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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GA투어 주요 프로의 옛 직업] 한 때는 눈물 젖은 빵 좀 먹었죠 

목수, 수퍼마켓 점원, 캐디부터 세일즈맨·은행원·회계사까지 

남화영 헤럴드스포츠 편집부장

▎둘째가라면 서운할 멋쟁이인 잉글랜드의 이안 폴터는 23세에 레잉톤의 버자드골프클럽 프로숍에서 보조 프로로 일했다.
최근 웰스파고챔피언십 연장전에서 극적으로 우승한 재미교포 제임스 한(35)은 프로 선수가 되기 전에 신발 판매를 했다. 그가 호주머니에 지니는 볼 마커는 미국으로 이민 간 부모가 일하던 코인 세탁소에서 쓰는 동전이었다. 수많은 선수가 명멸하는 미국프로골프(PGA)투어는 실력 자체가 돈이자 성적이고 계급이다. 대학까지 골프 선수였던 제임스 한은 졸업 후 광고회사에 취직했지만 골프에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미국PGA투어 3부 리그 격인 캐나다투어에서 우승한 선수를 본 후 광고회사를 나와 다시 클럽을 잡았다. 평일에는 백화점 구두매장 점원으로 일하고, 주말엔 투어에 나가는 생활을 반복했다. 웹 닷컴투어에 정착해 2012년 렉스병원오픈에서 우승한 후 구두를 팔지 않고 연습에 전념하게 됐다.

눈물 젖은 빵을 먹으면서 골프의 꿈을 키운 선수가 제임스 한 외에도 제법 있다. 골프를 할 수만 있다면 어떤 일을 해서라도 선수가 되겠다는 각오를 키운 선수들은 생명력이 길다. 주니어와 대학 골프 선수를 통한 엘리트 코스를 통하지 않고, 다른 직업에 종사하다가 미국 PGA투어라는 세계 최고 무대에 오른 선수는 누구일까? 그들이 어떤 일을 하면서 챔피언의 꿈을 키웠는지 업종별로 나눠봤다.

세일즈맨 | 리치 빔, 빌 룬드, 스콧 매카론:


▎대학 졸업 후 1994년 프로에 입문한 리치 빔은 PGA투어 Q스쿨에서 낙방하고 미니투어에서도 별다른 성적을 내지 못하자 시애틀로 건너가 시간당 7달러를 받으며 휴대전화와 카스테레오를 팔며 근근이 생계를 이어갔다.
2002년 미네소타 체스카의 헤이즐틴내셔널에서 열린 PGA챔피언십에서 ‘골프황제’ 타이거 우즈를 한 타 차로 따돌리고 워너메이커컵을 들어올린 리치 빔(47)은 이전까지는 주목받지 못하던 선수였다. 대학 졸업 후 1994년 프로에 입문한 빔은 PGA투어 Q스쿨에서 낙방하고 미니투어에서도 별다른 성적을 내지 못하자 골퍼로서는 자질이 없다고 판단했다. 시애틀로 건너간 그는 당시 시간당 7달러를 받으며 휴대전화와 카스테레오를 팔며 근근이 생계를 이어갔다. 하지만 1998년 시애틀에서 열린 뷰익클래식에서 고향 친구인 헤이스가 우승하는 모습을 갤러리로 지켜본 후 열정을 불태우며 골프채를 다시 잡았다. 빔은 아내가 수퍼마켓 점원으로 일하며 벌어온 돈으로 작은 대회에 출전하며 자신감을 되찾았다. 1998년 12월에 Q스쿨을 8위로 통과했고, 이듬해 PGA투어에 데뷔했다. 총상금 550만 달러의 메이저인 PGA챔피언십에서 우승할 때조차 그는 예전 점포의 ID카드를 지갑에 넣어 다니고 있었다. 시간당 7달러를 벌 때의 초심을 잃지 않기 위해서였다. 당시 우승 상금은 99만 달러였다.

빌 룬드(42)는 1998년 네바다라스베이거스대학(UNLV)팀 주장으로 내셔널챔피언십에서 우승을 일궜다. 처음엔 유망주로 프로 생활을 호기롭게 시작했으나 2005년 투어 카드를 잃었다. 룬드는 골프를 그만두고 라스베이거스로 가서 스폰서십 세일즈로 집을 파는 부동산거래소 일을 시작했다. 1년 반 동안 일했지만 자신의 적성이 아닌 듯 성과는 미미했다. 마지막 기회로 여기며 다시 시작한 골프로 2008년 2부투어인 내이션와이드투어 카드를 얻었고, 2010년 터닝스톤리조트챔피언십에서 우승했다.

