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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열한 주류전쟁 - 8조원대 술시장 절대 강자는 없다 

와인·수입맥주 소비 늘고 위스키·소주는 줄어…웰빙 열풍·글로벌화 영향 

이윤찬·박미소 이코노미스트 기자 chan4877@joongang.co.kr
사진:오상민 기자

국내 주류시장의 경쟁 구도는 뻔했다. 맥주시장에선 오비맥주·하이트맥주, 소주시장에선 참이슬(하이트진로)·처음처럼(롯데주류BG)이 양강 체제를 구축했다. 철옹성 같던 이런 구도에 균열 조짐이 보이고 있다. 웰빙 열풍과 글로벌화의 진전, 기호 변화로 와인·사케 등이 이들의 틈새를 파고 들고 있다. 가격은 비싸지만 품질 좋고 맛이 다양한 수입 맥주가 오비맥주·하이트맥주를 위협하고 있다. FTA로 가격경쟁력을 갖춘 와인은 소주와 막걸리 시장을 잠식할 태세다. 국내 막걸리 시장은 명품 사케의 공습에도 시달리고 있다. 물고 물리는 주류전쟁의 이면을 살펴봤다. 아울러 ‘소폭(맥주+소주) 문화’가 바꿔놓은 술 시장 판도를 짚었다.

19세기 초, 독일은 ‘하면발효법(낮은 온도에서 보리를 숙성하는 방법)’으로 맥주를 만드는 데 성공했다. 세계 최초였다. 짙은 색의 맥주였는데, 세상 사람들은 이를 ‘라거(Larger)’라고 불렀다. 라거맥주 개발을 가장 부러워한 나라는 체코였다. 17세기 빌라호라 전투(용어설명)에서 게르만족(族)에게 패한 체코는 독일을 라이벌로 생각했다. 게다가 체코인은 ‘자국산(産) 맥주의 맛과 품질이 세계 최고’라고 자부했다.

체코 주류업자들은 ‘제2의 라거맥주’ 개발계획을 세웠다. 맥주만큼은 독일에 밀릴 수 없다는 의지에서였다. 이들은 1년 여 개발 끝에 새로운 라거맥주 개발에 성공했다. 황금 빛깔의 독특한 맥주였다. 이 맥주는 독일산 라거를 단숨에 넘어섰다. 지금도 세계맥주시장의 90%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황금색 라거맥주에는 민족감정뿐만 아니라 시대상황이 들어 있다. 19세기 무렵 황금은 권력과 부의 상징이었다. 체코 주류업자들이 황금색 맥주를 개발한 것도, 노동자들이 이 맥주에 열광한 것도 이런 이유다.


술은 시대를 담고, 사람들은 술을 통해 시대를 읽는다. 경기침체기에는 일반적으로 가격이 저렴한 소주가 인기를 끈다. 당대의 권력자가 ‘주류시장 판도’를 바꿔놓을 때도 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평소 막걸리를 즐겨 마셨다. 그러나 ‘박정희 술’로 불린 건 위스키 ‘시바스리갈’이었다. 1979년 10·26 사태 당시 박 전 대통령이 시바스리갈을 마시고 있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이 술은 권력의 상징으로 떠올랐다. 김대중(DJ) 전 대통령이 즐겨 마셨다는 ‘복분자주’도 그렇다. DJ정부 시절 복분자주는 ‘한국의 와인’이라는 찬사를 받으며 큰 인기를 끌었다.

요즘 국내 주류시장을 관통하는 키워드는 ‘웰빙’이다. 건강을 해치지 않는 선에서 술을 마시는 이들이 늘고 있다. 당연히 도수가 낮거나 건강에 좋은 술이 인기다. 건강주라는 막걸리와 와인의 인기가 식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저도수 소주(알코올 도수 19도 이하)의 출고량도 크게 증가했다.

