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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경률의 노래하는 한국사(29)] 박정희 대통령 신청곡, ‘동백 아가씨’가 금지된 까닭은? 

이미자, 산업화·도시화에 멍든 순정을 노래하다 

‘김종필-오히라 메모’에 한일회담 반대시위 격화되자 계엄령 선포
이미자의 엘레지에 담긴 인내와 절제의 시간, 안으로 삼키는 슬픔


▎영화 [동백 아가씨] 주제가 앨범 표지. 이미자가 노래한 ‘동백 아가씨’는 뒷면 첫 번째 트랙에 실렸다. / 사진:한국대중가요연구소
"헤일 수 없이 수많은 밤을 / 내 가슴 도려내는 아픔에 겨워 / 얼마나 울었던가 동백 아가씨 / 그리움에 지쳐서 울다 지쳐서 / 꽃잎은 빨갛게 멍이 들었소”

가수 이미자의 ‘동백 아가씨’(한산도 작사, 백영호 작곡)는 1964년 동명의 영화 주제가 음반에 실려 세상에 첫선을 보였다. 이 음반의 타이틀곡은 배우 최무룡이 부른 ‘단둘이 가봤으면’이었다. 그런데 막상 음반이 발매되자 앨범 뒷면에 수록된 ‘동백 아가씨’가 히트곡으로 떠올랐다. 방송마다 이 노래가 흘러나왔고, 음악감상실에서는 ‘떼창’이 터져 나왔다. ‘동백 아가씨’의 인기가 치솟으며 음반은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갔다.

가수 이미자는 1959년 19세의 나이에 ‘열아홉 순정’(반야월 작사, 나화랑 작곡)으로 데뷔했다. ‘동백 아가씨’를 부르기 전까지는 가창력을 인정받기는 했지만, 톱스타는 아니었다. 이 노래도 원래는 유명 가수가 부르기로 했는데 레코드사에서 개런티를 아끼기 위해 바꿨다고 한다. 1964년 여름 이미자는 스카라극장 근처 목욕탕 건물 2층에서 만삭의 몸으로 녹음에 임했다. 찜통더위를 식히려고 얼음물에 발을 담그면서 영화 주제가를 불렀다.

그렇게 취입한 노래로 이미자는 거센 신드롬을 일으켰다. 영화 주제가 음반은 품절 사태를 빚었다. 지방 업자들이 여관에서 진을 치며 음반 한 장이라도 더 구하려고 아우성을 쳤다. 극장주들은 이미자를 ‘모셔가려고’ 난리였다. 2000원에 불과하던 극장 쇼 출연료는 20배 넘게 뛰어올랐다. 귀하신 몸이 된 것이다. 슈퍼스타의 탄생이었다. ‘동백 아가씨’ 신드롬은 가요계 판도마저 뒤바꿨다.

대박 내고 금지곡 된 ‘동백 아가씨’


▎박정희 대통령과 악수하는 이미자. 파월 장병 위문공연을 마치고 돌아와 청와대를 예방했다. / 사진:국가기록원
1960년대 들어 한국 가요계는 미국 팝 음악의 영향을 받은 ‘스탠더드 팝’이 강세를 나타냈다. 한명숙이 부른 ‘노란 샤쓰의 사나이’(1961)를 필두로 최희준의 ‘우리 애인은 올드미쓰’(1961), 현미의 ‘밤안개’(1962), 패티김의 ‘초우’(1962) 등이 인기를 끌었다. 미8군 무대 출신의 가수, 창작자, 연주자들이 가요계에 진출하며 스탠더드 팝의 시대를 연 것이다.

반면 1930년대부터 가요계를 주름잡던 ‘트로트’는 쇠퇴하고 있었다. 트로트의 근간을 이룬 정서는 비탄(悲嘆)이다. 슬픔과 탄식을 노래로 표현한 것이다. 일제강점기와 6·25전쟁 등 민족사적 시련을 겪으며 트로트는 한국인의 공감을 얻었다. 그러나 1960년대에 접어들자 반응이 시들해졌다. 천편일률적인 신파 감성에 질린 것이다.

