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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목받는 남자 골프 3인방] 21세기판 ‘위대한 빅3’로 기록될까 

제이슨 데이, 조던 스피스, 로리 매킬로이 세계 랭킹 1위 번갈아 차지 

남화영 [헤럴드스포츠] 편집장

▎지난 2년 간 남자 골프 세계 랭킹 1위 번갈아 차지하며 새로운 빅 3로 떠오른 제이슨 데이, 조던 스피스, 로리 매킬로이(왼쪽부터)
호주의 제이슨 데이, 미국의 조던 스피스, 북아일랜드의 로리 매킬로이. 지난 2014년 8월 3일부터 번갈아 가며 세계 랭킹 선두 다툼을 벌이고 있는 선수들이다. 이들도 골프 역사상 시대별로 각축전을 벌인 ‘빅3’의 반열에 오를 수 있을까. 이들이 기억할 만한 빅3로 기록될지는 아직 두고 볼 단계지만, 이 기간 열린 7번의 메이저에서 세 명이 들어올린 우승 트로피만 5개에 이른다.

영국의 ‘위대한 3인방’: 1860년 브리티시오픈이 시작된 이래 157년 간 빅3는 네 번 등장한다. 아무 선수나 잘하면 빅3가 되는 게 아니라 대체로 다음과 같은 세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첫째로는 빅3가 다른 선수들과는 확연히 구별되며 서로 우승 경쟁을 펼칠 것. 둘째는 세 명이 메이저를 휩쓸면서 당대의 트렌드를 주도할 것. 마지막으로 인간적인 매력을 가져 골프팬의 외연을 넓히는 데 기여할 것이다.


가장 먼저 등장하는 빅3는 영국이 세계 골프계의 중심이던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에 있었다. 당시는 골프가 스포츠로 자리잡아 가던 시기였다. 프로 골퍼도 새로운 직업으로 여겨졌다. 이전까지 프로라 하면 대개 클럽장인이거나, 골프장 매니저거나 캐디 출신이었다. 처음 빅3는 후대에 ‘위대한 3인방(The Great Triumvirate)’으로까지 칭송받는 존 H. 테일러, 해리 바든, 제임스 브래이드다. 이들은 1894년부터 1차 세계대전 전인 1914년까지 21년 동안 무려 16차례의 브리티시오픈 우승을 독차지했다. 당대 최고의 대회에서 빅3가 엎치락뒤치락 번갈아 우승하니 사람들의 관심은 그만큼 커질 수밖에 없었다.

17세의 나이로 프로 데뷔한 존 테일러가 가장 먼저 주목받았다. 존은 당시의 내로라하는 선수들에게 대결장을 보내 한 명씩 정복하더니 1894, 95년 브리티시오픈에서 2연패하는 등 총 5승을 거뒀다. 해리 바든은 1896년 브리티시오픈에서 3연 패를 노리던 당대 최고의 존 테일러를 물리치면서 이름을 알렸다. 바든은 1898, 99년, 1903, 11, 14년 등 5차례나 우승을 더 거둬 브리티시오픈에서만 6승을 거둔 선수로 명성을 떨쳤다. 그는 부드럽게 클럽을 잡는 이른바 ‘바든 그립’ 스타일을 역사에 남기게 된다. 인터로킹그립이 정석이던 시대에 왼손 검지 위에 오른손 새끼를 올리는 바든의 오버래핑그립은 오늘날에는 또 하나의 정석이 되었다.

마지막으로 185cm의 장신인 제임스 브래이드는 서른에 프로에 데뷔했고, 나중에는 각종 유럽의 명문 코스 설계가로 이름을 남긴다. 브래이드 역시 1901년부터 5차례 브리티시오픈 타이틀을 차지했다. 하지만 유럽에 전쟁의 기운이 심화되면서 영국의 3인방이 이끈 골프 제국은 서서히 사라진다.

