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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관광=서울’ 공식 깬다 

외국인 전용 게스트하우스, 다국어 표기 메뉴판 마련…드라마 촬영지가 새로운 명소 되기도 

허정연





8월 28일 오후 5시, 경북 경주 첨성대에 무지개가 걸렸다. 체코에서 온 카트리나(28)씨가 우산 너머로 손을 내민다. 그의 하얀 손위로 햇살이 내려앉는다. 아침부터 강약을 달리하며 경주시내를 골고루 적시던 비가 드디어 그친 것이다. 카트리나가 빨간 우산을 야무지게 말아 등에 맨 배낭에 쏙 넣는다. “비가 또 올까요? 한국에 태풍이 온다는 이야기는들었는데 경주 날씨 정보를 찾을 방법을알아야 말이죠.”

경주·부산·안동 많이 찾아


카트리나는 28일 오전, 대학 동기인 야콥(31)씨와 함께 경북 경주를 찾았다. 이들이 한국에서 참석한 세미나는 3일 일정이었지만 둘은 사비를 들여 일주일 더 한국에 머물기로 했다. 하지만 이들의 주요 여행지는 서울이 아닌 경주와 제주도다. 서울은 인천공항을 이용할 때 잠시 머물었고 일주일의 대부분은 지방을 둘러볼 예정이다.

“서울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곳이 경복궁이에요. 북악산과 어우러진 고궁이 정말 멋있었어요. 제가 감탄하자 한국인가이드가 경주에 가면 좋아할 것 같다고 말해줬어요. 서울도 좋지만 도시보다는 ‘가장 한국적인 것’을 먼저 보고 싶었거든요. 그래서 인터넷으로 검색해 부랴부랴 경주로 내려왔죠.”‘한국 관광=서울’로 여겨지던 외국인관광객의 발걸음이 점차 지방 도시까지 이어지고 있다. 한국문화관광연구원이 외국인 관광객 1만2000여명을 대상으로 한 조사결과에 따르면 지난해 한국을 찾은 외국인 관광객의 약 80%는 서울을 다녀갔다. 비교적 적은 수치이긴 하지만 이들은 서울 외에도 경기지역을 비롯해 경상도, 강원도, 제주도 등 다양한 권역을 방문한 것으로 나타났다. 그중에서도 경상도 지역의 부산과 경주, 남해 등지가 외국인이 많이 찾는 지방 여행지로 손꼽힌다.

문화관광연구원이 올해 발표한 외래관광객실태조사에 따르면 부산을 방문한 관광객 비율은 2009년 75.4%에서 2011년 73%로 소폭 감소했다. 반면 경주는 동년 대비 18.5%에서 20%로 다소 늘었다. 거제·남해 지역은 2009년 5.4%에서 8%로 늘어 상대적으로 높은 성장률을 보였다. 경상도 지역을 방문하는 아시아 국가 외국인들의 비율이 평균 10%대인 반면 미주, 유럽 국가 외국인의 약 30%가 경상도를 찾았다. 한국관광공사측은 “아시아 국가 관광객이 주로 쇼핑을 위해 한국을 방문하는 데 반해 미주나 유럽지역 관광객은 자연감상과 문화유산을 볼 목적으로 한국을 찾은 비율이 높기 때문인 것으로 분석된다”고 설명했다.

이런 추세와 함께 외국인들이 찾는 지역도 목적에 따라 세분화되고 있다. 벌써 세 번째 한국 여행이라는 일본인 키요미(38)씨는 “그동안은 서울, 부산만 방문해서 경주는 이번이 처음”이라면서 “경주는 드라마 ‘선덕여왕’을 통해 많이 알려졌다”고 말했다. 그는 “걷기 좋고,세계유산이 많은 경주는 일본의 교토를 연상케 한다”면서 “한국에 와본 일본 사람들이 서울은 도쿄, 부산은 오사카, 경주는 교토로 이해하고 있다”고 덧붙였다.경주시내를 찾는 외국인 관광객이 늘면서 이들을 위한 게스트하우스도 속속 생기고 있다. 경주시내에는 중심지인 경주역과 버스터미널을 중심으로 게스트하우스 10여 곳이 자리잡고 있다.