‘동백 아가씨’는 식어가던 트로트의 인기에 다시 불을 지폈다. 질려버린 신파 감성도 이미자가 부르면 가슴 뭉클한 호소력이 생긴다. 노래에 깃든 극적인 이야기도 흥미를 끌었다. 이 곡을 주제가로 쓴 영화 [동백 아가씨]는 1963년 동아방송에서 인기리에 방영된 라디오 연속극을 리메이크한 것이다. 섬마을 처녀가 서울에서 온 청년과 사랑을 나누고 미혼모가 돼 인고의 시간을 보내며 애타는 이별과 재회를 한다는 이야기다. 미혼모는 트로트의 신파 감성을 극대화하며 새롭게 떠오르는 소재였다.

1960년대 산업화는 시골 청년들을 서울과 같은 대도시로 불러 모았다. 사회 변동기는 야심만만한 젊은이들에게 부와 지위를 획득할 기회를 주었다. 서울에서 출세한 청년들은 조건 좋은 상대를 만나 결혼했고, 시골에서 정을 나눈 처녀들은 속절없이 버림받았다. 홀로 남은 여인들은 기약 없는 기다림 속에서 인고의 시간을 견뎌내야 했다. 산업화와 도시화에 멍든 순정이었다.

이미자의 ‘동백 아가씨’는 이런 시대 정서를 관통하며 대박을 터뜨렸다. 음반이 1년 만에 100만 장 넘게 팔렸다. 당시로선 경이로운 판매량이었다. 음반 차트에서도 무려 35주 동안 1위를 차지했다. 그러나 ‘동백 아가씨’ 신드롬은 얼마 후 예상치 못한 역풍을 맞았다. 1965년 12월 한국방송윤리위원회에서 이 노래에 방송금지 처분을 내렸다. 사유는 ‘왜색가요’라는 것이었다.

왜색(倭色)은 일본풍의 문화를 낮잡아 이르는 말이다. 한국 트로트는 일본 엔카(演歌)와 영향을 주고받으며 일제강점기에 형성됐다. 굳이 따지자면 트로트라는 장르 자체가 왜색과 무관치 않다. 만약 왜색이라는 이유로 ‘동백 아가씨’를 금지해야 한다면, 수십 년 동안 쏟아져나온 트로트 가요도 모두 금지하는 것이 맞다. 그런데 왜 ‘동백 아가씨’를 콕 찍어 방송금지 처분을 내린 것일까?

세간에 여러 가지 설이 나돌았다. ‘동백 아가씨’의 성공을 시기한 경쟁 레코드사에서 인맥을 동원해 음해했다는 설도 있고, 일본 문화의 범람을 우려한 사회단체가 관계 기관에 촉구했다는 설도 있다. 여기서 눈여겨볼 점은 이 처분이 1965년 12월에 나왔다는 것이다. 한·일 수교에 관한 기본 조약 및 청구권 협정이 타결과 조인을 거쳐 양국 의회의 비준을 마친 직후였다. 박정희 정부가 격렬한 반발을 뚫고 한일회담을 강행해 어렵게 성사한 일이었다. 이 시점에 왜색가요 방송금지 처분이 나온 건 어떤 의미일까?

한일회담은 1952년 2월부터 1965년 6월까지 13년 동안 7차례에 걸쳐 개최됐다. 애초 한·일 양국이 수교에 앞장선 것은 아니었다. 한국은 경제 원조가 간절했고, 일본은 해외 투자를 원했지만 서로 불신과 증오가 쌓여 있어 국교를 맺기가 쉽지 않았다. 한·일 국교 정상화를 밀어붙인 쪽은 오히려 미국이었다. 동아시아에서 소련과 중국의 팽창을 저지하려면 전략적으로 한·미·일 안보 협력이 필수였기 때문이다. 한국과 일본은 어쩔 수 없이 회담에 나섰다. 그러나 한일회담은 ‘청구권’과 ‘평화선’ 문제로 난항을 거듭했다.