미국 ‘클래식 시대’의 3인방: 1차 대전이 끝난 후 골프의 중심은 미국으로 옮겨갔다. 1930년대는 대공황을 극복하기 위해 뉴딜과 같은 대규모 건설 정책을 추진하면서 미국 전역에 골프장 신설 붐이 일었다. 코스 설계사에서는 이 기간을 ‘클래식 시대’라고 부른다. 그 와중에 새로운 빅3가 등장했다. 최초의 그랜드 슬램을 달성하고 은퇴한 보비 존스, 내기 골프의 고수이자 멋쟁이로 프로의 위상을 높인 월터 하겐, 샌드 웨지를 일반에 보급시킨 진 사라센이 미국 최초의 3인방으로 불린다.

이들 세 선구자들이 미국 골프와 스포츠계의 이슈 메이커였다. 게다가 세 명 모두 멋진 신사의 이미지였기 때문에 골프가 들판에 불이 번지듯 빠르게 전파될 수 있었다. 특히 보비 존스는 오거스타내셔널을 세워 오늘날 마스터스를 만들었다.

50년대 풍미한 동갑내기 3인방: 2차 대전이 끝나고 베이비붐이 일던 시기와 맞물려 새로운 빅3 시대 열린다. 1949년 2월 2일, 당대 최고의 골퍼이던 벤 호건이 자동차 사고를 당했다. 호건이 만신창이가 된 뉴스는 미국 전역을 경악시켰다. 담당 의사는 “골프는커녕 걸어다니는 것조차 불가능하다”고 했다. 그렇게 그의 골프 인생은 끝나는가 싶었지만, 6개월 후에 기적이 일어났다. 호건의 초인적인 의지와 끈질긴 재활 덕에 골프 스윙이 가능해진 것이다. 그리고 1950년 US오픈에서 극적으로 우승하는 기적을 만들어냈다. 그 우승은 20세기 스포츠사에 기록되는 이변의 하나다.


▎잭 니클라우스는 “우즈도 다시 우승할 수 있는 선수로 돌아올 것”이라며 제이슨 데이, 조던 스피스, 로리 매킬로이를 빅3로 부르기엔 이른감이 있다고 평가했다.
부활의 상징인 호건은 샘 스니드, 바이런 넬슨과 함께 50년대를 풍미했다. 이들 세 명은 공교롭게도 1912년 같은 해에 태어난 동갑내기였다. 월터 하겐과 바비 존스, 진 사라센이 미국에 골프를 뿌리 내린 3인방이었다면, 이들 삼총사는 현대 골프의 맥을 이어나가는 데 공헌했다. 각각 경제 공황과 2차 대전이라는 어려운 시기를 지나면서 빅3는 미국 골퍼에게 희망을 심어주었다. 한 명의 스타가 시대를 이끈 게 아니라 세명이 물고물리는 경쟁을 벌이면서 팬층을 광범위하게 확보해갔다.

샘 스니드는 PGA투어의 최다 81승(메이저 7승)이란 기록으로, 바이런 넬슨은 1945년 한 해에 18승에 11연승이라는 놀라운 기록을 남기고은퇴했다. 넬슨은 브리티시오픈을 뺀 5번의 메이저와 통산 54승의 PGA투어 우승 전적을 쌓았다. 인간 승리의 상징인 벤 호건은 PGA투어 통산 63승에 메이저 9승을 기록했고 사상 두 번째로 그랜드슬램을 달성했다.

60~70년대 TV시대의 스타 3인방: ‘미국의 3인방’으로 불리던 빅3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던 50년대 말에 강력한 카리스마를 가지고 등장한 골프 선수가 아놀드 파머였다. 그는 매스 미디어와 함께 대중 속에 파고들었다. 파머는 TV의 덕을 가장 크게 본 골퍼이자 미국 골프의 대중화에 기여한 스타였다.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골프 실력, 귀여운 동안, 타고난 입담과 유머감각, 파머는 대중에게 어필하는 스타성을 두루 갖추고 있었다. 애칭은 ‘아니’였고 그를 따르는 갤러리는 ‘아니군단(Arnie’s Army)’이라고 불렸다. 파머는 통산 60승의 PGA투어 우승에 메이저 7승을 달성했지만 그중에 PGA챔피언십 우승이 없다는 점이 아쉽다.

