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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컬트와인의 효시 ‘그레이스 패밀리 빈야드’의 딕 그레이스] 와인은 세상을 치유하는 촉매제 

알코올중독 극복 후 봉사활동에 취해 ... “와인처럼 부드러워지세요” 

이소아 기자 lsa@joongang.co.kr

희소성은 사람의 소유욕을 부채질한다. 와인 업계에선 ‘컬트와인’이 그렇다. 워낙 수량이 적으니 부르는 게 값이다. 와이너리마다 수천 명의 추종자들이 구매자 명단인 ‘메일링 리스트’에 오르기 위해 기존 회원의 사망과 파산을 바라며 대기하는 기괴한 풍경마저 연출된다. 가장 처음 컬트와인을 만든 사람은 이런 광풍을 예상했을까.

백발에 평화로운 얼굴. 5월 서울 장충동 신라호텔에서 만난 딕 그레이스(79)는 “컬트와인은 마케팅 업자들이 만들어낸 단어”라며 고개를 저었다. 그가 1976년 미국 나파밸리에 조성한 와이너리 ‘그레이스 패밀리 빈야드(Grace Family Vineyards)’는 컬트와인의 효시로 불린다. 세계적인 와인 전문지 ‘와인 스펙테이터’가 2000년 4월호에서 그의 포도 밭을 ‘캘리포니아 최초의 컬트와인의 개념을 발현시킨 와이너리’라고 언급했다.

1년에 생산되는 와인은 6000병. 나오는 즉시 고가에 팔리기 때문에 홍보가 필요없다. 그런데도 창립자가 세계를 돌며 와인 애호가들을 만나는 이유는 딱 하나다. ‘와인은 세상을 치유하는 촉매제’라는 소신을 알리기 위해서다. 그레이스는 1980년대 중반 알콜중독으로 죽을 수도 있다는 진단을 받은 후 30년 간 와인을 포함해 어떤 술도 입에 대지 않는다. 대신 ‘봉사’에 취해버렸다. 그는 매년 와이너리 수익금 대부분을 기부하고 있다. 돈으로만 하는 자선이 아니다. 그는 고령에도 1년에 4개월 이상 티벳·캄보디아·네팔 등지를 돌며 봉사를 실천하고 있다. 그에게 포도밭과 와인이란 봉사를 가능하게 해 주는 마르지 않는 ‘화수분’인 셈이다.

와이너리는 어떻게 만들게 됐나.

“난 잘 나가는 증권맨이었다. ‘바니 스미스’(모건 스탠리의 전신)에 근무했는데 수완이 좋아 돈을 많이 벌었다. 1976년 가족과 나파밸리로 여행을 갔는데 아이들에게 특별한 경험을 맛보게 하고 싶어서 1에이커(4047㎡·1224평)의 포도밭에 카베르네 쇼비뇽(포도품종) 눈접가지를 심었던 거다.”

양조장이 없었던 딕은 1978년에 수확한 포도를 유명한 와이너리인 케이머스에 맡겼다. 그리고 1981년 576병의 ‘케이머스 카베르네 쇼비뇽 그레이스 패밀리 빈야드 1978’이 완성됐다. 이 와인이 바로 컬트와인 1세대다. 딕은 82년부터 자신만의 와인인 ‘그레이스 패밀리’를 선보이기 시작했다. 80년대 나파밸리에서 포도밭 이름을 써 붙인 와인은 10개도 안 됐는데 ‘그레이스 패밀리 빈야드 카베르네 쇼비뇽 1983’의 가격은 25달러(2만9000원)로 당시 미국 와인으로는 최고가였다. 그레이스 패밀리 와인은 1985년 나파밸리 와인 경매에서 5병에 1만 달러(1190만원)에 낙찰됐고, 2006년 나폴리 와인 경매에선 12L짜리 2003년 빈티지한 병이 9만 달러(1억670만원)에 팔리기도 했다.

와인이 왜 높은 평가를 받는 건가.

“처음부터 최고의 와인 제조자들의 손을 거쳤다. 찰리 와그너, 개리 갤러론, 하이디 피터슨 바렛, 개리 부룩먼을 거쳐 현재 헬렌 케플링거까지 그들의 노력이 크다. 또한 나파밸리에서 가장 오래된 유기농 와이너리다. 제초제나 살균제를 사용해 본 적이 없다. 와이너리 이름에 ‘패밀리’란 단어를 넣은 것도 최초다. 모든 직원을 가족으로 여기고 지역 평균(12달러)보다 훨씬 높은 30달러의 시급과 의료보험을 제공한다. 실제로 40년 간 비자발적으로 회사를 떠난 직원이 1명도 없다. 이런 모든 요인이 합쳐진 결과 아닐까.”

맛은 어떤지.

“균형 잡히고 부드럽고 우아한 맛을 제일 중요하게 생각한다. 마치 우리 삶과 같다. 알콜 도수가 높고, 탄닌이 많아 떫은 맛이 강하고, 농도가 높은 걸쭉한 와인은 지양한다.”

