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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린 개혁’으로 부자·사대부 반발 무마 

[김준태의 왕의 결단⑫ 효종의 대동법과 군포제] 조용히 실무 추진하며 반대파 설득 작업도 병행해 무리 없이 진행 

김준태



“마음을 다스리는 것이 근본이고 구체적인 정사를 처리하는 것은 지엽적인 일이지만, 상황이 이리도 급박한데 어떻게 임금의 마음이 바르지 않다고 하면서 팔짱만 낀 채 앉아 있을 수가 있는가. 나는 부덕하여 하루아침에 마음을 바로잡는 성과를 기대하기 어렵다. 따라서 우선 정사를 통해 잘못된 일들을 해결해 가고자 하니, 경들은 사무에 관한 폐단을 이야기하라.”(효종4.6.20)

임진왜란의 상흔을 채 치유하기도 전에 병자호란을 맞은 조선은 극심한 혼란과 민생파탄을 겪게 됐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각종 재난이 이어지면서 백성들의 삶은 더욱 어려워졌다. 조선의 17대 임금으로 즉위한 효종은 이러한 시대적 위기상황을 해결하고자 심한다. 그런데 당시의 정책 담론을 주도했던 산림(山林)은 왕의 ‘도덕적 수신’을 최우선의 과제로 제시했다.

“백성의 어려움을 돌봐주고 싶어하지 않은 군주가 없었지만, 백성들이 실질적인 혜택을 받지 못하게 된 것은 군주의 욕심과 사사로운 마음 때문입니다.”(김집『신독재유고』). “재난을 구제하기 위한 방법은 임금의 마음에서 찾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이 없습니다.”(이경여, 효종4.6.10). 백성들을 구제하는 길은 제도보다 먼저 임금의 마음가짐에 달린 것이며, 임금이 마음을 올바르게 한다면 백성들에게도 자연히 실질적 혜택을 줄 수 있다는 것이 이들의 생각이었다. 물론 지극히 옳은 이야기다. 하지만 당장 수많은 백성이 고통에 신음하고 있는 상황에서 구체적인 대책은 마련하지않고 이런 원칙론만 이야기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서두에서 인용한 글은 이러한 신하들의 태도에 답답함을 느낀 효종이 격정을 토로한 것이다.

이상보다는 현실 중시

하여 효종은 김육(金堉)을 정승으로 발탁해 개혁의 책임을 맡겼다.김육은 “많은 사람이 서책에 실려 있는 것을 주워 모아서는 뜻을 성실히 하고 마음을 바루면 천하와 국가가 잘 다스려질 것이다’라고 입으로만 말한다. 그러면서 실천적인 일을 하기에 여념이 없는 사람들을 비웃는다…(중략)…나는 용도를 절약하여 백성을 사랑하고 부역을 줄여 세금을 적게 거두고자 한다. 헛되이 이상만을 추구하며 형식적인 것을 숭상하지는 않을 것이다”(『잠곡유고』)는 그의 말에서도 볼 수 있듯이, 민생 안정을 최우선시한 개혁주의자였다.

효종과 김육은 특히 대동법에 주목했다. 대동법은 특산물 대신 쌀을 공물(貢物)로 바치도록 한 제도이다. 그러면 나라에서는 그 쌀을 가지고 필요한 특산물을 직접 구입했다. 대동법은 공물의 부과 기준을 호(戶:가구)에서 전결(田結:토지 면적)로 전환했다. 이는 일반 백성들의 조세 부담 경감과 균등한 세금 부과라는 효과와 세금 부담이 늘어난 양반 지주층의 반발을 가져왔다.

인조 때 장유(張維)가“차라리 소민(小民:일반 백성)의 마음을 잃을지언정 사부(士夫:양반)의 마음을 잃을 수는 없다”, 신흠(申欽)이 “백성들이 원하는 것이라해도 지배층이 원하지 않는 정책이니 대동법에 대해 재고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해 대동법 시행이 유야무야 된 바 있었는데, 효종 대에 와서 대동법 시행 문제가 다시 본격적으로 거론되자 또 같은 반응이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이에 김육은 “이 법의 시행을 부호(富豪)들이 좋아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나라에서 법을 시행할 때는 마땅히 백성들의 바람을 따라야 합니다. 부호들의 반발을 꺼려서 백성들에게 편리한 법을 시행하지 않아서야 되겠습니까”(효종0.11.5)라며 대동법의 시행을 강력히 주장했다. 마침내 효종 2년 8월 24일 충청도 지역에서 대동법이 실시되고, 효종 9년에는 전라도 연해(沿海) 27개 군현에서 실시되는 등 차츰 확대됐다.

