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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수화로 배우는 풍경사진(8)] 화조화에 담긴 격물치지의 정신 

추상적인 산수화와 달리 사실성·묘사력 탁월 … 자연의 섭리부터 배워야 

주기중 기자 clickj@joongang.co.kr

▎한탄강의 두루미·재두루미.
'여우와 두루미’라는 이솝 우화가 있습니다. 어느 날 여우가 두루미를 집으로 초대해 식사를 합니다. 접시에 수프를 담아 두루미에게 먹으라고 권합니다. 여우는 맛있게 수프를 핥아 먹습니다. 그런데 두루미는 뾰족한 부리 때문에 먹을 수가 없었습니다. 화가 난 두루미는 다음에 여우를 집으로 초대했습니다. 두루미는 호리병에 수프를 담아서 여우에게 줍니다. 두루미는 기다란 부리를 넣고 맛있게 식사를 하지만 여우는 입이 뭉툭해 수프를 먹을 수가 없습니다.

이솝은 ‘여우와 두루미’ 우화를 통해 상대방에 대한 ‘배려와 존중’을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정말 두루미는 접시에 담긴 수프를 먹을 수 없을까요? 3년 전 겨울 두루미 사진을 찍으러 철원에 갔습니다. 철원은 들이 넓고 맑은 물이 흐르는 한탄강이 있어 천연기념물인 두루미와 재두루미가 시베리아에서 한반도로 날아와 월동하는 곳 중의 하나입니다. 이곳에서 경이로운 장면을 봤습니다[사진 1]. 언뜻 보면 몸을 납작 엎드려 충성맹세를 하는 것 같기도 하고 집단으로 프로포즈를 하는 장면 같기도 합니다.

자세히 살펴보니 재두루미가 물을 먹는 장면이었습니다. 평평한 얼음판 위에 고인 물을 먹기 위해 다리를 굽혀 몸을 낮춥니다. 그 다음 목과 부리를 평평하게 해서 바닥을 긁듯이 얇게 고인 물을 퍼먹습니다. 순간 이솝 우화 ‘여우와 두루미’가 생각났습니다. 두루미도 접시에 담긴 수프를 먹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식탁이 조금 지저분해 지겠지만…. 만약 이솝이 이 장면을 봤더라면 뭐라고 했을까요. 이솝은 겉모습만 보고 작가적인 상상력만으로 글을 쓴 것 같습니다.

정밀한 관찰정신 중시


▎겸재 정선의 ‘백로도첩’(왼쪽)과 현재 심사정의 ‘꽃과 나비-풀벌레 화첩’.
동양화에는 ‘화조화(花鳥畵)’라는 장르가 있습니다. 글자 그대로 ‘꽃과 새’ 등 자연계의 생물을 소재로 그린 그림입니다. 송나라 때는 화조화가 매우 발달했습니다. 화조화 화가들은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산수화와는 달리 가느다란 세필로 정교하고 사실적으로 그림을 그렸습니다. 이 시기의 화조화는 조류도감이나 식물도감을 보는 것 같습니다.

산수화는 ‘닮음’보다는 관념적인 정신세계를 표현하기 때문에 추상적인 표현이 많습니다. 화조화는 좀 다릅니다. 송대의 회화비평가인 곽약허는 도화견문지에서 “영모(翎毛, 새나 짐승의 그림)를 그리는 사람은 새의 형태와 각 부위의 명칭을 알아야 한다”고 주장하며 어느 하나라도 빠뜨려서는 안 된다고 말했습니다. 그만큼 대상에 대한 자세하고 정밀한 관찰정신을 중시했습니다. 예를 들어 모란꽃 그림을 보면 그걸 그린 시점이 아침인지 저녁인지 알아맞힐 정도로 사실성과 묘사력이 뛰어났다고 합니다.

예술은 시대정신을 반영합니다. 화조화의 사실주의적 전통은 송나라의 철학적 이념인 주자의 ‘격물치지(格物致知)’가 배경이 됐습니다. 격물치지란 대학에 나오는 말로 ‘어떤 사물을 철저하게 연구하고 분석해 그 이치를 깨닫는다’는 뜻입니다. 화조화의 전통은 조선시대에도 이어졌습니다. 조선의 화조화는 진경산수나 풍속화, 초상화 등 사실주의 화풍과 맥을 같이합니다. 붓질도 한층 더 성숙해지고 무르익었습니다. 꽃과 새를 비롯해 곤충, 물고기 등을 섬세하게 묘사하는 사실적 회화미가 돋보입니다.

