙도록 쇠하지 않았다고 한다. 천곡은 이렇게 기호학파의 종장(宗匠)들과 남다른 인연이 있었다.

송상현광장과 동상을 둘러본 뒤 신위가 모셔진 동래구 충렬사(忠烈祠)를 찾았다. 충렬사 안락서원 조덕래 사무국장의 안내를 받았다. 일대가 안락동이다. 사당은 송상현이 세상을 떠나고 13년 뒤인 1605년 동래읍성 남문 안에 처음 세워졌다. 19년 뒤 인조는 ‘충렬’이란 사액과 함께 제문에 이렇게 적었다. “교활한 오랑캐가 틈을 타 침공함에 바람에 띠(茅)가 쓰러지듯 하였으나 영남 70고을에 의사(義士) 하나 없었도다. 경(卿)은 수령이 되어 그 뜻은 열렬하였으나 뭇사람은 한번 싸우지도 않아 성은 텅 비었도다. 쓸쓸한 동헌에는 아무도 없고 위는 하늘이요, 밑은 땅뿐인데 띠를 드리우고 길게 두 손을 모으고, 엄연하기가 산과 같았다. 시퍼런 칼날이 숲을 이루어도 모기나 개미처럼 보았도다. 구슬은 부서져도 혼은 멸하지 않도다.”

마침내 밀어닥치는 적의 칼에 쓰러지다


▎충렬사 의열각. 임진왜란 당시 순절한 금섬·애향과 무명의 두 의녀를 모신 사당이다. / 사진:송의호
1651년(효종 2) 동래부사 윤문거는 사당이 보잘것 없어 지역 유림과 함께 안락동 지금의 자리로 이설하고 안락서원(安樂書院)으로 조성했다. 안락서원은 이후 대원군이 서원을 철폐할 때도 훼철되지 않았다. 1978년 부산시의 성역화사업으로 안락서원 대신 사당이 중심인 지금의 충렬사로 거듭났다.

조덕래 사무국장과 함께 먼저 가파른 돌계단을 올라 충렬사 본전으로 들어섰다. 분향하고 예를 표했다. 충렬공 신위는 부산첨사 정발, 다대첨사 윤흥신과 함께 가운데 더 높이 세워져 있었다. “이곳엔 선열 93위가 함께 모셔져 있습니다. 모두 임진왜란 당시 부산지역에서 순절하신 분들이지요. 부산의 공직자들이 새해가 되면 가장 먼저 들르는 곳이기도 합니다.” 사당 안에 부산시 신규임용자 등 조화가 보였다. 시민의 발길도 이어졌다. 당시 송상현 부사가 항전하다가 최후를 맞은 동헌 자리는 충렬사에서 서쪽으로 1㎞쯤 떨어져 있다. 지금 송공단(宋公壇)이 세워진 곳이다.

계단을 내려오니 충렬공이 남겼다는 ‘戰死易假道難(전사이가도난)’ 어록이 돌에 새겨져 있다. 다산 정약용은 [비어고(備禦考)]에 이렇게 적었다. “왜적은 군사를 전장에 모으고, 먼저 나무판자에 글을 써서 성 밖에 세우고 이르기를 ‘싸울 테면 싸우고 싸우지 않으려면 우리에게 길을 빌려 달라’고 했다. 송상현 또한 나무판자에 글을 써서 왜적에게 던졌다. 거기에는 ‘죽을지언정 길을 빌려주기는 어렵다’고 했다.” 왜적은 드디어 동래성을 세 겹으로 둘러쌌다고 한다.

본전 아래 한쪽에 의열각(義烈閣)이 있다. 당시 부산을 지키기 위해 싸우다 순국한 의녀(義女)를 기리는 사당이다. 동래부사 송상현과 부산첨사 정발을 따라 순절한 금섬·애향과 기왓장으로 왜적과 싸웠다는 무명의 두 의녀가 주인공이다.

충렬사에 모셔진 93위 선열과 의녀는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파죽지세 왜적에 당시 동래성은 속수무책이었다. 병사는 적을 막지 못하고, 백성은 어찌할 바를 모를 때 문관 동래부사는 후방이 시간을 벌도록 단호히 동래성 사수(死守)에 나선다. 노블레스 오블리주(지도층의 의무)의 실천이다. 그가 일찍이 백성을 아꼈던 수령이라 남은 군졸과 의로운 백성들도 흔연히 그를 따랐다. 그러나 중과부적이었다. 왜적과 최후까지 싸운 동래성은 불행히도 처절함 그 자체였다. 일대는 피로 물들었다. 송상현도 마침내 밀어닥치는 적의 칼에 쓰러졌다. 2시간에 걸친 항전은 목 베인 수급이 3000여 명, 포로가 500여 명이나 되었다. 패전의 상처는 너무나 컸다. 그런 중에 적장 평의지(平義智)는 송상현 부사의 충절에 감동한 것일까. 적장은 송상현을 해친 부하를 오히려 처형하고 부사의 시신을 찾아 동문 밖에 장사 지냈다고 한다.

