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슬로시티로 지정된 강원 영월군 김삿갓면 주민들이 텃밭을 가꾸고 있다. / 사진:전민규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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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토스카나주에 있는 그레베 인 키안티는 세계적인 문화도시 피렌체에 인접한 작은 마을이다. 199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인구 1만4000여명 남짓한 이곳은 이웃 피렌체와 달리 이렇다 할 관광명소도, 경제에 활력을 불어넣을 만한 산업도 없었다. 유일한 소득원은 농장에서 재배되는 포도와 올리브가 전부였다. 일자리를 찾아 대도시로 나가는 인구가 점차 늘었고 마을 소득은 감소했다. 마을에 남은 사람들은 대개 경제활동이 어려운 노인들이었다.마을을 살릴 수 있는 방법은 대규모 공단을 유치하는 일뿐이라는 목소리가 커졌다. 하지만 당시 시장이었던 파올로 사투르니니의 생각은 달랐다. 오히려 시골 그대로의 모습을 살려 ‘작은 마을’임을 강조하기로 마음 먹었다. 인근 마을 몇 곳이 모여 이 지역만이 가진 자연 풍경, 사람들의 정신적 풍요와 여유, 불편한 접근성 등을 내세웠다. 대도시가 물질과 기계의 속도에 맞춘 ‘패스트시티’라면 이곳은 그와 반대로 인간과 자연 환경의 속도를 존중하는 삶을 사는 ‘슬로시티’라는 점을 내걸었다.
▎슬로시티운동이 시작된 이탈리아 그레베 인 키안티의 재래시장. / 사진:한국슬로시티본부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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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베 인 키안티의 모든 정책과 행정도 슬로시티 콘셉트에 맞춰 진행됐다. 재래시장 활성화를 위해 대형마트와 패스트푸드점 진출을 막고, 외지인의 부동산 투자를 제한했다. 밤에 간판 조명이나 가로등을 켜지않는 것은 물론 농축산물과 수공예품의 생산 방식도 옛날 방식을 고수할 것을 제안했다. 주민들의 반발이 빗발쳤다. 공장을 유치해 지역경제를 살려도 모자랄 판에 불편함을 감수하더라도 전통 방식을 따르라니 시대착오적이라는 비판이었다. 그러나 파올로 시장의 철학은 확고했다. 그는 “중소도시들이 모두 대도시를 표방한다면 결국 지역 정체성을 잃을 것”이라며 “대도시에 예속된다 해도 경제 개발로 인한 혜택이 지역민에게 돌아가진 않는다”는 입장이었다. 이러한 역발상은 곧 성과로 나타났다. 작은 마을을 구경하려는 방문객이 늘었고, 자연스레 관광 수입도 생겼다. 2000년대 초반 유럽 전역에 광우병 파동이 일어난 것도 슬로시티에 대한 관심을 키우는 계기가 됐다.이렇게 시작한 파올로 시장의 ‘슬로시티 운동’은 곧 인근 지역과 다른 유럽 국가로 확산됐다. 슬로시티 운동을 펼친 지 2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원조 슬로시티’는 건재하다. 고용률 100%를 달성해 전 주민이 직업이 있고, 소득 수준도 이탈리아 중소도시의 평균을 훌쩍 넘어선다. 관광지로 사랑받고 있지만 범죄율은 전국에서 가장 낮은 수준이다. 그레베 인 키안티의 성공에 힘입어 지금까지 27개국 174개 도시가 슬로시티를 표방한다. 한국은 2007년 전남 신안군이 아시아 최초로 국제 슬로시티 인증을 받은 것을 시작으로, 현재까지 11개 도시가 국제슬로시티연맹에 가입돼 있다.
