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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정연 기자의 ‘스칸디나비안 파워’ ⑦ H&M - 불황에 강한 패스트 패션의 강자 

3대째 경영하는 스웨덴 가족기업 … 패션 업계에 부는 북유럽 디자인 열풍 주도 

‘헤이(Hej)’는 노르웨이·덴마크·스웨덴·핀란드에서 모두 통하는 인사말이다. 철자는 차이가 있지만 뜻은 하나다. 북유럽 4개국은 비슷한 언어만큼이나 정치·경제·문화적으로 공통점이 많은 나라이다. 세계적인 경제 불황 속에서 재빨리 침체를 벗어난 점도 닮았다. 위기 극복의 저력은 글로벌 경쟁력을 갖춘 기업에서 나왔다. 각국 인구가 1000만명이 채 되지 않는 북유럽 국가들은 작은 내수시장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일찍이 세계 시장으로 눈을 돌렸다. 덕분에 우리에게 잘 알려지진 않았지만 세계 시장 점유율 1~2위를 다투는 북유럽 출신 ‘히든챔피언’이 적지 않다. 우리에게는 다소 낯설지만 세계 시장을 휘젓는 북유럽의 숨은 강자들을 소개 한다.

▎사진:H&M 제공




각국을 대표하는 선수단이 입는 올림픽 유니폼. 이를 제작하는 업체 역시 한 나라를 대표하는 브랜드이기 마련이다. 지난해 러시아 소치에서 열린 동계올림픽의 경우 미국 랄프로렌, 프랑스 라코스테, 이탈리아 조르지오 아르마니 등 각국 명품 브랜드가 디자인을 맡아 눈길을 끌었다. 그렇다면 스웨덴 국가 대표팀의 공식 유니폼을 제작한 업체는 어디였을까. 바로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제조·유통 일괄형 의류(SPA) 브랜드 H&M이었다. 시시각각 변하는 패션 트렌드에 따라 다양한 디자인을 선보이면서도 가격을 낮춰 큰 성공을 거둔 H&M이 자국을 대표해 고가의 명품 브랜드와 어깨를 나란히 한 것이다. 세련된 디자인에 기능성을 갖춘 H&M표 국가 대표 유니폼은 실용주의를 중시하는 스웨덴 국민의 가치를 그대로 보여주는 듯했다.

이젠 스웨덴을 넘어 명실상부한 최대의 글로벌 SPA 브랜드로 성장한 H&M이지만 시작은 스웨덴의 한 마을에 문을 연 작은 옷가게였다. 스테판 페르손 H&M 회장의 아버지이자 창업주인 에를링 페르손 회장은 1947년 스웨덴 베스트만란드주의 도시 베스테로스에 헤네스(Hennes)라는 상호의 여성복점을 냈다. 수도인 스톡홀름에서 100km 떨어진 베스테로스는 인구 13만명 남짓한 작은 도시였지만 전기공업이 발달한 공업도시로 주민들의 생활수준이 높은 편이었다. 상점 이름 헤네스는 스웨덴어 ‘그녀의 것’이란 뜻이다.

제2차 세계대전 직후 피폐해진 경제 상황 탓에 유럽 대부분의 가게는 팔릴 만한 물건만 소량으로 입고하는 게 일반적이었다. 손님들은 옷가게에서 다양한 디자인은 고사하고 꼭 맞는 사이즈를 구하기도 어려웠다. 제품이 다양하지 않다 보니 진열 방식도 각양각색이었다. 이와 달리 헤네스는 다양한 상품을 대량으로 준비해 종류별로 전시했다. 이는 에를링이 미국 여행 중 들른 상점에서 얻은 아이디어였다.

