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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태의 ‘사직상소에 비친 조선 선비의 경세관’⑨] 요직 제안에 밥 먹듯 사직서 제출 

안동김씨 세도정치 문 연 김조순 ... 순조의 장인이란 현실 감안 

김준태 칼럼니스트이자 정치철학자

▎일러스트:김회룡 aseokim@joongang.co.kr
여기 사직서를 내는 것이 일상이었던 사람이 있다. 그는 어떤 자리든지 임명되는 그 날로 물러났다. 혹여 사직서가 반려되기라도 할라치면 수리가 될 때까지 계속 제출하곤 했다. 명예직 하나를 제외하고 그는 어떠한 직책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오죽하면 임금이 “내가 경에게 사사로운 이유로 이리 하는 것이 아닌데 어째서 경은 자신이 더럽혀지기라도 하는 것 마냥 여기는가? 경의 꽉 막힌 병통이 너무 심하다.”(순조2.8.20)라며 서운함을 표시할 정도였다.

명예직 제외하고 어떤 직책도 맡지 않아

이런 모습은 그가 죽을 때까지 계속된다. 당사자는 ‘능력이 부족하다’ ‘자격이 되지 않는다’ ‘도리에 맞지 않다’ ‘부끄러운 일이다’라며 사직했다. 임명권자는 ‘그대 밖에 적임자가 없다’ ‘자질과 역량이 충분하다’ ‘왕명을 어길 셈인가?’라며 관직을 맡으라고 강권했다. 순조 11년, 임금이 그를 수도방위와 국왕호위 임무를 담당하는 핵심 부대인 금위영의 수장으로 임명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임금은 “의지할 사람이 그대 밖에 없어 맡기는 것”이라고 간곡한 어조로 부탁했지만, 그는 “한 사람의 신하를 의지하는 것은 옳지 않다”며 사직상소를 올렸다.

‘전하께서 신을 의지하시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나이다. 신이 간절히 앙망하는 것은 부디 전하께서는 강연(講筵)에 나가실 때에는 격물치지와 성경(誠敬)의 공부가 고명하고 광대한 경지에 이를 수 있도록 정진하시옵소서. 신료들을 대하실 때에는 마음을 비우고 정성을 다하시옵소서. 업무는 넓게 대응하되 빠짐없이 살펴 처리하옵소서. 백성을 염려하신다면 흡사 전하의 몸에 있는 병을 치료하듯 정성스레 백성을 보호하시옵소서. 기강을 확립하고자 하신다면 먼저 스스로를 바로잡아 아랫사람들에게 모범을 보이시옵소서. 형정(刑政)은 대소와 경중을 그 실정에 맞게 행하고, 융정(戎政, 오랑캐에 맞서 국경을 방어하는 일)은 일이 벌어지기 전에 미리미리 대비하옵소서. 만일 전하께서 잡다한 업무들로 밤낮없이 집무해야 하신다면 정신을 맑게 하고 염려를 줄여 평정을 유지하시옵소서. 특히 무익한 것으로 인해 유익한 것을 해치게 되는 일이 없으셔야 하옵니다. 이들 몇 가지는 전하께서 미천한 신을 의지하시는 것보다 훨씬 더 중한 일이오니, 만일 변함없는 마음으로 부응해주시기만 한다면 신 같은 이는 더 이상 필요치 않을 것이옵니다.’(순조11.7.12).

임금이 공적인 테두리 안에서 신하를 신뢰하고 권한을 위임하는 것은 긍정적인 효과를 가져다 주겠지만, 특정 신하에게 ‘의지’하게 된다면 이는 문제가 될 수 있다. 자칫 사적이고 주관적인 관계가 공식적인 절차와 루트를 대체해 정보가 왜곡되고, 권력이 그에게 몰리는 등의 폐단이 생겨날 수 있는 것이다. 상소를 올린 이는 바로 이 점을 경계하며 임금이 우선시해야 할 마음가짐을 설명했다. 이를 지킨다면 자신 같은 신하에게 굳이 의지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자, 그렇다면 이 상소를 올린 주인공은 누구일까? 사직서를 제출하는 것이 일상이었던 사람은 누구일까? 자리나 권력에 대해 아무런 욕심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이 사람은 바로 안동김 씨 세도정치의 문을 연 김조순(金祖淳, 1765~1832)이다. 세도 정치의 토대가 된 인물이니 얼핏 부정적으로 생각되겠지만 그는 당대 사람들로부터 ‘군자의 훌륭한 덕을 가졌다’(순조 32.4.3) ‘올곧은 선비이다’는 평가를 들었다. 순조의 장인이었던 그는 앞에서 말한 것처럼 요직을 모두 사양하며 결코 권력의 전면에 나서지 않았다. 그는 “신이 처한 바가 이미 남들과 다르니 혹 나라에 위급한 일이 있다면 신 또한 사력을 다해야 하겠으나, 그게 아닌데도 수치를 무릅쓰고 아무 거리낄 게 없는 사람처럼 행동할 순 없사옵니다”(순조17.4.17)라고 말한다. 외척인 자신이 정치의 일선에 나설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리 되면 공론이 오염되고 정치가 타락해 버린다는 것이 그의 확고한 입장이었다.