보문단지에 내국인을 대상으로 한 대규모 호텔과 펜션 500여 개가 있지만 외국인관광객들은 주로 저렴한 게스트하우스나 모텔에서 잠을 청한다. 올해 3월 문을 연 경주여행게스트하우스는 별다른 홍보를 안 했지만 외국인 투숙비율이 10%를 차지한다. 주인은 “가을께 본격적으로 외국인 전용 홈페이지를 만들면 더 늘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다”고 말했다.


전국일주 하는 체코 소녀들

15년 전부터 외국인을 대상으로 한 게스트하우스를 운영하고 있는 추종원(52)씨의 집은 경주를 찾는 외국인들의 아지트다. 10여 년 전 론니플래닛 영문판에 이 게스트하우스가 언급되면서 외국인 사이에서 입 소문이 났다. 주인은 가난한 배낭여행객들의 주머니 사정을 고려해 10여 년 간 숙박비를 거의 올리지 않았다. 덕분에 이곳에서 하루 지내는 비용은 3만원에 불과하다. 지은 지 120년이 넘은 한옥마당에는 지하수를 길을 수 있는 우물과 물 펌프가 그대로 남아있다. 저렴한 가격에 전통 한옥에서 하룻밤을 보낼 수 있다는 매력 때문에 일부 외국인은 1년 전부터 예약을 할 정도다.

이곳에서 3일째 묵고 있는 마티나(19)와 막달레나(18)가 마당 테이블에 한국 가수들의 음반과 브로마이드를 늘어놓았다. 그 주변으로 외국인 투숙객들이 모여들어 구경하자 두 소녀는 신이 났다. 비스트, 틴탑 등 아이돌 그룹을 좋아한다는 이들은 체코에서 온 케이팝팬이다. 4년 전부터 한국에 관심을 갖게 돼 결국 10월에 진학할 대학에서 한국학을 전공할 예정이란다. 본격적인 공부를 하기 전에 한국을 미리 경험해보고 싶어 한달 간 전국일주 중이다.“서울에서는 주로 아이돌 스타를 따라다니고, 음반이나 잡지를 사모으는데 시간을 썼다면 경주에서는 한옥에 머물며 전통문화를 체험하고 있어요. 그동안 한국에 대한 관심은 대부분 연예인에 관한 것이었지만 이 곳에 머물면서 한국을 좀 더 좋아하게 된 것 같아요.”

마티나는 “서울은 서울대로 멋지고, 다른 지방은 그것대로 멋지지만 어느 한군데만 봐서는 한국을 여행했다고 말하기 어려울 것 같다”면서 “한국에 오기 전엔 작은 나라라고느꼈지만 막상 다녀보니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볼거리가 많아서 한 달이라는 시간이 오히려 짧게 느껴진다”고 말했다.외국인 관광객이 늘면서 근처 식당도 덩달아 신이 났다. 한 게스트하우스 인근에 위치한 한식당 메뉴판에는 영어와 일본어, 중국어가 차례로 표기돼 있다.

메뉴는 찌개 종류와 비빔밥뿐이지만 5000~6000원이면 한끼를 해결할 수 있어 외국인이 자주 찾는단다. 식당을운영하는 이성호(39)씨는 “원래는 별다른 메뉴판이 없었는데 작년부터 외국인 관광객이 많아져서 새로 메뉴판을 만들었다”면서 “그림과 음식설명을 함께 넣으니 주문 받기가 한결 수월해졌다”고 말했다.