잭 니클라우스는 1960년 20살에 프로 데뷔했는데, US오픈에서 파머와 겨루면서 엄청난 비난을 받았다. 파머의 적수라는 것 때문이었다. 초창기에는 언론조차 그를 놀림감으로 다뤘다. 1962년 파머의 텃밭인 펜실베이니아 오크몬트에서 열린 US오픈은 그 절정이면서 새로운 빅3 시대의 서막이었다. 아니군단은 골프장 전체에 진을 치고 있었다. 니클라우스에 대한 야유는 하늘을 찔렸다. 매치플레이처럼 피 말리는 타수 싸움을 하던 두 선수는 동타로 경기를 마쳤다. 다음 날 플레이오프 18홀을 마치고 마침내 니클라우스가 우승했다. 그리고 파죽지세로 우승을 이어나가면서 언론은 파머의 뒤를 이을 후계자로 니클라우스를 주목했다. 불과 26세인 잭 니클라우스는 1966년에 4대 메이저를 모두 차지하며 커리어 그랜드슬래머가 됐다. 이후 1986년까지 마스터스 6번, US오픈 4번, 브리티시오픈 3번, PGA챔피언십 5번 등 모두 18차례 메이저 우승이라는 경이적인 기록을 달성했다.

남아공의 게리 플레이어는 파머와 잭 사이에 생긴 격차를 깨고 삼각 구도를 형성한 또 하나의 축이었다. 1961년에 마스터스에서 파머를 이겼고, 1968년에는 브리티시오픈에서 니클라우스를 물리쳤다. 비행기도 흔치 않던 시절, 세계를 돌며 각종 대회에서 184승이라는 경이적인 승수를 올린 선수는 없었다. 플레이어는 남아공에서 세계 어디든 대회가 열리는 곳은 찾아다녀서 ‘가장 여행을 많이 한 선수’로도 기록됐다. 메이저 9승으로 진 사라센과 벤 호건에 이어 세 번째 커리어 그랜드슬래머가 되었다. 아놀드 파머, 잭 니클라우스, 게리 플레이어는 그렇게 60~70년대 TV시대의 골프 빅3로 자리잡았다. 혼자일 것 같지만 경쟁자가 나서고 다시 제 3의 선수가 나타나 어우러지는 일종의 ‘정-반-합’ 이 빅3의 생성 방식이었다.

우즈 이후 빅3 체제의 필요성: 1985년에 세계 6대 투어가 공동으로 세계골프랭킹이란 시스템을 만들었을 때는 독일의 베른하르드 랑어가 3주 간 세계 1위였다. 그러나 이내 호주의 백상어 그렉 노먼이 왕좌를 차지했다. 노먼은 무려 331주를 세계 최고의 골퍼 자리에 올랐다. 노먼 외에도 잉글랜드의 닉 팔도, 스페인의 세베 바예스테로스, 미국의 프레드 커플스 등이 세계 랭킹 1위에 올랐지만 어느 누구도 압도적이지는 못했다. 그 무렵인 1997년에 혜성처럼 등장한 스타가 바로 타이거 우즈였다. 그는 1997년 6월 22일 세계 랭킹 1위에 처음 오른 후 어니 엘스, 데이비드 듀발과 제위 쟁탈전을 하는가 싶더니 1999년 8월 15일부터 2004년까지 264주 간, 결혼과 부친의 장례식을 치르는 과정의 기간을 거쳐 다시 2005년 6월부터 2010년 10월까지 281주간을 세계 최고의 골퍼로 군림했다.

