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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록으로 본 조선시대의 지진] 지진 공포에도 중종은 한밤중까지 회의 

구제책 시행하고 정책 재점검... 영의정·우의정은 사직상소 올려 

김준태 역사칼럼니스트

▎일러스트:김회룡 aseokim@joongang.co.kr
1518년(중종13) 5월 15일 유시(酉時, 오후 5시~7시). 한양에 큰 지진이 일어났다. ‘그 소리가 마치 성난 우레 소리처럼 커서 말이 모두 놀라 피하고 담장과 성가퀴(성 위에 낮게 쌓은 담)가 무너지고 떨어졌으며, 도성 안 사람들이 어쩔 줄 몰라 당황하여 제 집으로 들어가지 못한 채 밤새도록 노숙하였다. 노인들이 말하기를 지금껏 없던 일이라 하였는데, 팔도(八道)가 다 마찬가지였다.’ 서울뿐만 아니라 전국적으로 대형 지진이 발생했던 것이다.

이에 중종은 즉시 조정 대신들을 소집하고 “요즈음 한재가 심한데 이제 또 지진이 있으니 심히 놀라운 일이다. 재앙은 헛되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요 반드시 연유가 있는 것인데, 내가 어둡고 미련해서 그 연유를 알지 못하겠노라”며 지진의 원인과 대응 방안에 대한 의견을 물었다. 그런데 회의 도중에 다시 지진이 크게 일어난다. 실록에 따르면 임금이 앉아 있던 용상이 ‘마치 사람의 손으로 밀고 당기는 것처럼 흔들렸다’고 한다(중종13.5.15).

“재앙은 반드시 연유가 있는 것인데…”

계속되는 지진에 공포를 느끼면서도 회의는 한밤중이 되어서야 파했다. 대간을 비롯해 실무관료들의 의견까지 수합한 조정은 이튿날 아침 곧바로 후속조치에 돌입한다. 중종이 자책교서를 내리고 구언(求言, 국가의 중대사에 관하여 널리 의견을 청취하는 것)을 실시했으며, 지진으로 피해를 입은 백성들에 대한 구제책을 시행했다. 조정의 정책들을 다시 한 번 점검하여 혹시라도 잘못된 점이 없었는지를 토론했다. 그리고 영의정 정광필과 우의정 안당이 지진에 대한 책임을 지겠다며 사직상소를 올렸다(중종13.5.16).

‘어제 일어난 지진은 근래에 없던 일로서 하늘이 경계(警戒)를 보이신 것이지 헛되이 일어난 것이 아닙니다. 전하께서 ‘억울하게 죄를 받은 이가 있는 것인가?’라 하셨으나 이뿐만이 아닐 것입니다. 조정이 숭상하고 추구하는 것, 조정에서 사람을 쓰는 것이 올바름을 잃었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거듭 생각해보건대 이는 필시 신이 재상으로서의 소임을 다하지 못한 탓이오니 청컨대 신을 해직하여 주소서.’(정광필)

‘어제 밤새도록 네 차례나 지진이 일어났으니 실로 일찍이 없던 변괴입니다. 대저 정승을 두는 것은 중대한 일인데, 신과 같이 선하지 못한 자가 자리에 있으니 재변을 부른 것입니다. 속히 신의 직책을 해임하시고 물망(物望) 있는 사람을 택하여 제수하소서.’(안당)

이처럼 지진이 발생했을 때 정승들이 사직 의사를 밝힌 것은 비단 이 때문만이 아니었다. 성종 조에 지진이 일어나자 영의정 윤필상이 자신을 해임해달라는 상소를 올렸고(성종24.2.10), 광해군 때도 당시 영의정 이덕형이 ‘근래 재변이 거듭 나타나고 있는데 오늘 새벽의 지진의 경우 역사적으로도 드문 것이었습니다. 땅은 본래 고요히 안정되어 있는 것인데 그만 이런 재변이 생기면서 맹렬한 우레보다도 크게 진동하였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놀란 눈으로 서로를 쳐다볼 뿐 그 이유를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국가가 이렇듯 전에 없던 변고를 당하고 있는 만큼 재이(災異)를 해소시킬 방책이 있다면 무엇이든 쓰지 않는 것이 없어야 할 것입니다’(광해5.5.29)라고 사직소를 제출하는 등 재상으로서 지진의 책임을 지는 것을 마땅한 도리로 여겼다.

