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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경률의 노래하는 한국사(28)] 서경 천도 노래한 천재 시인의 죽음 

고려판 아마데우스… 정지상을 벤 김부식의 시기심 

이별시 ‘송인(送人)’ 지은 고려 최고의 절창(絕唱)
서경 천도, 독자 연호 황제국 추구하다 제거 당해


▎고려 시중 김부식의 표준영정과 그가 편찬한 [삼국사기]. / 사진:연합뉴스
"버들은 천 가닥 푸르고(柳色千絲綠) / 복숭아꽃은 만 점 붉도다(桃花萬點紅)”

고려 시중 김부식(1075~1151)이 연못가 정자에 앉아 봄날의 정취를 노래하고 있었다. 버들가지의 푸르른 그림자는 잔물결 위로 하늘하늘 일렁이고, 누각 아래 피어난 복숭아꽃은 붉디붉은 미색으로 뜨락을 물들인다.

김부식은 1136년 2월 이른바 ‘묘청의 난’을 진압하고 1년여 만에 서경(西京, 평양)을 평정한 공으로 문하시중에 올랐다. ‘일인지하 만인지상’이 된 것이다. 새로 맞이한 봄날이 얼마나 찬란하고 아름다웠을까.

“쯧쯧, 버들이 천 가닥인지 만 점인지 그대가 어찌 아는가? 세어 보았는가?”

문득 공중에서 말소리가 들려 고개를 들어보니 정지상(?~1135)의 귀신이 창백한 얼굴로 혀를 차고 있었다. 귀신은 다짜고짜 김부식의 뺨을 갈기며 시는 그렇게 짓는 것이 아니라고 꾸짖었다. 정지상은 시구를 한 글자씩 수정하고는 멋들어지게 낭송했다.

“버들은 가닥가닥 푸르고(柳色絲絲綠) / 복숭아꽃은 점점이 붉도다(桃花點點紅)”

김부식은 당황했지만, 티내지 않으려고 애썼다. 시중 김부식과 학사 정지상은 당시 고려 문단의 쌍두마차이자 앙숙이었던 모양이다. 귀신에게 뺨 맞고 시까지 조롱당하자 시중은 부들부들 떨었다. 정지상이 묘청의 반역에 연루됐다는 혐의로 재판 없이 살해된 건 김부식의 작품이었다. 천재 시인은 죽었지만, 김부식의 자격지심은 아직도 가시지 않았다. 그의 시기심이 정지상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다는 세간의 의혹도 귀신처럼 따라붙었다.

서경 세력과 역사 무대에 강렬하게 등장


▎묘청의 난 세력권과 관군의 토벌 진로. 김부식은 1136년 2월 이른바 ‘묘청의 난’을 진압하고 1년여 만에 서경(西京, 평양)을 평정한 공으로 문하시중에 올랐다. / 사진:나무위키 캡처
이 일화는 고려 중기 문장가 이규보의 [백운소설(白雲小說)]에 담긴 이야기다. 김부식과 정지상의 라이벌 관계는 고려 문단의 오랜 화두였다. 역사의 승자는 김부식이었지만, 문장에서만큼은 정지상을 능가하지 못했다.

정지상은 서경 사람이다. [고려사]에 열전이 전하지 않아 생애를 자세히 알 순 없지만, 본인이 쓴 ‘사사물모씨표(謝賜物母氏表)’에 몇 가지 사정을 언급하고 있다. 이 글은 훗날 인종이 그의 어머니에게 물건을 하사하자 자식으로서 감사를 표한 것이다. 그는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의 슬하에서 컸다. 친척들도 모두 흩어졌다고 하니 가난하고 외로운 환경에서 자랐을 것이다. 하지만 소년은 천재적인 시재(詩才)를 발휘하며 주목을 받았다.

“누가 흰 붓을 가지고(何人將白筆) / 을(乙)자를 강물에 썼는고(乙字寫江波)”

다섯 살 무렵 강 위에 뜬 해오라기를 보고 정지상이 지은 시다. 그야말로 신동이 출현한 것이다. 덕분에 ‘학상(學祥)’이라는 학교에 들어갈 기회를 얻었다. 소년은 학교와 산사(山寺)를 오가며 학업에 매진했다. 문학뿐만 아니라 역학(易學), 노장사상, 불교 등을 폭넓게 공부해 박학다식한 면모를 갖췄다. 가장 빼어난 것은 역시 시였다.