▎쇠퇴한 폐광촌에서 벽화마을로 변신한 영월 모운동 마을. / 사진:전민규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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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슬로시티연맹에 가입하려면 7개 분야 71개 세부 평가 항목 요건을 갖춰야 한다. 에너지 및 환경정책, 인프라정책, 도시 삶의 질 정책, 농업·관광 및 전통예술 보호 정책 등이다. 슬로시티연맹 측은 “슬로시티로 선정되면 주민의 삶이 향상되고, 방문자가 증가해 느림의 미학이 전파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슬로시티 운동은 단순히 느린 속도만을 지향하는 게 아니다. 빠름과 느림, 도시와 농촌, 세계화와 지역화, 디지털과 아날로그 간의 조화로운 삶의 리듬을 중시한다. 진정한 ‘느림의 기술’은 여유(Slow)·소박함(Small)·지속가능성(Sustainable)을 동반한 것으로, 삶의 질을 높이는 데 목적이 있다는 것이다. 일과 삶의 균형이 깨지고, 치열한 경쟁에 노출되는 현대인이 늘어갈수록 역설적으로 슬로시티에 대한 열망은 더 커지고 있다.강원도 영월군 김삿갓면은 지난 2012년 국제슬로시티연맹 인증을 획득했다. 국내에서는 가장 최근에 슬로시티가 된 곳이다. 이곳은 전체 면적의 85%가 산으로 둘러싸인 그야말로 오지다. 주민 대부분은 노인층이고, 농업에 종사한다. 조선시대 방랑시인 김삿갓 유적지와 천연기념물인 고씨동굴 등이 명소로 알려져 있지만 관광지라기보다는 고즈넉한 산골마을에 가깝다. 서울에서 2시간이면 닿는 지리적 이점 덕분에 귀농·귀촌 인구도 증가 추세다. 2년 전 이 마을로 귀촌한 한상도(52)씨도 그중 한 사람이다. 서울에서 20년 넘게 직장생활을 한 그는 은퇴 후 여유있는 삶을 꿈꿨다. “서울 생활이 편리하긴 해도 정해진 스케줄에 따라 바쁘게 살아야 하잖아요. 그런데 이곳에선 내가 마음먹은 대로 살 수 있어요. 밭을 일구고, 책도 읽고 하루종일 분주히 살아도 힘이 들기는커녕 오히려 마음에 평안을 얻습니다. 이런 게 슬로시티의 매력이 아닐까요?”
여유롭고 소박하며 지속가능한 ‘느림의 기술’슬로시티로 지정되면서 개인의 삶뿐 아니라 지역민 전체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한 시도도 이어지고 있다. 영월에는 현재 24개 박물관이 있다. 별마로천문대, 조선민화박물관, 난고 김삿갓문학관, 영월아프리카박물관, 동강사진박물관 등 분야도 다양하다. 영월군은 다양한 박물관과 미술관을 유치하기 위해 오래전부터 노력을 기울였다. 그 결과 박물관 특구로 불리는 ‘느림 박물관’이 탄생했다. 영월군 관계자는 “주민과 방문객, 박물관이 공생하는 공간을 제공하고자 했다”며 “많은 예술인이 참여한 덕분에 지역민들이 대도시 못지 않게 다양한 문화 생활을 향유할 수 있게 됐다”고 설명했다.천혜의 비경과 때묻지 않은 자연, 문화예술 공간이 삼박자를 이루자 방문객들의 발길도 잦아졌다. 주민들은 ‘김삿갓 느림의 축제’를 비롯해 ‘외씨버선길 걷기’ 행사 등을 개최해 전통 문화를 되살리는 데 힘을 쏟고 있다. 또한 음식·약초차 개발과 스토리텔링 교육을 통해 슬로시티를 지키는 데 힘을 모으고 있다. 한상안 김삿갓면 슬로시티 사무국장은 “좋은 자연 환경을 갖췄음에도 관광지가 아니다 보니 방문객들이 먹고 즐길 거리가 부족한 게 사실”라며 “친환경적이면서도 지역을 대표할 수 있는 슬로푸드가 필요하다는 생각에 이 지역에서 나는 어수리나물을 활용한 다양한 요리를 개발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지난 해에는 지역 주민들이 주축이 돼 김삿갓협동조합을 설립했고, 본격적인 상품화에 나설 채비를 갖추고 있다.