겸재 정선(1676~1759)의 ‘백로도첩’, 현재 심사정(1707~1769)의 ‘꽃과 나비-풀벌레 화첩’이 대표적인 작품입니다[사진 2]. 또 신사임당을 비롯 단원 김홍도, 혜원 신윤복, 오원 장승업도 수준 높은 화조화를 남겼습니다. 이 그림들은 주로 사대부들의 감상용이나 장식용으로 사용됐습니다. 사대부들은 화조화를 그리거나 감상하면서 자신의 마음을 그림 속 대상에 빗대기도 했습니다. 그림에 뜻을 부치고, 마음을 담는 ‘우의(寓意)와 서정(敍情)’입니다. 예를 들면 백로는 청빈함과 장원급제를, 모란은 부귀, 석류는 다산, 매미는 청빈한 선비, 나비는 장수를 상징합니다.

‘고사관수도’로 유명한 서화가 강희안은 직접 화초를 기르며 원예서적인 [양화소록]을 쓰기도 했습니다. 예로부터 사람들이 즐겨 온 소나무·대나무·매화·국화 등 수십 종의 재배법을 담은 책입니다. 그의 글에는 대화가로서의 탐구정신과 함께 격물치지의 철학이 느껴집니다. 이 책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전문 원예서로 시중에도 번역본이 여럿 나와 있습니다. ‘천지 사이에 가득한 만물이 서로 연관되어 있음은 참으로 오묘하며, 저마다 나름의 이치가 있다. 이치를 잘 살피지 않으면 앎에 이르지 못한다. 비록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의 미물이라도 각각 그 이치를 탐구하여 근원으로 들어가면 지식이 두루 미치지 않음이 없고 마음을 꿰뚫지 못함이 없다. 그래서 나의 마음은 자연스럽게 사물과 분리되지 않고 만물의 겉모습에만 구애되지 않는다.’

아는 만큼 보인다


▎청계산의 산철쭉 꽃.
지난 봄 청계산을 올랐습니다. 가파른 고개를 넘느라 힘이 들어 잠시 숨을 고르느라 쉬었습니다. 근처에 분홍빛의 산철쭉 꽃이 피어 있었습니다. 꽃을 가만히 들여다 봤습니다[사진 3]. 꽃술을 보는 순간 나도 모르게 탄성이 나왔습니다. 자연의 섭리는 오묘합니다. 암술이 가운데 길게 나와 있고 주변에 10개의 짧은 수술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생김새가 남자의 ‘그것’과 꼭 닮았습니다. 그런데 암술은 왜 길게 삐쳐 나와 있을까요. 생물학자들은 이를 ‘근친상간’을 막기 위한 신의 배려라고 말합니다. 꽃을 수정하는 매개체는 나비와 벌입니다. 암술과 수술의 길이가 비슷하다면 같은 꽃에서 수정이 이루어질 확률이 높기 때문입니다.

‘아는 것만큼 보인다’는 말이 있습니다. 알면 알수록, 많은 것을 보게 되고 그만큼 더 좋은 장면을 찍게 됩니다. 최근 들어 새와 꽃 등 생태사진을 찍는 아마추어 사진가들이 늘었습니다. 좋은 사진을 찍기 위해서는 카메라 장비나 테크닉에만 집착할 것이 아닙니다. 대상을 연구하고 분석해 자연의 섭리를 깨닫는 격물치지의 정신을 배워야 할 것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자연을 사랑하는 마음입니다. 얼마 전 사진 구도에 맞지 않는다고 금강송 나뭇가지를 자른 사진가가 여론의 몰매를 맞고 있습니다. 기본의 문제입니다. 사진을 찍겠다고 자연을 훼손하는 일은 없어야겠습니다. 이는 하수들이나 하는 짓입니다.

- 주기중 기자 clickj@joongang.co.kr

1339호 (2016.0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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