소설가 김정한은 “뒤이어 임란을 승리로 이끈 의병의 봉기가 요원의 불처럼 삼천리 방방곡곡에 일어났으니 그것이 어찌 충렬공의 영웅적인 최후와 무관하겠느냐”고 강조한다.

목숨 던져 백성들과 함께 현장 지킨 일선 지도자


▎임진왜란 당시 동래성의 전투 상황을 묘사한 동래부순절도. 육군사관학교 육군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 사진:육군박물관
한편으로 비판적인 시각도 있다. [선조실록] 32권(1592년 11월 25일)에는 선조와 전 경상감사 김수의 문답이 나온다. “정발과 송상현은 과연 죽었는가?” 김수가 아뢴다. “정발과 송상현이 혹자는 죽지 않았다고 하지만 죽은 게 틀림없습니다. 잘못 전해진 말 가운데 심지어는 송상현이 적장이 됐다고 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포위를 당했을 때 홍윤관이 성밖으로 나가기를 권했으나 송상현은 말하기를 ‘지금성을 빠져나가도 어디로 간단 말이냐’ 하고는 남문 위에 팔짱을 끼고 앉아 있으니 적이 들어와 죽이고, 바로 그의 목을 대마도로 전송했다고 합니다.”

이와 관련 이순신역사연구회는 [이순신과 임진왜란2]에서 “송상현이 죽을 각오로 성을 지켰고 끝내 적에게 죽임을 당했다는 이유로 그는 오늘날까지 충신으로 칭송돼 왔다”며 “장수가 죽음을 무릅쓰고 전장을 지키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비판한다. 연구회는 “그러나 장수에게는 죽음으로 최후를 맞는 것보다 더 중요한 책임과 사명이 있다”며 “그것은 나라의 안위가 위태로움에 처해지지 않도록 사전에 대비해야 한다는 것”이라고 덧붙인다. 일본도에 기왓장으로 대항할 게 아니라 미리 화약무기를 준비하고 훈련시켰다면 백성들의 전공은 더 빛날 수 있었다고 지적한다. 동래부사는 당시 문신을 넘어 언제 터질지 모를 왜란을 앞둔 최일선 경영자였다는 것이다.

하지만 인조 시기 박동량이 쓴 [기재잡기(寄齋雜記)]에는 “송상현은 동래부사에 임명된 뒤 전쟁 기구를 수리하고 군사를 훈련시키고 일찍이 성 밖 4면에 참호를 판 뒤 방책을 설치했다”는 등 대비 이야기가 나온다.

어쨌든 송상현은 쳐들어온 적을 맞아 목숨을 던지며 백성들과 함께 현장을 지킨 일선 지도자였다. 높은 뜻을 지닌 선비는 스스로 몸을 죽여 인(仁)을 이룬다는 살신성인(殺身成仁)이 이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박스기사] 현존 한국 最古 전쟁기록화에 남은 송상현의 충의

육사 육군박물관 소장… 부산으로 반환 요청 중

보물 392호 동래부순절도(東萊府殉節圖). 1592년 4월 15일 임진왜란 서막을 알리는 동래성 전투의 항전 상황이 그려진 한 폭의 기록화다. 여기엔 동래부사 송상현이 동래성으로 쳐들어온 왜적을 맞아 군사들과 성 위에서 대치하고, 왼쪽 맨 위엔 경상좌병사 이각이 군졸들과 함께 말을 타고 도주하는 모습이 섬세한 필치로 그려져 있다.

이 그림은 1709년(숙종 35) 처음 그려졌으나 낡고 훼손되자 1760년(영조36) 동래부 화가 변박(卞璞)이 다시 그려 전한다. 임란을 상기시키고 충절을 일깨우는 유물이다. 동래부순절도는 부산진순절도와 함께 현존하는 우리나라 전쟁 기록화 중 가장 오랜 작품이기도 하다.

이 그림은 본래 충렬사 안락서원이 200여 년간 소장해 왔다. 안락서원은 충렬사의 봄·가을 제향 때 순절도를 제단에 내걸어 임진왜란의 처절함을 부산시민들에게 인식시키는 역사교육 자료로 활용했다. 그러나 이 그림은 1951년 한국전쟁 시기 육군사관학교 육군박물관으로 옮겨졌다. 부산광역시 충렬사 관리사무소 황선희 주무관은 “전하는 관련 자료를 보면 안전한 보관이 당시 이관한 이유였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안락서원과 동래 유림은 2021년 펴낸 [충렬사지(忠烈祠志)]에서 부산의 유물이 강제 이관됐다며 부산으로 반환할 것을 주장했다. 이 그림은 지금도 육군박물관에 있다.

- 송의호 대구한의대 교수 yeeho1219@naver.com

202407호 (2024.0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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