김삿갓면에서 차로 20여분 구불구불한 가파른 산길을 따라가야 나오는 모운동 마을. 해발 1000m가 넘는 망경대산 자락에 위치한 모운동은 ‘구름이 모이는 동네’라는 뜻이다. 산 중턱 해발 700m 높이의 이 마을은 마치 산 속이 꼭꼭 숨겨놓은 보물처럼 평화롭고 아름답다. 주민 대부분이 광업에 종사하던 1970년대까지만 해도 마을에는 1만5000여 가구가 옹기종기 모여 살았다. 그러나 2500여명의 광부를 채용해 지역경제를 책임 지던 탄광촌 옥동광업소가 1989년 역사 속으로 사라지며 주민들도 뿔뿔이 흩어졌다. 마을에는 노인들만 사는 20여 가구만이 남았다. 쇠퇴한 폐광촌을 살린 건 슬로시티의 역발상 전략이었다. 생각을 바꾸니 마을이 달라졌다. 이 마을 이장인 김흥식(60)씨는 “온 동네 주민이 한 식구라고 할 만큼 서로 의지하고 협력한다”며 “시골 마을의 정겨운 분위기를 느끼고 싶은 사람들이 우리 마을을 많이 찾는데 뿌듯함을 느낀다”고 말했다.모운동 마을 사람들은 손님을 맞기 위해 2007년부터 마을 단장에 나섰다. 벽화를 그리고, 집을 손 보고, 정원을 가꿨다. 마을 자료관도 만들었다. 과거 탄광에서 사용하던 물건을 비롯해 주민들에게 받은 기증품을 모아 예전 모운동을 추억할 수 있는 공간을 꾸민 것이다. 마을 한가운데는 작은 무대와 객석을 마련해 각종 문화 공연도 유치했다. 공연이 없을 때는 방문객들이 자유롭게 텐트를 치며 야영을 할 수 있게 했다. 최근에는 예술인들도 입주해 미술관과 카페·전시관 등도 새로 생겼다. 아기자기하고 고즈넉한 마을에 들어서면 ‘한번쯤 살아보고 싶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김씨는 “오래 전 마을을 떠나 미국으로 이주한 고향 사람이 예쁘게 변한 마을을 보고 기뻐하며 연락을 해왔는데 그렇게 기분이 좋을 수가 없었다”며 “마을의 전통적인 가치를 지키는 일이 주민은 물론 방문객들에게도 삶의 여유를 줄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고 말했다.모든 슬로시티가 느림의 철학을 이어가는 것은 아니다. 2007년 아시아 지역 최초로 슬로시티에 선정된 전남 4개군(신안·장흥·담양·완도군) 중 장흥군은 2013년 국제슬로시티 재인증에 실패해 퇴출당하는 수모를 겪었다. 국제슬로시티연명은 5년에 한번 재인증 심사를 벌이는데, 이때 승인이 전격 취소된 것이다. 이에 대해 한 지자체 관계자는 “지자체가 관광과 세수 확보에만 급급한 탓에 슬로시티 본연의 가치를 잃었다고 판단한 것 같다”며 “특히 슬로시티의 이름으로 각종 사업을 벌이는 등 이윤을 챙긴 것이 본부 측의 신뢰를 잃은 원인”이라고 설명했다.당시 보류 판정을 받은 후 재심사를 거쳐 어렵게 재승인을 받은 신안군 역시 증도대교가 개통되며 섬의 정체성을 잃고, 외지인의 방문이 폭발적으로 늘어 애초 지정 취지에서 벗어났다는 평가를 들었다. 군 관계자는 “평가 기준이 유럽에 맞춰진 데다 실사조차 나오지 않고 이뤄진 결정”이라고 해명했지만 국내는 물론 아시아 최초의 슬로시티가 재인증에 실패했다는 비난은 피할 길이 없어보인다.
시골마을 정체성 살려 다시 태어난 폐광촌2010년 슬로시티로 지정된 후 연간 500만명의 방문객이 찾는 전주 한옥마을 역시 11월 예정인 재인증을 두고 자성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전주시에 따르면 한옥마을 내 음식점과 커피점 등 각종 상업시설이 큰 폭으로 증가했다. 2006년 83곳에 불과하던 상업시설은 지난해 말 기준 366개로 늘었다. 상업시설이 늘면서 한옥마을 특유의 풍경이 사라지고, 정체성마저 위협받고 있는 형편이다. 한옥마을 내 한 주민은 “관광객이 크게 늘자 땅값과 임대료 등이 폭등한 것은 물론 각종 소음과 매연 등 공해도 심각해졌다”며 “삶의 질이 높아지긴커녕 주차난 등으로 몇 년째 마을이 몸살을 앓고 있는 형편”이라고 토로했다.이를 해결하기 위해 전주시는 공무원과 대학생 등으로 구성된 연합봉사단을 꾸리는 등 대책 마련에 나서고 있다. 손대현 국제슬로시티연맹 부회장은 “슬로시티의 철학은 지역이 잘하는 것의 가치를 잘 살려 느리게 살아도 지역경제가 살 수 있다는 것”이라며 “지역경제를 살리려고 전통을 버리고, 상업화를 추구하는 것은 그 가치를 훼손한다”고 설명했다. 손 부회장은 “최근 국내에도 슬로 라이프에 대한 관심이 커지는 만큼 각 슬로시티가 나서 본연의 가치를 확산해 나갈 필요가 있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