“비 갠 긴 둑에 풀빛 고운데(雨歇長堤草色多) / 남포에서 임 보내니 슬픈 노래 동하네(送君南浦動悲歌) / 대동강 물이야 언제나 마르려나(大同江水何時盡) / 이별 눈물 해마다 푸른 물결에 보태지니(別淚年年添錄波)”

그가 서경에서 공부할 때 지은 것으로 알려진 ‘송인(送人)’이다. 이 한시는 고려 시대를 대표하는 이별 노래로 평가받고 있다. 이별의 눈물이 보태져 대동강 물이 마르지 않을 것이라는 표현은 참신하고 아름답다. 비, 대동강 물, 푸른 물결이 자연스럽게 눈물과 연결돼 이별의 슬픔을 고조시킨다. 시가 널리 퍼져나가며 정지상의 명성은 나날이 높아졌다.

관직으로 나아갈 길도 열렸다. 예종 7년(1112) 그는 진사시에서 장원을 차지했다. 2년 후에는 문과에도 급제했다. 예종 대에 관리 생활을 시작한 정지상은 실무직과 지방관을 두루 맡으며 경력을 쌓은 것으로 보인다. 그가 조정에서 두각을 나타낸 것은 인종 5년(1127)이었다. 정지상은 묘청, 백수한 등 서경 세력과 함께 역사 무대에 강렬하게 등장했다.

인종 재위기(1122~1146)는 안팎으로 거센 풍파가 몰아친 시기다. 1126년 2월 젊은 국왕은 측근 지녹연, 김찬, 안보린 등을 시켜 외척 이자겸을 치려고 했다. 이자겸은 선왕 예종과 인종에게 2대에 걸쳐 딸들을 시집보내 무소불위의 권력을 움켜쥐었다. 14세의 어린 나이에 즉위한 인종은 장인이자 외조부인 이자겸에게 가로막혀 기를 펴지 못했다. 왕은 재위 4년 만에 측근들을 앞세워 친위 병력을 모으고 외척을 제거하려 했다.

이 거사는 그러나 실패로 끝났다. 고려 최강의 무장 척준경이 이자겸의 편에 서서 반격에 나섰기 때문이다. 척준경은 예종 때 여진 정벌전에서 혁혁한 무공을 세운 전쟁 영웅이었다. 인종과 측근들의 친위 병력은 전설의 무장 앞에 움찔해 무력해지고 말았다. 척준경은 소수 병력만으로 궁궐을 장악하는 괴력을 발휘했다. 이 과정에서 화공(火攻)을 쓰는 바람에 궁궐이 거의 다 불탔고, 임금을 보위하던 신하들은 잔인하게 도륙당했다.

인종은 장인 이자겸의 집에 유폐됐고 나랏일은 이자겸과 척준경이 농단했다. 여진족이 세운 금나라에 사대하는 일도 백관이 반대했으나, 두 사람의 뜻에 따라 찬성으로 돌아섰다. 금나라가 요나라를 멸할 만큼 강대해졌으니 형세가 섬기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이에 고려는 금나라에 신하를 칭하는 표문을 바쳤고 오랜 세월 깔보던 여진을 황제국으로 받들게 됐다.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고 민심이 극도로 나빠졌다.

이자겸은 심지어 인종을 독살하고 왕위를 찬탈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인종도 가만있지 않았다. 내의원 최사전을 은밀히 보내 척준경을 회유한 것이다. 그해 5월 척준경은 국왕의 밀명을 받고 이자겸을 권좌에서 끌어내렸다. 이자겸이 유배지에서 죽자 이번에는 척준경이 발호했다. 하지만 그는 무장 출신이라 정치력이 떨어지고 세력이 두텁지 못했다. 1127년 3월 척준경을 탄핵하는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좌정언 정지상의 상소였다.

