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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영석의 ‘의예동률(醫藝同律)’] 정성은 또 하나의 약방문(藥方文) 

짓는 정성, 달이는 정성, 마시는 정성 합쳐져야 약효 극대화 

윤영석 한의학 박사. 경희대 한의과대학 외래교수

▎운현궁 명주칠 약소반.
운현궁에 가보셨나요? 골동품 거리인 인사동 바로 길 건너에 운현궁이 있습니다. 운현궁은 고종 황제의 아버지인 흥선군이 살던 집입니다. 고종이 왕위에 오르기 전까지 태어나서 자란 집이기도 하고요. 대원군의 사저였지만 한때 조선의 권세가들이 모여서 국정을 논하던 곳이었고, 1863년에 흥선군을 흥선 대원군으로 승격한 다음부터 궁으로 부르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지금은 규모가 많이 줄어서 안채·사랑채 등 몇 개의 한옥 건물만 남아 있습니다.

우리 박물관에는 운현궁에서 실제로 썼던 약소반이 전시돼 있습니다. 이 소반의 안쪽에는 운현궁의 물건이라는 표식이 조각돼 있습니다. 궁에서 왕족들이 썼던 목가구에는 붉은 기가 도는 주칠(朱漆)이 되어 있고 정교하게 조각이 되어 있으면서 다리가 높은 모양새로 왕가의 기품을 느끼게 합니다.

왕가의 약소반은 붉은 기 도는 주칠 더해

소반은 조선 시대에 아낙네들이 가장 소중히 여겼던 가구 중 하나입니다. 살림이 큰 양반집에서는 수십 개의 소반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바닥에 앉아서 생활하는 우리 조상들에게 소반은 먹고 마시고 담소할 때 항상 곁에 두고 써야 하는 필수품이었습니다.

이 중 약소반은 탕약을 마시기 위해 약사발을 올리거나 나르기 위해 만든 작은 상입니다. 약사발 하나만 올라가면 되기 때문에 어린이 얼굴만한 크기면 충분했습니다.

약소반은 밥상이나 찻상보다는 작고 소박하고 간결하게 만들어 졌습니다. 사람이 출신 지역과 생김새에 따라 구분이 되듯이 이 작은 약소반도 산지에 따라 나주반·해주반·통영반·충주반·강원반으로 나뉩니다. 다리의 모양새에 따라 구족반(狗足盤)·호족반(虎足盤)·죽절반(竹節盤) 등으로도 구분합니다. 구족반은 개다리 소반이라고도 흔히들 말합니다. 집안을 수호한다는 개념으로 다리 부분을 경비견의 발 모양으로 만들었습니다. 호족반의 다리는 호랑이 발처럼 생겼는데 신령스러운 기운을 집안에 들이고 싶은 염원으로 만들었습니다. 죽절반의 다리는 대나무의 절개와 기개를 본받고자 하는 의도로 만든 것입니다.

약소반의 칠도 신분에 따라 달리했습니다. 서민은 검은색을 입히거나 기름칠을 했지만 양반가에서는 옻칠을 하고 왕실에서는 주황색의 주칠을 했습니다. 왕족만 쓸 수 있었던 이 주칠 약소반에 흥선 대원군이나 어린 고종이 탕약을 얹어 드셨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왕가에서 약소반에 약이 올라가는 과정이 간단치는 않았을 겁니다. 내의원에서 한약을 짓고 약탕관에 넣어 달인 다음에는 약호에 넣어 양을 가늠하고 식힙니다. 이를 다시 약사발에 따르고 약소반에 올려 낼 때에는 공경과 정성의 마음이 가득했으리라 생각됩니다.

현대에 이르러서도 한약을 복용한다는 것은 정성이 없으면 시작부터가 어렵습니다. 한약재는 썰어서 말린 다음, 달이기 전에도 많은 정성이 들어갑니다. 이를 법제(法制)라고 합니다. 잘 말린 약재는 잘게 썬 다음에도 볶거나 찌고 술에 담그거나 말립니다. 살짝 태우거나 소금이나 물에 볶고 술에 담갔다가 찌기도 합니다. 이런 법제 방법만도 수십 가지나 됩니다. 이는 약성이 강하면 완화시켜주고 혹시 있을지 모르는 부작용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함입니다.