이런 이유에서 그는 특히 인사 문제에 개입하는 것을 꺼려했다. 한번은 임금이 김조순에게 인재 추천 업무를 맡아보라고 지시한 적이 있었다. 그러자 그는 곧바로 “현명한 사람을 관직에 진출하게 하는 것은 대신의 책임이고 인재를 기용하게 하는 것은 전관(銓官, 인사담당관리)의 직분이니 추천하라고 명하심은 실로 당연합니다. 그러나 신은 조정에 달린 혹과도 같아서 전하의 은택으로 과분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을 뿐, 참으로 떳떳하지 못합니다. 그런데도 신이 어찌 감히 함부로 혀를 놀려서 현명한 이를 진출시키고 인재를 기용하도록 할 수 있겠습니까.”(순조11.윤3.13)라며 사직소를 올렸다.

물론 이것이 김조순의 솔직한 심정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막후에 있어도 얼마든지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마당에 굳이 나서서 요직을 맡을 필요는 없다고 판단했을 수도 있다. 실제로 같은 시기에 큰아들 김유근(金逌根)을 비롯한 친인척들은 인사업무에 개입하고 있었다. 의심스러운 정황은 충분한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김조순은 자신이 먼저 삼가고 조심해 다른 척신들이 드러내놓고 인사에 전횡을 부리지 못하도록 만들었다.

자손들은 나라 망치는 화근이 돼

뿐만 아니라 그가 군권을 거절한 것도 주목할 만한 대목이다. 왕권이 공고하지 못했던 조선 후기에는 주로 외척에게 군권을 맡기곤 했다. 외척은 부귀를 탐하고 권력을 휘두를지언정 적어도 왕실을 위협하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유력 가문이 외척일 경우 거기에 군사력까지 더해 든든한 보호막이 되어 줄 수도 있었다. 그래서 김조순에게도 장용영대장, 총융사, 어영대장, 훈련대장, 금위대장 등 국왕의 친위부대를 지휘하는 자리와 나아가 병권을 총괄하는 병조판서가 차례로 제수되었는데, 그는 그 때마다 계속 사직상소를 올렸다. 외척이 군권을 갖게 되면 권력이 지나치게 집중된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김조순의 스탠스 덕분에 순조는 상대적으로 외척의 간섭 없이 안정적인 왕권을 유지할 수 있었다. 김조순 자신도 군자이며 선비라는 평가를 듣게 된다. 안동 김씨 세도정치를 강력하게 비판했던 황현조차도 그의 저서 [매천야록(梅泉野錄)]에서 “김조순은 문장을 잘 짓고 나랏일을 처리하는 데 솜씨를 발휘해 후덕하다는 칭송을 들었다. 하지만 그 자손들은 탐욕스럽고 완고하며 교만하고 사치하여 외척으로서 나라를 망치는 화근이 되었다”고 적을 정도였다. 김조순은 훌륭한 인물이지만 자손들이 문제라는 것이다. 그런데 실상은 김조순이 이렇게 행동했기 때문에 안동김씨 세도정권이 세워졌는지도 모른다. 수백 장의 사직서를 통해 쌓은 명예와 인망이 후손들에게 후광으로 작용한 것이다. 김조순의 사직상소가 남긴 역설적인 그림자이다.

김준태 - 칼럼니스트이자 정치철학자. 성균관대와 동 대학원에서 공부하고 성균관대 유교문화연구소와 동양철학문화연구소를 거치며 한국의 정치철학을 연구하고 있다. 우리 역사 속 정치가들의 리더십과 사상을 연구한 논문을 다수 썼다. 저서로는 [왕의 경영], [군주의 조건] 등이 있다.

1328호 (2016.0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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