무장 척준경 탄핵해 인종의 총신으로


▎묘청의 난 상상도. 1135년 1월 묘청, 조광, 유참 등이 국왕의 거처를 서경으로 옮길 것을 요구하며 군사를 일으켰다. / 사진:KBS [역사저널 그날] 캡처
“작년 2월 척준경은 궁궐을 범하며 폐하가 계신 곳에 화살을 쏘았고 불까지 질렀습니다. 또 좌우에서 폐하를 모시는 자들을 모두 잡아 죽였습니다. 예로부터 난신 중에 이와 같은 자는 드물었습니다. (이자겸을 제거한) 5월의 사건은 한때의 공로지만, (폐하를 위태롭게 한) 2월의 사건은 만세의 죄입니다. 어찌 한때의 공으로 만세의 죄를 덮을 수 있겠습니까.”([고려사절요] 인종 5년 3월)

과연 문장가는 문장가였다. 이자겸 제거는 한때의 공로지만, 인종에 대한 불경은 만세의 죄라고 했다. 정지상의 탄핵은 조정 안팎의 공론이 돼 일등공신 척준경을 무도한 죄인으로 만들었다. 고려 최강의 무장이었던 권신을 멀리 암타도로 유배 보내는데 일조한 것이다. 국왕 입장에서는 반드시 제거해야 하지만 은인이라 처치 곤란했던 인물을 명분에 어긋나지 않게 정리했다. 이를 계기로 정지상은 천재 시인에서 인종의 총신으로 거듭났다.

그런데 정지상은 혼자가 아니었다. 서경 세력과 함께 등장한 것이다. 1127년 척준경 등을 유배 보낼 무렵 인종은 서경에 행차했다. 승려 묘청과 일관 백수한의 건의를 받아 상안전(常安殿)에서 관정도량(灌頂道場, 이마에 물을 뿌리는 불교 의식)을 열고 대동강에 용선(龍船)을 띄워 뱃놀이를 즐겼다. 또 정지상에게 명해 [서경(書經)] ‘무일(無逸)’ 편을 강론하게 했으며 서경 유신(儒臣) 25명을 불러 시를 짓도록 하고 술과 음식을 하사했다. 이윽고 젊은 국왕은 야심 찬 포부를 드러냈다. 서경에서 유신(維新) 조서를 반포한 것이다.

“일관의 건의에 따라 서도(西都)에 행차하여 지난날의 잘못을 깊이 뉘우치고 유신(維新)의 가르침이 있기를 바라며 중앙과 지방에 포고하니 백성들이 모두 듣고 알게 하라.”([고려사절요] 인종 5년 3월)

인종은 서경을 서도(西都), 곧 서쪽 도읍이라 칭하고 이곳에서 새로운 정치를 펼치겠다는 의지를 밝혔다. 이어서 15가지 지침이 나오는데 대체로 백성들의 실생활을 돌보겠다는 내용이다. 유신은 국왕의 정치적 승부수였다. 정변으로 궁궐이 불타고 금나라에 사대함으로써 왕실의 권위가 땅에 떨어졌다. 임금에겐 왕권 강화의 기반이 절실히 필요했다. 서경 세력은 좋은 파트너였다. 묘청, 백수한, 정지상 등은 인종이 원하는 게 뭔지 알고 있었다.

“묘청은 서경의 승려였다. 일관 백수한이 서경의 분사(分司)에 있으면서 묘청을 스승이라 불렀다. 두 사람은 음양가의 비술에 의탁하여 뭇사람을 현혹했다. 정지상 또한 서경 사람이라 그들의 말을 깊이 믿었다.”([고려사] 묘청 열전)

서경 천도의 기치를 들어 올리다


▎한민족역사문화공원에 있는 고려 승려 묘청의 동상. 묘청 일파는 임금에게 칭제건원(稱帝建元)을 주청했다. / 사진:나무위키 캡처
서경은 옛 고구려의 왕도이자 이를 계승한 고려의 정신적 수도였다. 하지만 개경의 문벌과 외척, 관리와 유학자들이 실권을 쥐면서 서경 사람들은 소외감을 느껴야 했다. 고려의 뿌리라는 자부심이 큰 만큼 개경 중심의 유교 정치에 대한 반발도 거셌다. 그들은 음양의 묘리가 깃든 풍수도참(風水圖讖)을 내세워 서경의 부흥을 꿈꿨다. 인종 6년(1128)에는 드디어 서경 천도의 기치를 들어 올렸다. 국왕의 측근이 된 정지상이 앞장섰다.