스콧 매카론(51) 역시 1988년 UCLA 졸업 후 프로 데뷔 전까지 4년 동안 가족이 하던 의류 사업을 도왔다. “옷은 정말 잘 팔았다”고 자평하는 매카론은 “회사 사정이 여의치 않게 되면서 나는 프로 골퍼가 되어야 했다”고 말했다. 매카론은 1996년 3월 오늘날의 취리히클래식에서 첫승을 올렸고 이후 PGA투어에서 통산 3승을 거두고 1200만 달러의 상금을 벌었다.

화이트 칼라 | 패드레이그 해링턴, 폴 고이도스, 우디 오스틴:

화이트칼라 출신의 골퍼도 제법 있다. 메이저 3승을 일군 아일랜드 출신의 패드레이그 해링턴(46)은 회계사였다. 24세에 프로에 데뷔하기 전에는 아마추어 골퍼이면서 회계사 일을 병행했다. 숫자와 계산에 밝은 전직 회계사여서인지 프로가 되고 나서도 상금과 수입 관련한 재테크와 세금 납부는 스스로 하는 골퍼다. PGA투어에서 역대 2승을 쌓았고, 2010년 존디어클래식 마지막 라운드에서 한 라운드 최저타(59타) 기록을 세운 폴 고이도스(52)는 한동안 캘리포니아의 고등학교에서 기간제 교사로 일했다. “골프를 하는 것보다 인생살이가 몇 배는 더 고되다는 사실을 그때 깨달았다”고 고이도스는 말한다. 어느 대회에서 끓어오르는 분노 때문에 퍼터를 부러뜨리기도 한 다혈질인 우디 오스틴(52)은 은행 직원이었다. 골프 대회장에서는 다혈질을 가진 오스틴은 템파에 있는 GTE 연방신협의 창구 직원으로 8년 간 근무한 경력이 있다.

육체 노동자 | 비제이 싱, 부 위클리, 윌 매킨지:


▎비제이 싱은 젊은 시절 골프 경비 마련을 위해 스코틀랜드 에딘버러의 한 나이트클럽에서 입구를 지켰다.
한때 세계 랭킹 1위에 올랐던 피지 출신의 흑진주 비제이 싱(53)은 젊은 시절 골프 경비 마련을 위해 스코틀랜드 에딘버러의 한 나이트클럽에서 입구를 지켰다. “여성이 취하면 가장 다루기 힘든 존재가 된다. 남자는 어떻게 제압하는지 알지만 여성은 참 까다로웠다”고 한 신문 인터뷰에서 당시 일상을 털어놓은 바 있다. 그 외에도 싱은 목수 일도 해가며 골프대회 참가비를 마련했다. 프로 초기엔 바지 한 벌로 1주일을 버텼으며, 보르네오섬에서 10달러 교습비를 받고 클럽 프로 생활을 했고 생계가 막막해 골프용품 판매와 내기골프도 마다하지 않았다. 싱은 2004년 메이저인 PGA챔피언십에서 우승하며 PGA투어 사상 처음으로 시즌 상금 1000만 달러를 돌파했다. PGA투어 3승에 한 해 1200만 달러를 버는 선수가 되기 전까지 부 위클리(44)는 몬산토화학에서 시간당 15달러를 받는 화학탱크 세척원으로 3년 간 일했다. 방탄 조끼에 항상 우비를 입고 화학약품으로 가득한 곳을 청소했다. 그러다가 심기일전해 1997년 PGA투어에 들어온 후 오래 가는 선수가 되었다. 주니어 시절 유망주였던 윌 매킨지(43)는 25세가 될 때까지 스스로 생계를 꾸렸다. 모험심이 강했던 매킨지는 멕시칸 패스트푸드 브랜드인 타코벨에서 접시를 닦았다. 그 밖에 5년 동안 몬태나의 밴에서 숙식을 해결하며 경비원, 건설 노동자 등 일용직을 전전했다. 1999년 페인 스튜어트가 US오픈에서 우승하는 장면에서 영감을 받아 다시 골프를 시작해 PGA투어 통산 2승을 거뒀다.

군인 | 톰 휘트니, 오빌 무디, 통차이 자이디:

공군사관학교를 졸업한 톰 휘트니(26)는 현재 PGA투어 3부 리그인 라틴아메리카PGA투어를 뛰고 있다. 하지만 이전 4년 간 그는 와이오밍 치엔의 FE워런 공군기지에서 대륙간 탄도미사일 담당 사관이었다. 대통령 명령이 떨어지면 즉각 ICBM을 발사해야 하는 임무라 항상 대기하고 훈련하는 게 일상이었다. 비록 최전선은 아니었지만 전쟁을 가정한 생활을 해야 했다. 휘트니는 미국 공군 골프대회에서 세 번을 우승했고, 지난 2012년엔 세계 군인 골프대회에서 우승했다. 전역한 후 올 1월에 열린 라틴아메리카투어 퀄리파잉에서는 2위로 통과해 선수로 필드를 누비고 있다. 주한미군으로 14년 간 복무한 오빌 무디(1933~2008)는 1967년에 전역했다. 그리곤 미국으로 돌아와 고향에서 선수로의 꿈을 키워 2년 후인 1969년 메이저대회인 US오픈에서 우승했다. 무디는 그린키퍼였던 부친의 영향으로 어릴 때부터 골프를 접했다. 오클라호마대학 골프팀에 진학해 몇 주를 보내다 군에 입대했다. 미군 골프 대회에서 우승하면서 골프광인 미 8군 사령관에게 차출돼 한국에 왔다. 태국의 롭부리에서 태어난 통차이 자이디(49)는 골프장 뒤에 위치한 2층 목조 가옥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 집엔 주방이나 수세식 화장실, 샤워 시설이 없었다. 어린 시절 뛰어난 축구선수였으나 운동 중에 발에 나무 꼬챙이가 박히는 부상을 당하면서 축구의 꿈을 접었다. 대신 16세에 고향집 뒤에 있던 태국 군용 골프코스를 몰래 찾아 버려진 5번 아이언 헤드를 대나무에 연결해 골프를 시작했다. 통차이는 1989년 스무 살에 태국 국왕 군대에 입대했으며 낙하산 부대원으로 근무했다. 군생활을 통해 강한 정신력과 체력을 갖게 됐다고 입버릇처럼 말한다. 통차이는 1999년 프로 데뷔 전에 아마추어 골퍼로 다섯 차례 우승했다. 그는 아시안투어에서 13승, 유러피언투어 7승을 차지했다.

골프 업계 | 양용은, 이안 폴터, 프레드 펑크:


▎양용은은 체격이 좋아 학창 시절엔 보디빌딩으로 돈을 벌 꿈을 키웠다.
제주도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양용은(44)은 체격이 좋아 학창 시절엔 보디빌딩으로 돈을 벌 꿈을 키웠다. 가정 형편이 어려워 19세 때부터 제주 오라CC의 드라이빙레인지에서 볼을 주웠고, 용인으로 올라와 골프연습장에서 일하며 어깨너머로 골프를 배웠다. 1997년 프로에 데뷔하고는 그 해 8개 대회에 출전했다. 투어 초창기에는 용인에서 월세 15만원짜리 단칸방에 세 아이와 사는 배고픈 삶이 이어졌다. 월세방을 전전하면서도 결코 골프 인생의 목표를 포기하지 않은 결과 2002년 11월 SBS최강전에서 연장전 끝에 첫 승을 올렸다. 지금은 투어에서 둘째가라면 서운할 멋쟁이인 잉글랜드의 이안 폴터(40)는 23세에 레잉톤의 버자드골프클럽 프로숍에서 보조 프로로 일했다. 폴터는 “아주 잠깐만 일했기 때문에 물건을 사놓는 것 밖에 할 줄 아는 게 없었다”고 당시 일상을 회고한다. 프레드 펑크(60)는 1982년부터 6년 동안 매릴랜드대 골프팀 코치를 맡았다. 그러면서 지역 신문보급소를 운영하기도 했다.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내 실력이 좋아졌고, 골프선수 이외의 삶이 얼마나 냉혹한지도 알게 됐다’고 코치 시절을 말한다. 33세인 1989년 PGA투어에 데뷔해 8승을 거두고 2006년부터 챔피언스투어에서 9승을 올렸다.

캐디 | 앙헬 카브레라, 파비앙 고메즈:

남미 출신 선수는 골프장 인근에 살던 캐디 출신이 제법 있다. 아르헨티나의 앙헬 카브레라(48)는 돈을 벌기 위해 열 살 때부터 코르도바에서 캐디를 했다. 어깨 너머로 골프를 배우고 실력을 키워 유러피언투어로 올라갔고, 2007년부터 미국 PGA투어를 뛰면서 3승을 거뒀다. 미국에 진출한 2007년엔 US오픈을, 2009년엔 마스터스에서 2승을 거뒀다. 아르헨티나의 파비앙 고메즈(38) 역시 산전수전 겪고 오늘날에 이르렀다. 그는 하루 캐디피 20달러를 받고 일했고 돈을 더 벌기 위해서는 잔디까지 깎아야 했다. 스무 살이 넘어 선수가 됐다. 30대 중반인 2011년에야 고메즈는 PGA정규 투어를 밟았고, 지난해 세인트주드클래식과 올해 소니오픈에서 2승을 쌓았다.

- 남화영 헤럴드스포츠 편집부장

1337호 (2016.0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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