우즈가 부상으로 투어를 쉬던 기간은 군웅할거 시대였다. 메이저 우승이 없는 리 웨스트우드, 루크 도널드가 우승하기도 했고, 호주의 비제이 싱과 독일의 마틴 카이머와 호주의 애덤 스콧이 메이저 대회에서 우승하면서 세계 1위로 오르기도 했다. 하지만 지난 2014년 8월 13일부터 로리 매킬로이가 다섯 번째로 세계 1위에 재입성한 뒤로는 다른 그림이 그려지고 있다. 매킬로이는 1년 간이나 제위를 지키면서 브리티시 오픈과 PGA챔피언십을 잡았다. 지난해는 새로 떠오른 조던 스피스가 마스터스와 US오픈을 연달아 쟁취하면서 세계 1위에 올랐고, 하반기에는 제이슨 데이가 PGA챔피언십을 우승했다. 세계 랭킹 선두 경쟁은 이 세 선수 간의 선두 바뀜만 일어나고 있다.

지난해 스피스와 데이는 각각 5승씩을 올렸다. 매킬로이는 발목 부상으로 두 달여를 쉬었지만 이후 유러피언투어 파이널에서 우승하면서 유럽의 상금랭킹 1위에 오르며 건재함을 과시했다. 올해 초까지는 스피스가 앞섰다. 스피스는 지난 1월 열린 현대토너먼트에서 역대 최소타인 30언더파로 우승을 거뒀다. 하지만 이후 가진 빽빽한 스케줄로 지친데다 마스터스 마지막 날 12번 홀 쿼드러플 보기로 충격의 역전패를 당했다. 한동안 주춤하던 스피스는 지난 5월 말 딘&델루카인비테이셔널에서 4개월 만에 우승 레이스에 시동을 걸었다.

매킬로이는 이번 시즌 내내 들쭉날쭉했다. 지난해 유러피언투어 최종 전 DP 월드 챔피언십에서 우승한 후 반년 간 우승이 없었다. 지난 3월 WGC캐딜락챔피언십에서 선두로 출발했으나 대회를 마칠 때는 3위로 내려갔다. 노던트러스트오픈에서도 3일 내내 선두권이다가 20위로 마무리했다. 하지만 5월 23일 본인이 주최한 유러피언투어 아이리시오픈에서 우승하면서 메이저 사냥 준비를 가다듬고 있다. 현재 가장 앞선 이는 제이슨 데이다. 제5의 메이저로 불리는 플레이어스 챔피언십에서 와이어투와이어 우승을 거두는 등 올 시즌에만 벌써 3승을 거뒀다. 지난 3월 말부터 11주 간 세계 랭킹 1위를 굳건히 지키고 있다.

세 선수가 압도적인 1~3위 구도를 형성하고 있어 최근 2년 간 빅3인 건 사실이다. 하지만 이들이 후대에도 빅3로 기록될지는 아직 미지수다. 잭 니클라우스는 최근 자신이 주최하는 메모리얼토너먼트를 앞둔 기자회견에서 “세 명을 빅3라고 부르기엔 이른 감이 있다”고 지적했다. 니클라우스는 “리키 파울러나 버바 왓슨, 마쓰야마 히데키 등 다른 선수들도 잘하는데 미리 빅 3라고 못을 박는 것은 성급하다”면서 “우즈도 다시 우승할 수 있는 선수로 돌아올 것”이라고 여지를 남겼다.

그의 마지막 말에 방점이 찍힌다. 결국 타이거 우즈라는 수퍼스타가 없으니 그를 이어 골프붐을 이끌 대체할 체제가 필요한 것이다. 2008년 미국 금융위기 이후로 시들고 있는 골프 시장에 활기를 불어넣을 존재가 절실하다. 따라서 ‘빅3’는 뛰어난 선수들이 형성한 체제의 이름인 동시에 골프계가 외부 환경을 극복하려고 만들어내는 개념이기도 하다. 우즈 만한 영향력과 골프붐을 ‘빅3’라는 스타가 발휘하기를 바라는 희망의 표현이기도 하다.

- 남화영 [헤럴드스포츠] 편집장

1339호 (2016.0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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