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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영수의 ‘돈이 되는 茶 이야기] 브랜드 가치 올려 ‘보이차=대익’ 성과 

중국 차 회사 최초로 TV 광고 ... 다양한 사회공헌으로 이미지 높여 

서영수

▎대익의 로고(왼쪽). 대익을 보이차의 대명사로 만든 우웬즈 회장.
차(茶)의 발원지답게 중국에는 차를 만드는 기업과 개인이 가을밤을 빼곡히 수놓은 별보다 많다. 그 많은 차 브랜드 중에 립톤(Lipton)과 같이 세계적으로 잘 알려진 스타 브랜드는 단 하나도 없다. 지난 10여년 동안 중국의 유명한 차 생산지를 두루 찾아가 생산자와 기업 책임자를 직접 만나 차를 함께 마시며 브랜드 가치에 대해 얘기를 나눴지만 대부분의 생산자는 브랜드보다 자신이 만든 차에 대한 본질적 가치와 자부심에 취해 브랜드의 중요성을 외면하거나 무시했다. 특정 지역의 전통적인 문화와 지역 특산물로서 차의 가치를 넘어설 생각도 엄두도 내지 않았다. 자신의 차를 1년 전부터 예매하고 차 산지까지 찾아와 구매해가는 열성고객과 중국 내수 시장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그들이 틀린 것은 아니지만 산업으로서 차를 바라보면 2%의 갈증이 있었다.

대익의 보이차 광고 덕에 전체 시장 커져


▎대익의 사옥. / 사진:중앙포토
베이징 올림픽이 열리던 2008년 5월에도 차를 우리는 도구인 자사호(紫砂壺)와 홍차로 유명한 이싱(宜興)을 찾았다. 지인과 TV를 보는데 9시 뉴스 바로 전에 보이차(普?茶·푸얼차)광고가 나왔다. 신선한 충격이었다. 14억 인구 중에 10억이 차를 즐겨 마시고 그중 7억이 녹차를 주로 마시는 중국에서 보이차 인구는 겨우 1000만명에 불과한 시기였다.

더욱이 한 해 전에는 보이차 가격이 10배로 폭등했다가 20분의 1로 급락해버린 롤러코스터 현상을 보여 빚을 내어 보이차에 투자한 서민들의 연이은 파산과 자살사건이 사회 문제로 대두된 직후였다. 모두가 보이차를 내던지 듯 투매할 당시에 대익(大益)은 CCTV 1의 황금시간 대 광고를 치열한 경매를 거쳐 5000만 위안에 낙찰 받았던 것이다. 위기를 기회로 삼은 대익의 과감한 선택은 주변을 놀라게 했다. 중국 차 회사 최초로 시도한 대익의 TV 광고를 바라보는 동종 업계의 시선은 찬사보다 시샘과 비난이 많았지만 TV 광고로 얻은 열매는 모두 함께 나누게 됐다. 2008년 베이징 올림픽 열기로 달아오른 대륙의 TV 앞에 모인 중국인과 외국인은 매일 밤 대익의 보이차 광고를 봤다. 중국에서도 소수만이 즐기던 변방의 차에서 대중에게 친숙한 차로 이미지가 전환되며 ‘보이차=대익’이라는 학습효과가 생겼다.

불과 4년 전만 해도 보이차 품질은 우수했지만 만성 적자로 허덕이던 대익의 극적인 변신이 경이로웠다. 1938년 설립되어 항일전쟁(1937~1945)과 문화대혁명(1966~1976)을 견디며 살아남은 전통 있는 국영기업, 멍하이차창(?海茶廠)은 열악한 재정 상태와 저조한 생산성으로 민영화를 시도했지만 인수자가 쉽게 나서지 않았다. 이때 보이차 사업과 무관한 보원전자(博文科技)의 경영인, 우웬즈(吳遠之)가 나타나 2004년 10월 25일 멍하이차창을 인수해 민영기업으로 새 출발시켰다. 그는 “회사에 남고 싶은 사람은 모두 남아 달라”고 했지만 절반 이상이 퇴직금을 받고 떠났다. 인재 영입을 위해 대졸 신입사원에게 130㎡ 규모의 집을 한 채씩 무상 공급했다. 생산과 유통을 분리해 효율경영을 한 결과 회사는 1년 만에 흑자로 돌아섰다. 2006년에는 부채를 모두 청산했다. ‘대익’ 브랜드를 보호하기 위해 조폐기술에 사용하는 최첨단 위조 방지 홀로그램을 보이차 업계에서 처음으로 적용했다. 2007년 9월 베이징에 1만2000㎡ 규모의 대익황차회를 만들어 차 문화를 교류하고 다도와 다예를 배우고 차연(茶宴)을 즐길 수 있는 공간을 제공했다. 회사 이름을 멍하이차창에서 브랜드 이름인 ‘대익’으로 바꾸고 그는 회장으로 취임했다.

