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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행권 vs 공정위 표준약관 갈등] ‘손톱 밑 가시’ 빼기냐 은행 밥그릇 챙기기냐 

 

한애란 기자 aeyani@joongang.co.kr
공정위 “가압류만으로 기한이익상실 못 해”... 은행권 “대출 리스크 더 커진다”

시중은행이 공정거래위원회가 개정한 기업여신거래 관련 표준약관을 받아들이지 못하겠다며 반발하고 있다. 공정위가 정한 표준약관을 은행권이 거부하는 건 이례적인 일이다. 4년 만에 무혐의로 끝났던 공정위의 은행권 양도성예금증서(CD) 금리 담합 사건처럼 양측의 갈등이 고조될 가능성이 있다.

공정위는 10월 19일 기업용 은행여신거래기본약관 중 기한이익상실 관련 내용을 개정했다고 발표했다. 핵심은 약관의 제7조 1항에 있는 기한이익상실의 사유였다. 기존 약관에선 ‘1. 제 예치금 기타 은행에 대한 채권에 대하여 가압류·압류명령이나 체납처분 압류통지가 발송된 때’라고 사유를 명시했지만 개정된 약관에선 ‘가압류’가 빠졌다. 대신 ‘1. 은행에 대한 예치금 등 각종 채권에 대하여 압류명령이나 체납처분 압류통지가 도달한 때’로 바꿨다. 한마디로 가압류만으로는 대출의 기한이익을 상실할 수 없고, 법원의 본압류 명령이 있어야만 한다는 뜻이다.

은행권의 표준약관 거부는 이례적

기한이익상실이란 대출금이 만기가 되지 않았더라도 은행이 자체 판단에 따라 원리금을 회수하는 조치를 말한다. 지금까지 예금 가압류는 대표적인 기한이익상실 사유였다. 채권자로부터 은행 예금에 대한 가압류가 들어오면 은행은 별도 통지 없이 해당 고객의 대출계좌의 기한을 무효화하고 고객의 예금 잔액으로 대출원리금을 상계했다. 은행 입장에선 가압류로 자칫 대출금을 회수 못할 수 있는 상황에서 효과적으로 채권을 회수하는 방법이었다.

공정위가 이러한 약관을 바꾸겠다고 나선 건 가압류만으로 기한이익을 상실시키는 게 중소기업이나 소상공인에게 불리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가압류는 추측 정도의 심증만으로 집행될 수 있는 임시적인 보전 절차다. 실제 전국 법원의 가압류 인용률이 90.27%(2002~2014년 평균)에 달할 정도로 법원은 가압류를 쉽게 받아들인다. 중소기업 입장에서는 거래관계에 있는 누군가가 예금계좌에 가압류를 신청했다는 이유만으로 은행의 대출 원리금을 즉시 갚아야 한다면 예측하지 못한 갑작스런 자금난에 처할 수 있다. 이 경우 자칫하면 건실한 중소기업이나 소상공인도 도산 등 위기에 내몰릴 수 있다는 게 공정위의 시각이다. 이런 이유로 가압류만으로는 기한이익을 상실할 수 없고, 반드시 은행이 기한이익상실에 관한 통지를 고객에게 하도록 약관을 바꿨다.

공정위는 법원의 본압류 명령이 떨어진 후 기한이익상실이 되는 시점도 이전보다 뒤로 미뤘다. 이전엔 압류 명령 통지를 법원이 발송하면 그때부터 가능했지만 앞으로는 통지서가 은행에 도달한 이후로 시점을 늦추도록 표준약관을 바꿨다. 이전 약관대로 하면 은행은 다른 채권자들이 압류명령 통지서를 받기도 전에 미리 고객의 예금으로 대출금을 상계할 수 있었다. 이 때문에 제3의 채권자들이 예금계좌를 압류하려고 했을 땐 계좌엔 잔고 없이 껍데기만 남아있곤 했다. 공정위의 개정된 표준약관 대로 하면 은행은 다른 채권자들과 고객 예금을 채권 비율대로 나눠서 가져가야 한다. 예컨대 압류명령이 떨어진 예금 잔액이 1억원인데 은행 대출금이 1억원, 채권자 A의 채권이 5000만원, 채권자 B가 5000만원이라고 하자. 기존엔 은행은 예금계좌의 가압류 또는 본압류명령 통지의 발송만으로 예금 1억원을 모두 대출금 상계에 쓸 수 있었다. 하지만 앞으로는 압류명령 통지서가 도달된 후에 1억원을 다른 채권자들과 비율대로 나눠 가져야 한다. 따라서 은행이 회수할 수 있는 금액은 채권 비율인 50%에 해당하는 5000만원으로 줄어든다.

