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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수화로 배우는 풍경사진(11)] 그러한 줄 모르게 저절로 그렇게… 

산수화엔 자연의 기운, 인물화엔 정신적 기질 중요 … 기본기 닦고 내공 쌓아야 

주기중 기자 clickj@joongang.co.kr

▎기원, 2015, 지리산 노고단
동양화 이론에서 자주 언급되는 용어가 있습니다. ‘기(氣)’라는 개념입니다. 사전적 의미는 ‘활동하는 힘’을 말합니다. 동양철학에서는 ‘이(理)’에 대응하는 개념으로 ‘만물 생성의 근원이 되는 힘’을 뜻합니다. 만물의 존재는 기가 모이고 흩어지는 데 따라 결정된다는 이론입니다. 그 출발은 노자와 장자로 우주의 생성 변화를 기의 현상이라고 한 데서 비롯됩니다.

하늘의 기운(天氣)과 땅의 기운(地氣)을 받아 생명이 탄생하고 자랍니다. 대자연의 기운을 호연지기(浩然之氣)라고 합니다. 사람도 예외가 아닙니다. 생명을 피의 순환으로 풉니다. 그래서 혈기(血氣)라는 말이 나왔습니다. 또 기분(氣分)·기품(氣品) 등의 말에서 보듯이 기는 어떤 존재의 보이지 않는 힘을 의미합니다.

미학용어로서의 기는 동양에만 있는 개념입니다. ‘세한도’로 유명한 추사 김정희는 그림에서 유독 ‘서기(書氣)’를 강조했습니다. ‘글의 기운’이라는 뜻입니다. 그림에 앞서 먼저 학식을 갖춰야 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이를 사기(士氣, 선비의 기운), 또는 권기(券氣, 책의 기운), 문자향(文字香)이라고도 합니다. 추사는 후학들에게 겸재 정선의 그림에는 “서기가 없다”며 가까이 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습니다. 조선 최고의 천재 화가를 서기가 부족하다고 비판한 것입니다. 그만큼 그림에서 우러나는 기를 중시했습니다. 이때부터 조선시대의 산수화는 사실성보다 추상성이 강조됩니다.

기(氣)는 동양미학의 최고의 경지

기는 중국 육조시대의 화가 사혁(謝赫, 500~535년경 활동)의 저서 [고화품록(古畵品錄)]에 본격적으로 등장합니다. 그는 그림을 그리는 여섯 가지 법칙, 즉 육법(六法)을 이야기했습니다. 그 첫째가 기운생동(氣韻生動)입니다. 산수화에서는 자연의 기운이, 인물화에서는 정신적인 기질이 나타나야 좋은 그림이라는 뜻입니다. 둘째는 골법용필(骨法用筆)로 붓질에는 힘이 있어야 합니다. 셋째 응물상형(應物象形) 입니다. 그림은 실제와 닮아야 한다는 사실성을 뜻하는 개념입니다. 넷째는 수류부채(隨類賦彩)로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색이 있으며 이를 사실적으로 표현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다섯째는 구도의 개념인 경영위치(經營位置), 여섯째는 회화전통의 계승을 뜻하는 전이모사(傳移模寫 )입니다. 이는 수 천년 동안 동양화의 지침이 돼 왔으며 중국과 한국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기운생동을 제외하면 그림에서 기술적이고, 기능적인 것들입니다. 화가로서 오랜 기간 동안 훈련하면 이룰 수 있는 것입니다. 기운생동은 좀 다릅니다. 기는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보이지 않는 것을 형상화하는 것이 가장 어렵습니다. 이는 동양미학에서 최고의 경지를 뜻하는 말입니다.