한일회담의 뇌관, 청구권과 평화선


▎1962년 11월 12일 김종필 중앙정보부장이 오히라 마사요시 일본 외상과 비밀회담을 갖고 청구권에 대해 합의했다. / 사진:연합뉴스
1952년 이승만 정부가 작성한 대일(對日)청구권 요강을 보면 일제강점기에 조선은행에서 일본으로 반출한 지금(地金) 249톤과 지은(地銀) 67톤, 조선총독부가 한국인에게 갚아야 할 체신국의 저금·연금·보험금, 일본인이 한국의 각 은행으로부터 인출해간 저금액, 그리고 징병과 징용을 당한 한국인의 급료·수당·보상금 등이 포함돼 있었다. 이는 법적 근거를 가진 최소한의 청구 내역으로 20억 달러 수준이었다. 단, 일본의 침략으로 한국인이 당한 신체적·정신적 고통과 물질적 피해에 대한 보상은 들어가지 않았다.

평화선은 이승만 대통령이 부산 피란 시절인 1952년 1월 18일에 선포한 해양주권선이다. 한반도 연안에서 60해리까지 대한민국의 영해라는 것이었다. 독도 또한 평화선 안에 들어왔다. 일본이 반발하고 미국도 만류했지만 개의치 않았다. 이 대통령은 오히려 실력행사를 서슴지 않았다. 평화선을 넘어와 조업하는 일본 어선들을 나포하라고 명했다. 1965년까지 300척이 넘는 일본 선박이 억류됐다. 독도는 의용수비대를 투입해 지키게 했다. 독도에 대한 실효적 지배를 본격화한 것이다.

일본은 청구권을 인정하지 않았으며, 평화선도 철폐하라고 주장했다. 양국의 이견이 크고 감정대립이 심해 회담은 휴회와 재개를 반복했다. 1953년 10월에는 일본 수석대표 구보타 간이치로가 “일본의 통치는 한국인에게 은혜를 베푼 것”이라고 망언하는 바람에 회담이 결렬됐다. 일본의 술책이었다. 이승만 대통령의 반공 포로 석방으로 한·미 관계가 삐걱대자 더 유리할 때 하려고 회담을 고의로 지연시킨 것이다(동북아역사재단, [한일회담 일본외교문서 상세목록집]). 한일회담은 한동안 중단됐다.

밀린 숙제는 4·19혁명과 5·16군사정변을 거쳐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에게 넘어갔다. 시국을 안정시키고 경제 원조를 계속 받으려면 반드시 미국의 지지를 얻어야 했다. 미국은 한·일 국교 정상화를 조건으로 내걸었다. 박 의장으로서는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이었다. 1961년 10월 한일회담이 다시 열렸고, 11월에는 일본을 방문한 박정희 의장이 이케다 하야토 총리를 만나 조속한 시일 내에 국교를 정상화하기로 합의했다.

이어진 회담에서 한국은 청구권을 놓고 8억 달러를 요구했다. 국가재건최고회의는 중장기 경제개발계획을 수립하고 있었는데, 그 재원으로 쓸 요량이었다. 그러나 일본은 청구권 금액 7000만 달러에 독립축하금 명목으로 추가지원을 할 수 있다는 입장이었다. 회담이 공전하자 미국 국무부가 개입했다. 미국 국무부가 1962년 7월 주한미국대사관에 보낸 훈령이다.

“한국 정부에 청구권의 명목에 구애받지 말고 일본의 경제 원조를 받아들이라고 전하고, 만약 응하지 않는다면 미국의 원조를 다시 고려하겠다고 압력을 가하라.”(강준만, [한국 현대사 산책] 1960년 대 2권)

‘김종필-오히라 메모’에 시위 격화


▎1962년 한일협정 당시 김종필 중앙정보부장과 오히라 일본외상의 메모. 국내에서 민심이 들끓자 박정희 대통령은 ‘김종필-오히라 메모’를 공개했다. / 사진:연합뉴스
미국의 압력이 통했던 것일까? 1962년 11월 12일 김종필 중앙정보부장이 오히라 마사요시 일본 외상과 비밀회담을 갖고 청구권에 대해 합의했다. 일본이 한국에 무상공여 3억 달러, 재정차관 2억 달러, 상업차관 1억 달러를 제공하기로 한 것이다. 김종필과 오히라는 회담 후 메모를 작성했다. 이른바 ‘김종필-오히라 메모’였다. 그런데 액수와 방식만 적고 자금 명목은 밝히지 않았다. 한국에서는 청구권 자금으로, 일본에서는 독립축하금으로 각각 해석할 여지를 남긴 것이다.