아울러 효종은 양반 사대부들의 반발을 불러올 수 있는 정책을 또 하나 시행했다. 양반에게도 군포(軍布)를 부과한 것이다. 조선은 양인(良人:천민 이외의 모든 사람) 장정(壯丁:16~60세) 남자에게 병역의 의무를 부과한다. 그렇지만 해당자 전원이 군 복무를 하는 것은 아니고, 일정 인원이 현역복무자인 ‘정군(正軍)’이 되면, 나머지는‘보인(保人)’이 되어 현역복무를 면제 받는 대신 정군들의 소요 경비를 담당했다. 이 보인들에게 받았던 것이 ‘군포’이다.

군포는 장정 1인당 한 해에 베 2필을 내게 했는데, 17세기 들어 장정수가 급감(전쟁,기근으로 인한 유랑민)한데 반해, 국방력 확충 작업 등 재정수요는 급증하면서 문제가 발생했다. 중앙 조정은 군비 재원 확보를 위해서 고을 별로 군포의 할당량을정해놓고 미달할 경우 강제 징수하도록 했다. 그러다 보니 수령들은 백성들에게 독촉할 수밖에 없었는데, 부족한 군포 수량을 채우기 위해 이웃에게 대신 부과하고, 해당연령이 되지 않은 어린 아이나(황구첨정) 죽은 사람에게까지 군포를 거두는 일(백골징포)이 벌어졌다(고을 수령이나 아전들이 자신들의 사욕을 채우기 위해 군포장부를 조작하여 부과하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이로 인해 백성들의 원성이 높아지자, 효종은 부족한 비용을 충당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제껏 면제되었던 양반들에게 군포를 징수하도록 결정한 것이다.

그러자 여러 신하들이 반발했다. “우리나라가 유지되는 것은 사대부의 힘입니다. 지금 하루아침에 갑자기 일찍이 없었던 일을 만들어 서민들과 똑같이 군포를 징수한다면 그 원망 또한 크지 않겠습니까?”라는 영의정 심지원의 언급은 이러한 정서를 대변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효종은 “원망과 고통으로 따져 말한다면 군포로 인해 도망가고 죽은 백성들의 그것만 하겠는가?”라며 받아들이지 않았다(효종10.2.13).

백성의 부담 줄여

이상의 대동법과 군포제도 개혁을 통해 효종은 백성들의 부담을 상당 부분 경감시켜 줄 수 있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주목할 것이 효종의 방식이다. 앞서 말했듯이 대동법과 군포 문제는 양반 지배층의 저항을 불러올 수 있는 사안이었다. 하지만 상대적으로 큰 충돌 없이 개혁 작업을 진행할 수 있었던 것은 효종의 노력이 결실을 거둔 것이다. 효종은 전면에 나서서 적극적으로 개혁을 밀어붙이는 모습 보이지는 않았다. 대동법 추진을 담당했던 김육에게 효종이 가장 많이 보인 반응은 ‘기다려보라’, ‘조정의 논의가 더 필요하다’였고, 아무런 대답조차 하지 않는 경우도 많았다. 반대 상소들이 올라오면 모두 경청하고, 때로는 그것을 이유로 개혁 작업을 지연시키기도 했다.

하지만 내부적으로는 실무 작업들을 조용하게 진행시켜서 일이 빈틈없이 이루어질 수 있는 기반을 닦아놓았다.시범 실시 지역에 암행어사를 파견하여 법의 시행 상황을 계속 점검했으며(효종3.9.16 외 다수) 개혁 작업을 담당한 신하들이 반대파들로부터 공격을 받을 때에는 굳건히 지켜주었다. 새 법의 위반자들을 엄하게 처벌하도록 조처했고, 새 법 실시에 따른 문제점과 보완사항에 대한 토론을 계속 진행했다.

송시열(宋時烈)과 송준길(宋浚吉)등 당시 조정에 막대한 영향력을 끼치고 있는 산림 대표들을 설득하여 지지를 얻는 일도 잊지 않았다. 효종이 외형적으로 개혁 법안에 적극적인 모습을 보이지 않았던 것은 일방적으로 어느 한 편을 편들지 않는 태도를 나타냄으로써 개혁으로 인해 초래될 수 있는 갈등을 원활하게 조율하기 위한 선택으로 볼 수 있다. 덕분에 대동법과 군포문제는 별다른 무리 없이 진행될 수 있었다.

1153호 (2012.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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