황금색 라거맥주에 담긴 비밀

국세청 자료에 따르면 저도수 소주의 출고량은 2010년 1만7150kL에서 지난해 3만4413kL로 약 2배 늘었다. 맥주의 지난해 출고량은 200만kL를 넘어섰다. 2010년 출고량은 187만8872kL였다. 웰빙 열풍에 가장 타격을 입은 술은 위스키다. 통계청에 따르면 위스키의 출고량은 지난해 3218kL로 2009년(6632kL)에 비해 절반 이상 줄었다. 주류업계 관계자는 “저도수 소주와 맥주가 늘어난 것은 순한 술을 찾는 트렌드 때문”이라며 “폭탄주의 중심이 양폭(양주+맥주)에서 소폭(소주+맥주)으로 바뀐 것도 하나의 이유”라고 말했다.


술 판도를 바꾸는 변수는 또 있다. 글로벌화의 진전이다. 지난해까지만 해도 국내 맥주시장은 오비맥주(이하 오비)·하이트진로(이하 하이트)의 양강 체제였다. 최근에는 수입맥주가 경쟁에 뛰어들고 있다. 이마트가 올 1월 1일부터 2월 13일까지 주류판매현황을 조사한 결과, 수입맥주 판매량은 전년 같은 기간보다 56% 가량 늘었다. 수입맥주가 인기를 끄는 이유는 어학연수·해외여행 등 해외체류경험이 있는 사람들이 늘어나서다. 해외에서 접한 맥주 브랜드를 국내에서 찾는 이들이 증가한 것이다.

와인·수입맥주 국내시장 빠르게 잠식


‘와인이 제2의 전성기를 누릴 것’이라는 전망 또한 글로벌화와 무관하지 않다. 와인은 2004년 한-칠레 FTA(자유무엽협정) 체결 이후 인기를 끌었다. 다양하고 저렴한 와인이 국내에 대거 들어와서다. 관세청에 따르면 와인 수입액은 2000년 2000만 달러에서 지난해 1억3500만 달러로 7배나 증가했다. 여기에 한-미 FTA가 발효되면 미국산 와인에 대한 15% 관세가 철폐돼 와인수입량이 더욱 늘어날 전망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한국의 전통술 막걸리는 일본에서 날개 돋친 듯 팔리고, 일본의 명품 사케는 한국시장을 다시 두드리고 있다. 지난해 막걸리 수출액(관세청 자료)은 사상 처음으로 5000만 달러를 넘었다. 이 중 일본으로 수출된 막걸리는 전체의 92%인 4842만 달러에 이른다. 사케 수입액(1435만 달러)보다 훨씬 많다. 막걸리가 사케를 압도하자 이번엔 일본이 반격에 나서고 있다. 일본의 아오모리(靑森)현은 올해 2월 최고 품질을 자랑하는 ‘아오모리 사케’ ‘코쿠류 하치주하치고 사케’를 국내에 선보였다. 하시모토 하치노혜 주류 대표는 “이번에 한국에 출시한 사케는 큰 인기를 끌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지금 주류시장에서는 혼전이 계속되고 있다. 영원한 강자도, 영원한 약자도 없어 보인다. 변수도 많다. 술 트렌드에는 시대상황이 반영된다. 소비자의 기호는 수시로 바뀌고 있다. 1980년대 초반까지 권력의 상징처럼 여겨졌던 시바스리갈은 지금 ‘추억의 술’로 전락했다. DJ정부 시절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던 복분자주의 인기도 예년 같지 않다.

오비와 하이트의 15년 전쟁은 주류시장의 혼전 양상을 잘 보여준다. 1990년대 초까지 오비는 맥주시장의 70%를 차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오비는 1991년 구미공장 페놀유출 사건으로 타격을 입은 지 4년 만인 1995년 하이트에 1위를 내줬다. 하이트의 아성도 영원하지 않았다. 한국주류산업협회 자료를 보면 지난해 1월~10월 오비의 출고량(수출 포함)은 7794만500상자로, 하이트(7725만7400상자)를 뛰어넘었다. 오비의 출고량이 하이트를 앞지른 것은 15년 만이다.

1127호 (2012.0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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