경제개발 재원을 확보하기 위해 국가재건최고회의는 회담의 또 다른 걸림돌인 평화선을 일본에 양보하려고 했다. 회담 타결을 위해 어쩔 수 없다는 것이었다. 평화선 철폐가 거론되자 국내 여론은 들끓었다. 해양주권을 스스로 포기하는 것이라며 분노했다. 회담은 교착상태에 빠졌고, 대표들은 역적으로 몰렸다.

1963년 10월 제5대 대통령선거에서 박정희 의장은 윤보선 후보를 15만 표차(역대 대선 최소 표차)로 꺾고 대통령이 됐다. 박 대통령은 다시 한일회담의 고삐를 죄었다. 정부는 1964년 3월 회담을 재개하며 ‘3월 타결, 4월 조인, 5월 비준’ 방침을 천명했다. 대학생들을 중심으로 격렬한 반대 시위가 벌어졌다. 야당, 사회단체, 종교계 등은 ‘굴욕외교반대 범 국민투쟁위원회’를 발족하고 힘을 모았다. 3월 22일 서울 장충단공원 집회에는 70만 명의 인파가 모여들었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민심에 놀란 박 대통령은 일본에 머물며 회담을 이끌던 김종필 공화당 의장을 불러들이고 ‘김종필-오히라 메모’를 공개했다. 자금 명목을 밝히지 않은 금액은 사실상 청구권을 포기하는 것으로 비쳤다. 평화선 철폐와 함께 분통 터지는 합의였다. 데모가 폭발하며 전국으로 번져나갔다. 정부는 부랴부랴 한일회담을 중단했지만, 반대 운동의 열기를 잠재울 수 없었다. 6월 3일에는 전국에서 10만여 명이 시위를 벌였다. 서울에서는 시위대 수만 명이 광화문 일대를 점거하고 청와대로 향했다.

청와대는 긴박했다. 정일권 국무총리는 박정희 대통령에게 헬기를 타고 피신할 것을 권유했다. 그날 오후 주한미국대사와 미8군사령관이 급히 박정희 대통령을 만났다. 4·19혁명을 떠올렸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혁명은 일어나지 않았다. 오히려 밤 9시 40분을 기해 서울 일원에 비상계엄이 선포됐다. 6월 3일 하루 동안 시위대 1200여 명이 체포됐다. 7월 29일 계엄이 해제될 때까지 학생 168명, 민간인 173명, 언론인 7명 등 모두 348명이 구속됐다(강준만, [한국 현대사 산책] 1960년대 2권).

박정희 대통령으로선 정권 붕괴 위기를 가까스로 넘긴 셈이다. 실제로 그날 대통령이 시위 군중을 보고 사임하려 했다는 주장도 있다. 야당도 정권이 무너질 것으로 여기고 윤보선 전 대통령을 중심으로 각료들을 물색했다고 한다. 한·일 국교 정상화를 매국이라 규정하고 총궐기를 촉구하던 강경파 정치인들은 막상 계엄이 선포되자 재빨리 몸을 숨겼다. 반면 민주당 대변인 김대중은 정권이 계엄을 선포할지 모르니 무조건 반대하기보다 대안을 준비하자고 설득하다가 야권에서 ‘사쿠라’로 몰리기도 했다.

계엄령 선포와 한일협정 조인


▎1964년 6월 3일 밤 9시 40분을 기해 서울 일원에 계엄령이 선포됐다. 계엄군이 휴교령이 내려진 서울대 문리대 교문 앞을 막아서는 모습. / 사진:한국근현대사사전
한일회담은 1964년 12월에 재개됐다. 시위가 이어졌지만, 박정희 정부는 밀어붙였다. 1965년 6월 22일 한일기본조약과 4개 협정이 조인됐다. 청구권 협정은 ‘김종필-오히라 메모’와 거의 차이가 없었다. 정부는 무상공여 3억 달러와 비슷한 규모의 차관에 대일청구권을 소진했다. 이전 정부가 20억 달러 이상 요구한 것과 비교하면 아쉬움이 컸다. 한국의 60해리 평화선은 결국 철폐됐고 대신 일본 측 안인 12해리 전관수역을 설정했다. 이에 시위가 격화되자 박정희 대통령은 위수령을 발동하고 또다시 군대를 투입했다.