중국 보이차 스타기업으로 떠오르며 중국 상무부의 추천과 외교부의 요구에 따라 2008년 중국을 국빈 방문한 러시아 메드베데프 대통령에게 대익 보이차를 국가대표차로 선물하게 됐다. 2008년 6월 한국의 무형문화재에 해당되는 ‘국가급비물질문화유산’으로 대익의 제다기술이 선정되는 영광을 얻기도 했다. 이러한 연장선상에서 대익의 황금시간 대 TV 광고는 대박이었다. 끝없이 추락하던 보이차 시장 전체가 완만한 곡선으로 상승세를 탔다. 더불어 차 산업 전체가 활황곡선을 그었다. 누구나 사먹을 수 있는 부담 없는 가격에 믿을 만한 보이차는 ‘대익’이라는 인식이 확산되며 대익은 보이차의 대명사가 됐다. 4년 동안 이룬 변화라고 믿기 힘들 정도로 우 회장은 ‘대익’의 브랜드 가치를 창출해냈다.

1966년 하이난다오(海南島)에서 태어난 우 회장은 중국의 수재들만 들어가는 베이징항공우주대학을 졸업한 후 캐나다 오타와 대학 경영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1997년에 취득하고 돌아와 하이난다오 정부 경제연구센터에서 경력을 쌓고 홍콩으로 건너갔다. 이때 선진 금융기법과 경영마인드를 익힌 우 회장은 브랜드 가치 창출의 중요성을 체득했다. 그가 차를 잘 모르고도 기업을 급성장시킬 수 있었던 핵심은 브랜드 가치가 곧 기업이라는 사실을 평생 차를 해온 사람들보다 빨리 파악하고 먼저 행동했기 때문이다. 2004년 인수 당시 연매출 2000만 위안을 10년 사이에 50배로 키웠다. 대익 전문 대리점도 35개에서 3000개로 확산됐다. 회사가 흑자로 돌아서긴 했지만 빚 투성이 상태였던 2005년 빈곤한 학생을 돕고 오지에 학교를 세우는 대익애심기금회를 만들었다. 수익이 아닌 매출의 2.3%를 매년 기부해 2만여명이 혜택을 보았으며, 45곳에 희망학교를 세운 공로로 2014년부터 중국 정부가 인증하는 AAAAA급 최우수 봉사단체로 인정받았다.

위조 방지 홀로그램도 첫 적용

사회공헌과 사업으로 중국을 평정하고 해외 진출 첫 무대를 한국으로 택한 우 회장은 2011년 11월 (주)대익 인터내셔널 코리아를 설립해 부산에 상륙했다. 2년 만에 30개에 달하는 대리점을 확보한 대익은 2013년 겨울에 서울에 입성했다. 2014년 가을에는 강남역 사거리 1층에 300㎡ 규모로 플래그숍 1호, 대익 티 카페를 열었다. 한국에서의 경험을 살려 말레이시아·타이완에 이미 진출했고, 일본 상륙도 초읽기에 들어갔다.

지난해 11월 2일 멍하이 차창에서 열린 건창(建廠) 74주년이자 민영화 10주년을 기념하여 20편만 제작된 특별 한정판 보이차 ‘대익전세(大益傳世)’의 경매행사가 있었다. 3000여명이 참여한 경매에서 특별 한정판 20편중 10편만 매물로 나와 최저낙찰가 1000만원에서 최고가 2000만원에 낙찰됐다. 이날의 낙찰대금전액은 대익애심기금회에 기부됐다. 대익애심기금회의 봉사활동을 높이 평가해온 필자도 1편을 낙찰 받았다. 경매 직후 현장에서 필자가 구매한 가격의 2배를 주겠다는 제안이 들어왔지만 거절했다. 향후 이 차의 가격이 얼마가 될지는 미지수지만 그날의 낙찰가격은 브랜드 가치가 없었다면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이었다.

서영수 - 1956년생으로 1984년에 데뷔한 대한민국 최연소 감독 출신. 미국 시나리오 작가조합 정회원. 1980년 무렵 보이차에 입문해 중국 윈난성 보이차 산지를 탐방하는 등 차 문화에 조예가 깊다. 중국 CCTV의 특집 다큐멘터리 [하늘이 내린 선물 보이차]에 출연했다.

1303호 (2015.0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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