볼 건 많아도 살 건 적어

경주시내에서 외국인 여행객들에게 인기가 높은 장소는 뭐니뭐니해도 불국사와 석굴암이다. 8월 29일 오전에 들른 불국사에서는 한국인보다 외국인을 찾기 쉬울 정도였다. 이곳 매표소의 한 직원은 “주말에는 내국인 비율이 압도적으로 많지만 평일이나 비수기로 가면 외국인의 비율이 30~40%를 차지하기도 한다”면서 “일본인이나 중국인은 단체관광객이 많은 반면 미국이나 유럽인들은 개인여행객이 대부분”이라고 말했다.

불국사를 구경하고 내려오자 기와불사를 접수 받는 곳이 눈에 띄었다. 흔히 사찰에 가면 볼 수 있는 기와불사에는 가족 이름을 가지런히 적게 마련이다. 그러나 이곳에서는 각양각색의 문자가 적힌 기와가 줄줄이 놓여져 있었다. 외국인 관광객들이 기념 삼아 남겨놓은‘작품’이었다. 기와불사의 주인도 핀란드, 러시아, 일본, 코트디부아르, 태국 등으로 다양했다. 사찰 관계자는 “불국사와 석굴암 기와불사는 내국인보다 외국인들의 참여가 더 높을 만큼 인기”라며 “축원의 의미를 알려주면 다들 좋아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정작 그 옆에 딸린 기념품 가게는 한산하기만 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안마도구와 어딜 가도 비슷비슷한 염주 팔찌는 외국인들의 관심을 끌기에 역부족인 듯했다. 30여분을 서있었지만 기념품 가게에 들른 외국인은 단 2명에 불과했다. 이들 중 한 서양인은 “해외여행 할 때마다 관광지 엽서를 사 모으는 게 취미인데 한국 관광지에는 그 흔한 엽서도 찾기 힘들다”면서 “이곳에서도 사진이 바랠 정도로 오래된 엽서밖에 없어 안사고 그냥 나왔다”고 말했다. 경주에서만난 외국인들은 “볼 건 많아도 살 건 없다”고 입을 모았다.

석굴암에서도 외국인은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었다. 석굴암 안에 들어서자마자 연신 ‘따봉’을 외치는 줄리안 코헨(26)씨는 프랑스 출신이다. 8월 16일에 입국한 그의 여행코스는 서울-부산-경주-포항-울릉도다. 코스는 가이드북을 참고해 정했다. 그는 3주간의 휴가를 몽땅 한국에서 보낼 작정이다.“서울에서 지하철이 잘돼 있어서 편하게 여행했어요. 그런데 경주는 서울과 180도 다른 곳이네요. 한국에서는 어떻게 이런 오랜 역사를 가진 도시와 서울처럼 세계최첨단을 달리는 도시가 한 시대에 공존할 수 있는 거죠?”

줄리안은 “외국인 관광객, 특히 유럽인이 한국을 찾을 때는 생각보다 많은 준비와 공부를 하고 온다”고 말했다. 그 역시 이곳에 오기 몇 달 전부터 가이드북을 보며 한국에 대해 공부했다. 부산에 도착하자 많은 이들이 해운대를 추천해줬지만 그에게 해운대는 ‘길고 복잡한 해변가’일뿐이었다. 정작 그의 마음을 사로잡은 곳은 고즈넉한 분위기의 석불사였다. 그에게 이 절은 한국인들 사이에서도 그리 알려지지 않은 곳이라고 일러주자 그는 놀랍다는듯 가이드북을 내밀었다. 프랑스어로 된 그 책에는 암벽을 깎아내 만든 29개의 마애불이 있는 석불사가 제법 많은 분량을 차지 하고 있었다.

줄리안은 “가이드북에서도 서울이나 부산 같은 큰 도시에 비해 지방 도시에 대한 정보는 많지 않다”면서 “한국에서 좀더 적극적으로 지방 관광지에 대해 알리면 좋겠다”고 말했다.“외국인이 한국에 와서 원하는 건 맥도날드나 힐튼호텔이 아니에요. 한국의 역사나 전통, 문화가 많이 알려지면 좋겠어요. ‘문화적인 풍부함’이야말로 한국 여행의 진짜 매력이니까요.”

1154호 (2012.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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