작은 여성복 가게로 출발


▎지난해 10월 서울 잠실 제2롯데월드 내 H&M 홈 1호점 오픈을 앞두고 매장을 찾은 방문객들로 붐비고 있다.
전후 유럽과 달리 각종 산업이 번창하던 미국은 당시에도 효율적인 유통구조를 갖추고 있었다. 다양한 상품을 대량 생산해 품목별로 진열한 미국 점포의 모습은 에를링에게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미국식 의류매장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새로운 판매 방식에 힘입어 헤네스는 성공가도를 달렸다. 헤네스의 성공으로 돈을 번 에를링은 1968년 사냥장비 업체인 마우리츠(Mauritz)를 인수하기에 이른다. 기존 여성복에 남성 패션을 더해 종합 패션 브랜드 업체로 거듭난 것이다. 이렇게 헤네스와 마우리츠가 만나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H&M(Hennes & Mauritz)이 탄생했다.


▎칼-요한 스테판 H&M CEO. 그는 창업자 에를링 스테판의 손자다
스웨덴 수도 스톡홀름 중앙역 부근에서 세르겔 광장으로 이어지는 드로트닝가탄 거리는 스톡홀름 최대 번화가다. 특히 수많은 패션 브랜드가 밀집해있어 스웨덴 젊은이들은 물론 여행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드로트닝가탄의 가장 중심부에는 H&M 건물이 자리하고 있다. 이를 기점으로 이어지는 거리에는 코스(COS)·몽키(Monki) ·위크데이(Weekday)·칩먼데이(Cheap Monday)·앤아더스토리스(& Other Stories) 등 스웨덴에서 가장 ‘핫’한 패션 브랜드들이 줄지어 있다. 가게 안은 늘 20~30대 젊은 여성들로 붐빈다. 이들 역시 모두 H&M 그룹의 브랜드다. 국내에는 아직 H&M과 코스만 진출해있지만 나머지 브랜드 역시 유럽을 중심으로 전 세계에 매장을 확장 중이다. 이렇게 H&M 그룹이 지난해 말까지 전 세계에 보유한 매장 수는 55개국 3511곳에 달한다. H&M은 불황에 오히려 강한 모습을 보였다. 멋스러운 옷을 저렴한 가격에 내놓기 때문이다.

지난해 매출·이익 모두 늘어

H&M이 지향하는 방식인 SPA는 제조·유통 일괄형 의류(SPA, Speciality retailer of Private label Apparel)를 뜻한다. 한 업체에서 기획·생산·판매를 모두 담당해 생산 단가를 낮추고, 유통 과정을 줄여 소비자에게 낮은 가격에 제품을 공급한다. 이러한 방식 덕분에 짧은 주기로 제품을 교체할 수 있어 빠르게 변하는 패션 트렌드를 반영하기 쉽다. 기존 의류 시장은 4계절과 간절기를 포함해 1년에 6회를 주기로 옷을 생산 했다. 이와 달리 패스트패션 시장에서는 24회 분기로 생산라인을 돌린다. H&M을 비롯한 유니클로, 자라(ZARA) 등의 SPA 브랜드는 1~2주에 한번씩 라인을 교체한다. SPA 브랜드는 빠른 속도만큼 성장세도 가파르다.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지난해 H&M을 비롯해 자라(ZARA)·유니클로 등 3대 글로벌 SPA 브랜드의 매출은 국내 진출 이후 처음으로 1조원을 돌파했다. 2013년보다 30.7% 증가한 수치다.

그 가운데서도 H&M의 성장 속도는 눈부시다. 지난해 4분기(9~11월) 순이익은 62억2000만 크로나(약 8245억원)를 기록했다. 이는 전년 같은 기간인 55억 크로나를 웃도는 수치다. 매출도 전년 대비 11% 늘어난 426억4000만 크로나를 기록했다. 매장 수도 증가 추세다. 지난 1년 동안 379개의 신규 매장이 생겨났다. 전 세계 어디에선가 하루에 1개 이상의 H&M 점포가 생긴 셈이다. 칼-요한 페르손 H&M CEO는 올 초 연례보고서 발표회에서 “올해는 더 많은 매장을 열 계획이며 약 400개의 신규 매장을 목표로 한다”며 “대만·페루·마카오·인도 등을 신규 마켓으로 계획돼 있으며 기존 마켓 가운데서도 성장 가능성이 큰 시장에 적극적으로 확대·진출할 것”이라고 밝혔다. 빠른 성장세를 보이고 있는 중국과 미국에 가장 많은 신규 매장이 들어설 예정이다.