사진도 예외가 아닙니다. 좋은 풍경사진을 보면 장엄한 대자연의 기운에 전율이 일기도 합니다. 또 자연의 맑고, 깊은 기운이 느껴지는 사진은 우리에게 명상의 시간을 갖게 합니다. 밝은 기운의 사진은 일상에 찌든 몸과 마음을 기분 좋게 치유해 주는 비타민이 되기도 합니다. 아름답고, 화려하고, 신기하고, 색감이 풍부하다고 해서 기운이 느껴지는 것은 아닙니다. 미의식은 사람마다 다릅니다. 풍경사진에서 아마추어들이 흔히 저지르는 실수는 아름다움의 최대공약수를 뽑으려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프레임 안에 이것 저것 너무 많은 요소를 집어 넣게 됩니다. 나의 사진을 찍어야 하는데 억지로 꾸미는 ‘남의 사진’을 만들려고 합니다. 당연히 주제가 흐려지고 구도가 무너집니다.

아름다움은 겉으로 드러난 껍데기에 불과합니다. 본질이 중요합니다. 중요한 것은 자연이 품고 있는 정신입니다. 이는 꾸밈으로 해결되는 않는 직관의 영역입니다. 풍경을 보며 번쩍하고 떠오르는 영감에 충실해야 합니다. 비움으로 상상력을 자극하고, 단순함으로 주제를 부각시켜야 자연의 기운이 살아 있게 됩니다. 사각형의 프레임을 가진 사진은 취사선택이 매우 중요합니다. 채우는 것보다 버리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버릴 때는 과감해야 합니다. 사진은 뺄셈의 미학이기 때문입니다. 좋은 사진의 핵심은 사진을 구성하는 요소를 하나로 보이게 하는 것입니다.

중국 송대의 화가 곽약허는 “기운은 배울 수 있는 것이 아니다(氣韻非師)”라며 이렇게 말합니다. “육법의 정론은 만고 불변이다. 그러나 골법용필 이하 다섯 가지는 배울 수 있지만 그 기운 같은 것은 반드시 태어나면서부터 아는 것이니, 진실로 교묘한 재주로도 얻을 수 없고 또한 세월로도 이룰 수 없으며, 말 없는 가운데 마음으로 깨달아 그러한 줄 모르는 가운데 그렇게 되는 것이다.”

당나라 시대의 화가 형호(荊浩)도 [필법기(筆法記)]에서 ‘기와 운’을 이렇게 풀어냅니다. “기란 마음이 붓을 따라 움직여 상을 취하는 데 미혹함이 없는 것이다, 운이란 필적을 숨기고 형상을 세워 모습을 갖추는 데 속되지 않은 것이다.”

“기운은 배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곽약허는 깨달음을, 형호는 자연스러움을 강조합니다. 두 화가의 말을 종합해보면 ‘기’라는 것은 애써 꾸미지 않아도 저절로 우러나는 그림의 ‘내공’이 아닌가 합니다. 기운생동이 육법의 첫 번째고 배워서 되는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나머지 다섯 가지 법칙이 완성 단계에 이를 때 비로소 기가 나타나는 것이 아닐까요.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회화의 기본기를 탄탄하게 갖춰야 합니다. 종이가 산을 이루고, 물감이 강이 될 정도로 수련을 거쳐야 합니다. 산수화의 기는 오랜 훈련을 거치고 내공이 무르익은 상태라야 가능한 최고의 경지입니다. 대자연의 섭리를 깨우치고, 형상에 마음을 담을 수 있을 때 비로소 기운생동을 이야기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진 역시 기본을 다지는 일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사진의 테크닉을 많이 익히면 익힐수록 표현할 수 있는 영역이 훨씬 더 크고 넓어집니다. 카메라를 내 수족처럼 부릴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짧은 시간이지만 풍경에 압도당하지 않고, 풍경을 재해석하는 여유를 갖게 됩니다. 지금 자신의 사진이 부족하다고 조바심을 가질 필요는 없습니다. 기라는 것은 의식하면 할수록 멀리 도망가는 묘한 개념입니다. 곽약허의 말처럼 기는 ‘그러한 줄 모르게 저절로 그렇게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1345호 (2016.0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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