“상경(上京, 개경)은 기업이 이미 쇠퇴하였고 궁궐도 모두 타서 남은 것이 없습니다. 서경에 왕기(王氣, 왕의 기운)가 있으니 마땅히 임금께서 옮겨 가시어 수도로 삼아야 합니다.”([고려사절요] 인종 6년 8월)

서경 세력이 정국을 주도하자 조정 대신과 왕의 근신들도 대세에 따라 호응했다. “묘청은 성인(聖人)이고 백수한은 계승자이니 그들에게 나랏일을 묻고 청하는 바를 수용하면 유신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연명(聯名)으로 상소했다. 묘청 등은 호응을 등에 업고 서경 천도의 원대한 의의를 임금에게 아뢰었다.

“신 등이 서경의 임원역(林原驛) 땅을 살펴보니 음양가에서 말하는 ‘큰 꽃의 형세(大花勢)’였습니다. 만약 이곳에 궁궐을 세우고 임금께서 옮겨 가신다면 천하를 병합할 수 있고, 금나라가 폐백을 바치며 항복할 것이고, 36국이 모두 신첩(臣妾)이 될 것입니다.”([고려사절요] 인종 6년 8월)

서경에 천하의 중심이 될 길지(吉地)가 있으니 궁궐을 세우고 왕도를 옮기면 금나라는 물론 사방의 나라가 복속할 것이라는 예언이다. 인종은 이를 받아들였다. 1129년에 서경 대화궁이 완성됐고, 1131년에는 외성인 임원궁성이 모습을 드러냈다. 팔성당도 설치했다. 백두산 등 8대 명산에 선인, 천녀 등의 이름을 붙이고 부처, 보살 등을 실체로 삼아 제사를 지내게 한 것이다. 풍수도참과 산악숭배, 불교와 도교를 아우르는 민간신앙의 종합판이었다.

정지상은 팔성당 제문에서 “드디어 평양(平壤)의 중앙에 이 대화(大花)의 세(勢)를 헤아려 새로이 궁궐을 짓고 삼가 음양에 순종했다”라고 감격했다. 하지만 유교 정치를 신봉하는 관리와 유학자들은 국가 통치 체제를 흔든다며 묘청 일파를 공격했다. 그들이 요망한 술법으로 사람들을 현혹하고 있다는 비판도 쏟아져나왔다.

1132년 1월 개경 정궁 만월대 재건 공사가 시작됐는데 묘청은 궁궐터에 병가압승(兵家壓勝)의 기운을 불어넣는다며 태일옥장보법(太一玉帳步法)이라는 술법을 부렸다. 사방에 장졸들을 배치하고 하얀 삼베 노끈을 잡아당기는 의식이었다. 이 술법은 도선 국사가 강정화에게 전하고, 강정화가 묘청에게 전하고, 묘청이 일관 백수한에게 전한 것이라고 했다. 그 목적은 전쟁에서 이기고 적을 복속시키는 데 있었다.

천도 추진하자 개경 세력이 격렬 저항


▎1916년에 촬영된 서경 대화궁터. 고려 인종은 1129년 서경에 대화궁을 지었다. / 사진:국립중앙박물관
금나라와의 전쟁을 염두에 둔 것이다. 묘청 일파는 임금에게 칭제건원(稱帝建元)을 주청했다. 스스로 황제가 돼 독자 연호를 쓰자는 것이었다. 더는 금나라에 사대하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이렇게 되면 금나라와의 무력 충돌이 불가피해진다. 우려의 목소리가 높았지만 개의치 않았다. 서경 세력은 오히려 금나라 정벌을 주장했다.

묘청 일파의 비전은 차츰 현실성을 잃고 허황된 이상으로 흘러갔다. 허점을 보이자 평장사 김부식, 참지정사 임원애 등 유력한 대신들이 거 보란 듯이 성토했다. 김부식은 유학자 관료 집단의 우두머리이고, 임원애는 임금의 장인이었다. 개경의 문벌과 외척을 대표하는 실세들이 반격에 나서며 1133년부터 분위기가 바뀌기 시작했다.