H&M의 성공 요인으로는 특유의 아웃소싱 전략이 꼽힌다. 스웨덴 스톡홀름에 있는 본사에서는 각국 매장에서 수집된 판매 정보를 바탕으로 상품을 기획·디자인한다. 이외 제조·생산 과정은 따로 계약을 맺은 900여곳의 공장에 일임한다. 공장은 주로 동유럽과 아시아 지역에 흩어져있다. 아웃소싱을 원칙으로 삼는 이유는 간단하다. 단가가 맞지 않거나 품질이 떨어지면 협력업체를 바꾸면 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하청업체라고 해서 부당한 계약을 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수평적인 관계를 유지하면서 제품 경쟁력은 물론 효율성을 높인다. 그룹 내 모든 브랜드가 이 같은 방식으로 생산된다. 생산은 노동력이 싼 국가에서 주로 하지만 디자인만큼은 스웨덴산을 강조한다. 세계를 휩쓰는 북유럽 디자인 열풍을 패션에도 십분 활용하는 것이다.

의류 넘어 화장품·생활용품으로 사업 확장


▎1947년 스웨덴 베스테로스에 문을 연 헤네스 1호점 풍경. 헤네스는 H&M의 전신이 됐다.
최신 유행을 선도하는 패션그룹이지만 H&M은 페르손 일가가 3대째 경영하는 가족기업이다. 창업자 에를링 페르손의 아들인 스테판 페르손은 1982년 이사에 오른 후 현재까지 회장을 맡고 있다. 그는 공격적인 경영으로 H&M을 글로벌 기업의 위치에 올렸다. 미국 경제잡지 포브스에 따르면 지난해 스테판 페르손의 재산은 311억 달러에 이른다. 스웨덴 1위, 세계 17위 규모다.

2009년에는 당시 34세이던 아들 칼-요한 페르손이 CEO로 취임하며 3대가 가업을 잇게 됐다. 대학 시절 이미 이벤트 회사를 매입해 규모를 키운 후 거액에 되판 경력이 있는 칼-요한은 2005년 H&M에 입사하면서부터 뛰어난 사업 수완을 보인 것으로 알려졌다. 입사 후 줄곧 점포 확장을 책임지던 그는 2007년 영업기획을 담당하며 경영 수업을 받았다. 장남 칼-요한 외에 둘째 샬롯 쇠데르스트룀 역시 H&M의 기업 후원사업을 맡으며 회사에 합류했다. 올해 29세인 막내 톰 페르손은 아직 경영에 참여하고 있진 않지만 삼남매가 각각 지주사의 지분 9.98%를 보유하고 있다. 이들의 순자산은 30억 달러에 이른다. 그럼에도 이들은 검소한 생활 방식으로 유명하다. 자사 브랜드인 H&M 남성복을 즐겨 입는 칼-요한은 구매 때 25% 직원 할인 혜택을 챙길 만큼 알뜰하다고 알려졌다.

세계 3대 SPA 브랜드 반열에 올라선 H&M은 올해 또 다른 도전에 나선다. 올 가을 내놓을 예정인 H&M 뷰티가 대표적이다. 칼-요한 페르손 CEO는 “가성비(가격 대비 성능) 높고 품질 좋은 메이크업, 바디·헤어케어 제품을 선보일 예정”이라며 “올해 안에 약 40개국 900여개 매장과 온라인을 통해 만날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지난해 초 선보인 스포츠 브랜드 ‘H&M 스포츠’와 생활용품점 ‘H&M 홈’ 등 사업 범위를 확장하고 있다. 2006년부터 시작한 온라인 쇼핑사이트도 더욱 확대한다는 계획이다. 분야는 다양해졌지만 이 기업이 추구하는 가치는 60여년 전 작은 여성복점을 운영하던 시절과 다름 없다. 패션·품질·가격이란 세 가지 가치를 최우선으로 삼는다는 ‘H&M 정신’으로 중무장한 이 기업의 활약은 이제부터 시작이다.

1274호 (2015.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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