그는 반쯤 차 있는 ‘그레이스 패밀리 카베르네 소비뇽’ 한 병을 들고 왔다. 나파밸리 현지 가격이 1병에 60만원 정도라고 했다. 한 잔을 시음해 보니 일반인에겐 낯선 열매향이 생생하게 느껴지면서도 금세 조화롭게 어우러지는 느낌이었다. 그 여운을 오래 느끼고 싶어 쉽게 다음 한 모금을 서두를 수 없는 맛이랄까. 그레이스 패밀리 빈야드에선 이 와인과 ‘그레이스 패밀리 블랭크 카베르네 소비뇽’ 총 2가지 와인만 만든다. 각각 2에이커(8094㎡)가 안 되는 포도밭에서 나오는 카베르네 쇼비뇽 품종 100%로 만드는데, 한국에는 나라셀라를 통해 수입되고 있다.

도대체 컬트와인이 뭔가.

“컬트라는 용어는 와인 저술가인 댄 버거(Dan Berger)가 80년대 중반에 처음 사용했다. 높은 품질, 높은 수요, 한정된 생산이 3대 요소다. 현재 컬트와인을 자처하는 와인이 수백 개가 넘지만 전문가 집단에선 우리를 포함해 ‘할란(Harlan)’ ‘스크리밍 이글(Screaming Eagle)’ ‘콜긴(Colgin)’ ‘브라이언트 패밀리(Bryant Family)’ ‘달라 발레(Dalla Valle)’ ‘아로호(Araujo)’까지 7개를 진정한 컬트와인으로 본다.”

그레이스 패밀리 와인의 코르크에는 ‘Be Optimistic(긍정하며 사세요)’란 문구가 새겨있다. 그는 와인을 통해 인류애를 퍼뜨리고 싶어했다. 알콜중독으로 삶의 의욕을 잃고 살던 1988년, 그레이스는 나파밸리와인 경매에 참가했다가 81년 첫 경매 수익금을 받았던 소년 앤소니를 만나게 된다. 앤소니가 경제적 지원 덕에 새 삶을 살게 된 이야기를 벅찬 감동으로 전했고, 그레이스는 그 날 이후 삶의 진정한 목적은 봉사에 있다고 믿게 됐다. 사람들이 열광하는 와인을 팔아 번 돈으로 어려운 사람들을 돕는 게 그의 일이다.

최근엔 어떤 활동을 했나.

“지난해 네팔 지진 이후 자체적으로 성금을 모아 복구활동에 필요한 목재와 생수를 사는 데 쓰도록 했다. 지진이 있기 전에 카트만두에 병원을 지었고 얼마 전엔 고아원도 열었다. 우리 와인 한 병 값이면 한달 동안 3명의 아이들이 음식·옷·집은 물론 교육까지 받을 수 있다. 아이들이 굶은 채 잠자리에 드는 건 변명할 수 없는 잘못이다. 정의롭지 않은 것을 지나치면 우리도 그 일부가 된다. 인간은 본래 연민과 친절을 갖고 태어났지만 정치와 경제제도가 우리를 본성으로부터 멀어지게 한다. 6월은 캄보디아에서 봉사를 하며 보낼 생각이다.”

와인이란 술 자체는 봉사와 관계가 없는 것 아닐까.

“그렇지 않다. 와인은 취하려고 소비하는 술이 아니라 남과 소통하기 위해 나누는 술이다. 와인은 우리를 더 인간답게 한다. 한 입에 털어버리는 독주와는 생겨난 목적 자체가 다르다. 어떤 음료보다도 역사적 중요성을 지녔고 공통체 속에서 더 중요성을 지닌다. 생각을 교류하고 느린 삶에 대해 생각하게 하는 것이 와인이다.”

불교에 입문한 그는 한국인이 사람에 대한 연민, 중도와 여유의 미덕을 이해하는 국민이라고 말했다. 다만 대부분의 나라와 마찬가지로 물질적 가치만을 추구하며 달리는 경주마처럼 강요당하는 삶을 안타까워했다. 그는 “인간성을 상실하며 무언가를 얻어 내면 결국 그것을 잃어버릴까 불안해하며 살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미국 정치에 대해서도 “미국 중산층은 먹고 살기가 너무 어려워져 물질적인 웰빙을 놓치지 않으려는 것에만 관심을 갖게 됐다”며 “그런 불안 심리를 파고들어 큰 지지세력을 만들어 낸 것이 도널드 트럼프”라고 말했다. 그는 “자기 내면에 있는 친절과 연민은 이웃과 노숙자에게 인사를 건네는 작은 실천에서부터 시작된다”면서 작별 인사를 건넸다. “부디 와인처럼 부드러워지세요(Be gentle like wine)”.

- 이소아 기자 lsa@joongang.co.kr

컬트와인(Cult Wine): 소량 생산되는 고품질 와인. 숭배를 뜻하는 라틴어 ‘cultus’에서 유래한 말로 1980년대 초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처음 등장했다.

1339호 (2016.0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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