이러한 기한이익상실 관련 약관 개정은 올 초 국무조정실 민관합동규제개선추진단에서 ‘손톱 밑 가시’ 4차 과제로 추진해 온 것이다. 은행들은 이러한 개정 움직임에 줄곧 반대 입장을 펼쳐왔지만 결국 은행 측 입장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가압류로 대출금을 만기 전에 회수하는 것은 선진국 은행도 마찬가지이고, 대법원도 판례로 인정하고 있다는 게 은행 측 주장이다. 한 시중은행 관계자는 “일본이나 독일 등 해외 선진국도 별도 통지 없이 가압류로 기한이익을 상실하고 있지만 논란이 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없다”면서 “은행의 우선 변제권한을 인정해주지 않는다면 은행은 예금·적금이 많은 고객이라고 해도 담보 없이는 대출을 해주지 않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은행 입장에서는 개정된 약관 대로 하면 대출에 따른 리스크가 커지기 때문에 이를 회피하기 위해 대출금리를 높이거나 담보를 더 요구하는 식의 부작용이 나타날 거란 얘기다.

예금이 압류되는 고객 입장에서도 딱히 좋아질 게 없다고 지적한다. 예금만으로는 대출금 회수가 어려워진 은행들이 고객의 자산에 대한 압류 소송을 더 활발하게 제기할 가능성이 있어서다. 이런 소송 때문에 발생하는 비용은 모두 차주가 부담해야 한다.

은행 관계자들은 표준약관 개정안을 두고 몇 차례 만나 대책 회의를 열었다. 은행의 여신거래기본약관을 그대로 따서 써왔던 제2금융권도 함께 만나 대응방안을 모색했다. 현재까지는 기존 약관을 고치지 않고 그대로 쓰겠다는 입장이다. 표준약관은 법률이 아닌 일종의 행정지도 형태다. 은행이 이를 반드시 따라야 할 의무가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동안은 법 개정에는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표준약관을 먼저 개정해 제도를 개선해오는 게 일반적이었다. 금융권은 규제산업이라는 특성상 표준약관을 잘 준수해왔다. 지금 같은 표준약관 보이콧은 이례적이다. 은행들은 소송도 불사하겠다는 강경한 입장이다. 한 은행권 관계자는 “만약 공정위가 개별약관을 고치라는 식의 공문을 보내거나 하면 그땐 소송으로 갈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고객 자산에 대한 압류 소송 늘 수도

공정위는 신중한 입장이다. 공정위 관계자는 “표준약관 대로 개별약관을 바꾸라고 공정위가 강제할 순 없다”면서 “대신 ‘권장처분’을 해서 개별약관에 표준약관과 다른 점을 구체적으로 표시하게 하는 방법은 있다”고 설명했다. 공정위는 실제 은행을 비롯한 금융회사들의 움직임을 지켜본 후 이러한 권장처분을 할지 안 할지를 결정할 계획이다.

이번 표준약관을 둘러싼 갈등은 CD금리 담합 사건의 2라운드 격이다. 공정위는 2012년 7월 시중은행의 CD금리 담합 의혹에 대한 직권 조사에 착수했지만 무려 4년이나 끌다가 지난 7월 증거 불충분으로 ‘심의절차 종료’를 결정했다. 공정위 심사관은 은행의 CD금리 담당 직원들의 카카오톡 대화 내용 등을 증거로 제시했지만 공정위 전원회의는 이를 담합의 증거로 보지 않았다. 담합으로 판정될 경우 은행과 예금·대출 고객에게 미치는 영향이 큰 사안이어서 사회적 관심이 컸지만 결국 공정위가 체면을 구기고 말았다. ‘경제검찰’로 불리는 공정위와 시중은행의 줄다리기가 이번엔 어떻게 결론이 날 지 관심거리다.

1358호 (2016.1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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