예를 들면 숙지황은 생지황이란 뿌리약재를 아홉 번 찌고 아홉 번 말려서 만듭니다. 말리는 것도 그늘에서 대충 말리는 것이 아니라 햇볕이 쨍쨍 내려 쬐는 날을 골라서 말린 다음 가마솥에 찌기를 아홉 번 반복합니다. 이때에는 태울 염려가 있으므로 밤을 꼬박 새기도 합니다. 이렇게 해서 만든 숙지황이어야 약효가 많이 나고 소화흡수도 잘 됩니다.

한약을 달일 때에는 음식을 만드는 것과 마찬가지의 방식과 정성이 들어가야 제대로 효과를 낼 수 있습니다. 약을 달일 때에는 조리 순서와 마찬가지로 먼저 넣는 약과 나중에 넣는 약이 있습니다. 뿌리나 줄기로 만들어진 약재는 오래 달여야 하지만 열매인 약재는 오래 달이면 안 되고 잎이나 꽃으로 된 약재는 5분 이내로 달여야 약효가 줄어들지 않습니다.

이는 한방차를 끓일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한방차에는 오래 달이는 것, 잠깐 동안만 달이는 것, 우려내어 마시는 것이 있습니다. 약재를 찬물에 담갔을 때 가라앉는 것은 약한 불에 10분 쯤 달이고 중간 정도로 잠기는 것은 5분 정도 중간 불에 달이고 뜨는 것은 5분가량만 우려내어 마시면 됩니다.

오래 달여 마시는 약재는 인삼이나 당귀처럼 단단한 약재가 많고 5분 정도만 달이는 약재는 구기자차나 회향처럼 부드러운 약재가 대부분입니다. 잠깐 동안만 뜨거운 물에 우려내었다 마셔야 좋은 것은 국화나 박하, 차조기 같이 꽃이나 잎으로 된 약재들입니다.

한방차를 마실 때에는 자기의 체질에 맞는지를 알고 마셔야 합니다. 한방차는 커피나 녹차처럼 기호품일 뿐만 아니라 어느 정도의 약효도 기대하고 마시게 됩니다. 몸이 차고 소화가 잘 안 되는 사람은 인삼차나 계피차, 회향차, 생강차, 진피차 등 오장(五臟)을 덥혀주는 차를 마셔야 하고 더위를 많이 타거나 열이 많고 스트레스가 많은 사람은 갈근차나 감잎차, 차조기차, 작설차, 결명자차, 맥문동차처럼 육부(六腑)의 열을 식혀주는 차를 마셔야 합니다. 살집이 많고 땀이 많은 체질의 사람은 율무차나 비파엽차를 마시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나 입에 맞는다 해도 장기간 같은 종류의 한방차를 마실 때에는 반드시 가까운 한의원에서 체질에 맞는지 자문을 구하는 것이 좋습니다. 단순히 무슨 병에는 이런 차가 좋다는 말만 듣고 자기의 체질에 안 맞는 한방차를 장복하면 도리어 손해를 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한의원에서 지어온 한약을 직접 달일 때에는 찬 물에 1시간 정도 담갔다 끓이는 편이 좋습니다. 보약인 경우는 더더욱 그렇습니다. 약 달이는 물은 미네랄이 많이 함유돼 있는 약수보다는 정수한 물이나 생수가 더 좋습니다.

약을 찬 물에 1시간 정도만 담가놓아도 까맣게 약 성분이 우러나오는 데 이걸 통째로 달여야 효과가 제대로 납니다. 이렇게 하면 재탕을 하지 않아도 충분합니다. 그러나 굳이 재탕을 하려면 바짝 말린 후 다시 달이는 편이 약효를 더 낼 수 있습니다.

약 달이는 물은 정수한 물이나 생수로

예로부터 한약의 약효를 제대로 보려면 짓는 정성, 달이는 정성, 마시는 정성이 합쳐져야 한다고 했습니다. 한의원에서 달여 온 한약이라도 정갈한 약사발에 담아 약소반에 올려내는 정성이 더해지면 약효가 더 날 듯싶습니다. 정성은 또 하나의 약 처방이라고도 할 수 있으니까요.

윤영석 - 경희대 한의과대학을 졸업했다. 한의학 박사. 경희대 한의과대학 외래교수로 후학을 양성하면서 7대째 가업을 계승해 춘원당한방병원을 운영하고 있다. 한의학 관련 유물 1000여점을 모아 춘원당한방박물관도 세웠다. 저서로는 [갑상선 질환, 이렇게 고친다] [축농증·비염이 골치라고요?] 등이 있다.

1337호 (2016.0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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