어느 나라, 어느 시대나 수도를 옮기는 것은 지배층의 해체와 재구성으로 이어진다. 서경 천도는 개경 지배층의 뿌리를 뽑겠다는 뜻이었다. 개경 세력은 격렬하게 저항했다. 유교 정치 이념에 반하는 사상과 종교, 술법으로 민심을 어지럽힌다고 묘청 일파를 공격했다. 칭제건원과 금나라 정벌은 나라를 망치는 자충수라고 규탄했다. 요승 묘청의 목을 베어 화의 싹을 잘라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서경 세력’ 대 ‘개경 세력’의 대립과 갈등은 내전으로 치달았다. 1135년 1월 서경에서 묘청의 난이 터졌다. 묘청, 조광, 유참 등이 국왕의 거처를 서경으로 옮길 것을 요구하며 군사를 일으킨 것이다. 국호를 대위(大爲), 연호를 천개(天開)라 했으며 군대는 천견충의(天遣忠義)라고 이름했다. 그런데 개경에 있던 백수한, 정지상과는 함께 모의하지 않았던 것 같다. 백수한은 친구에게 정변 소식을 듣고 오히려 임금에게 알렸다. 정지상 또한 국왕의 측근으로서 자리를 지킨 것으로 보인다.

인종은 김부식에게 부월(鈇鉞)을 하사하고 토벌군 원수로 삼았다. 국왕은 그에게 반역과 관계없는 자는 죽이지 말라고 당부했다. 하지만 김부식은 정지상, 백수한, 김안 등이 함께 반역을 도모했을 것이라며 그들을 먼저 제거하자고 재상들을 설득했다. 재상들이 동의하자 정지상 등 3인을 불러들이고 무사들을 시켜 궁궐 문밖에서 베었다. 처형이 아닌 암살이었다. 임금에게는 사후에 보고했다. 사전에 허락을 구했다면 용납하지 않았을 것이다.

천재의 목숨을 위협하는 시기심

당시 사람들은 정지상의 죽음을 석연치 않게 여겼다. [고려사절요]는 김부식과 정지상이 문단에서 명성을 나란히 했는데 김부식이 불평이 쌓여서 반역을 핑계로 정지상을 죽였다고 했다. 정사에서 이런 설을 소개할 정도면 신빙성이 있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김부식의 불평은 무엇이었을까?

앞서 소개한 [백운소설]의 일화에 힌트가 있다. 김부식이 지은 노래를 정지상의 귀신이 꾸짖고 고쳐주었다. 고려 사람들은 정지상의 시재(詩才)가 김부식보다 윗길이라고 보았다. 개경 문단을 대표하던 김부식은 서경 촌뜨기에게 뒤지는 것을 참기 어려웠을지도 모른다. 영화 [아마데우스]에서 살리에리는 모차르트의 천재성에 열등감을 느끼고 괴로워하다가 경쟁자를 독살한다. 김부식도 비슷한 심정을 느끼지 않았을까?

어느 시대나 천재의 목숨을 위협하는 것은 시기심이다. 정지상으로선 억울한 죽음이었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는 떳떳하게 죽었을 것이다. 어쨌든 서경 천도 운동을 주도한 것은 사실이었으니까. 그것이 진정으로 국왕을 위하고 고려의 자존을 되찾는 길이라고 믿었으니까. 정지상은 고려 최고의 절창(絕唱)답게 죽기 전에 노래를 불렀을 것 같다. 자신이 지은 고향 노래 ‘서도(西都)’를 자랑스레 부르고 눈을 감았을 것이다.

“도성 거리 봄바람에 보슬비 지나가니(紫陌春風細雨過) / 가벼운 티끌조차 일지 않고 버들가지 휘늘어졌네(輕塵不動柳絲斜) / 푸른 창 붉은 문에 생황 노래 목이 메니(綠窓朱戶笙歌咽) / 이 모두가 이원의 제자 집이라네(盡是梨園弟子家)”

※ 권경률 - 역사 칼럼니스트이자 작가. 서강대에서 역사를 공부했다. 새로운 해석과 기발한 상상력으로 한국사에 숨결을 불어넣는다. 유튜브·페이스북에 ‘역사채널권경률’을 열어 독자들과 역사 하는 재미를 나누고 있다. [모함의 나라](2022), [조선을 새롭게 하라](2017), [사랑은 어떻게 역사를 움직이는가](2023) 등을 썼다.

202407호 (2024.0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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