‘동백 아가씨’ 방송금지 처분은 1965년 12월에 나왔다. 한·일 양국이 비준서를 교환하고 수교에 마침표를 찍을 무렵이었다. 정부는 한일회담에 대한 반감을 털어버리고 국정을 추스르는 계기가 필요했을 것이다. ‘굴욕 외교’ 프레임에 갇히면 정부는 힘들어진다. 여론을 바꾸고 국면을 전환해야 했다.

‘동백 아가씨’는 전시효과를 노린 상징적인 희생양이었는지도 모른다. 당대 최고의 인기 가요에 왜색이라는 낙인을 찍으면서 정부를 향한 비난의 화살을 돌리려 했다는 추론이 가능하다. 국익을 위해 어쩔 수 없이 한·일 수교를 강행했지만, 박정희 정부는 민족적이라는 것을 국민에게 보여주고자 한 것이다.

‘동백 아가씨’는 방송에 이어 1968년 음반 제작 금지를 당했다. 그러나 공연 요청은 줄기차게 이어졌다. 이미자는 베트남전 국군장병 위문공연을 네 번 갔다. 무대에서 ‘동백 아가씨’를 부르면 파월 장병들이 그리움에 사무쳐 흐느껴 울었다. 이미자는 1970년대 후쿠다 다케오 일본 총리가 방한했을 때 청와대 만찬에 초청받아 이 노래를 불렀다. 박정희 대통령의 신청곡이었다.

한·일 수교는 아이러니하게도 이미자에게 또 다른 기회를 안겨주었다. 1966년 그녀는 일본에 진출해 음반을 내고 활동했다. ‘동백 아가씨’는 일본에서도 좋은 반응을 얻었다. 귀국 후에는 ‘섬마을 선생님’(이경재 작사, 박춘석 작곡)이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다. 이 노래는 1967년 문화공보부 작곡상과 가창상을 수상하며 ‘동백 아가씨’, ‘기러기 아빠’(김중희 작사, 박춘석 작곡)와 함께 이미자의 대표곡이 됐다.

엘레지, 목 놓아 울지 않고 삼키는…


▎가수 이미자가 지난 2019년 2월 21일 오후 서울 중구 웨스틴조선호텔에서 열린 데뷔 60주년 기념 음반 및 신곡 발표회에서 질문을 듣고 있다. / 사진:연합뉴스
그런데 공교롭게도 세 곡 모두 금지 처분을 받았다. ‘동백 아가씨’는 왜색, ‘섬마을 선생님’은 표절 혐의, ‘기러기 아빠’는 비탄조라는 게 사유였다. 설득력이 없다. 차라리 노래 곡조가 조국 근대화와 진취적 기상을 강조하던 박정희 시대의 기조와 맞지 않아 배척당했을 수는 있겠다. 이 노래들은 시대가 바뀌어 1987년에 해금됐다.

이미자는 ‘엘레지의 여왕’으로 트로트의 새로운 전성기를 열었다. 그녀의 엘레지에는 마력이 있다. 목 놓아 울지 않고 안으로 삼키는 슬픔이기에 더욱 사무친다. 이미자의 노래 인생에도 그런 슬픔이 어른거린다. 대가수라고 꽃길만 걸을 수는 없다. 남들은 모르는 인내와 절제의 시간이 여왕의 노래에 흐르고 있다.

“아득히 머나먼 길을 따라 / 뒤돌아 보며는 외로운 길 / 비를 맞으며 험한 길 헤쳐서 / 지금 나 여기 있네”(이미자, ‘노래는 나의 인생’)

※ 권경률 - 역사 칼럼니스트이자 작가. 서강대에서 역사를 공부했다. 새로운 해석과 기발한 상상력으로 한국사에 숨결을 불어넣는다. 유튜브·페이스북에 ‘역사채널권경률’을 열어 독자들과 역사 하는 재미를 나누고 있다. [모함의 나라](2022), [조선을 새롭게 하라](2017), [사랑은 어떻게 역사를 움직이는가](2023) 등을 썼다.

202408호 (2024.0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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