인간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자연재해를 하늘의 경고로 여기고 또 여기에 대하여 책임을 진다고 하는 것은 정말로 하늘이 어떤 의지를 가지고 직접 신호를 보냈다고 생각해서가 아니다. 천재지변조차도 임금의 잘못이고 재상의 과오라는 심리적인 제약을 둬서 어쩔 수 없다고 생각되는 일, 언제 일어날지도 모르는 일에 대해서까지 철저히 대비하고 무한한 책임의식을 갖겠다는 자세인 것이다.

그런데 수재(水災)나 한재(旱災)와 같이 어느 정도 예측이 가능하고 점차적으로 상황이 진행되는 재난에 대해서는 사전예방과 준비를 통해 피해를 줄였던 것과는 달리, 어느 날 갑작스레 예상하지 못했던 곳에서 발생하는 지진의 경우, 조선 조정 역시 뾰족한 방법이 없었던 것 같다. 앞서 소개한 “사람들이 모두 놀란 눈으로 서로를 쳐다볼 뿐 그 이유를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라는 이덕형의 말이나 “근래에 지진이 있었는데 신 등은 매양 재변을 그치게 할 방도를 생각하였으나 아직 요령을 얻지 못하였나이다”라며 사직소를 올린 영부사(領府事) 김수동의 말이 이를 대변한다(중종6.10.4).

그럼에도 조선의 위정자들은 나름의 노력을 다하고자 했다. 보기 드문 지진이라며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고 탄식하면서도, 지진을 예측하고자 노력했고(세조2.11.8) 지진이 발생하면 상해를 입은 사람을 각별히 돌보고 신역과 환곡을 경감해주었으며 해당 고을 수령이 지진에 놀란 백성들을 위무해주도록 하는 등 즉각적인 구제조치에 나섰다(순조10.1.27). 국지적으로 일어난 지진이라 하더라도 왕이 나서서 직접 지진의 피해상황을 점검하고 대책을 지시했고(중종13.5.17), 평소 ‘절약에 힘쓰고 저축이 고갈되지 않도록 하여 만일을 대비한 자금으로 삼고’ 재난이 발생하면 ‘각기 상황에 따라 구제하는 방책을 달리하며’ ‘시급하지 않은 일들을 모두 중단하여 백성들의 힘을 비축해야 한다’며 구제시스템을 확립했다(중종20.7.19). ‘재앙은 하늘에 의하여 빚어지는 것이나 그 재앙을 구제하는 방법은 사람에게 달려 있으며, 하늘에 의하여 빚어지는 것은 어찌할 수 없더라도 사람에게 달려 있는 것은 진실로 늦출 수 없다’며 재난에 대응하는 공직자들을 마음가짐을 강조한 부분도 기억할 필요가 있다(세종17.3.4.).

“재앙을 구제하는 방법은 사람에게 달려 있다”

최근 경주에서 발생한 지진으로 인해 온 국민이 충격을 받았다. 더 이상 우리나라도 ‘지진 안전지대’가 아니라는 말이 나온다. 그런데 조선왕조실록을 살펴보면 원래 우리나라는 지진이 익숙한 곳이었다. 실록에서 한자로 ‘地震’을 검색할 경우 총 1,899건이 나온다. 더욱이 주목할 만한 것은 세종조 141건, 중종조 464건, 명종 343건, 숙종 221건 등 지진이 특정한 시기에 집중되었다는 점이다. 특히 중종조의 경우, 조선의 전체 지진 발생 건수의 1/4을 차지한다. 발생지역도 서울을 비롯하여 전국 팔도에서 빠짐없이 일어났다. 요컨대 우리나라 역시 지진이 빈번하게 일어나는 시기가 있고, 그 시기가 오면 어느 지역이든지 언제고 지진이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을 실록이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지진에 철저히 대비해야 한다는 것은 우리의 자명한 과제인데, ‘구언을 통해 정치의 잘잘못을 확인하고 임금이 반성하며 재상이 책임을 지고 사퇴하는’ 조선의 방식 역시 무시해서는 안 된다. 갑작스럽게 닥치는 재난 앞에서도 효과적으로 대처하기 위해서는 평소 위기관리 대응력과 복원력(corporate resilience)을 키우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고, 이런 의미에서 정치에 완벽을 기하는 것이야말로 뻔한 이야기지만 최선의 방법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야 예상치 못한 사태가 터져도 망설이지 않고 신속하게 대응할 수 있는 힘을 갖추게 되기 때문이다.

1353호 (2016.1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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