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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헌의 경제에 비친 세상 읽기 (4)] 닮은 듯 다른 2008년 국정원, 2016년 안종범 

 

김수헌 글로벌모니터 대표
MB 당선 직후 30대 그룹 대상 투자계획 조사 vs 비선 실세에 휘둘려 기업 대상 강제 모금 의혹

▎사진:중앙포토
이명박 전 대통령은 ‘경제 대통령’이 되고 싶어했다. 2007년 12월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되자마자 그는 “기업인들을 만나 투자를 많이 하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래서인지 그는 당선 이후 첫 공식 방문 기관으로 전국경제인연합회를 선택했다.

서울 여의도 전경련회관에서 주요 그룹 총수들과 회동(12월 28일)하기 며칠 전이었다. 당선자 대변인은 “대기업들이 수십조원이 넘는 투자 가능 자금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투자를 꺼리거나 해외로 투자하고 있다는 게 당선자의 생각”이라고 전했다. 그는 “투자를 주저하는 이유를 파악하기 위해 앞으로 허심탄회한 대화를 계속할 것”이라고 말했다. 회동을 앞둔 기업 관계자들의 반응은 미묘했다. “좋게 해석하자면 기업들이 투자하기 좋은 환경을 만들겠다는 이야기이죠. 조금 삐딱하게 풀어보면 투자를 늘리지 않으면 앞으로 손 볼 수도 있다는 이야기 아니겠습니까.”

당시 회동에는 이건희 삼성그룹, 정몽구 현대차그룹, 구본무 LG그룹, 최태원 SK그룹,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 등 주요 그룹 총수 21명이 참석했다. 정몽구 회장은 간담회 참석 전 기자들에게 “제철소 건설과 자동차 개발 등 그룹 전체로 내년 11조원을 투자할 것”이라며 바람잡이 역할을 했다. 회동에서 총수들은 기업 규제 정비, 노사관계 선진화 등을 요청했고, 당선자는 이를 약속하며 투자 확대에 노력해 달라고 말했다.

투자 늘리지 않으면 앞으로 손 보겠다?

그로부터 한달쯤 지난 2008년 1월, A그룹 기획실에 국가정보원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설문조사 e메일을 보낼 테니 답변을 성의껏 작성해 달라는 요청이었다. 잠시 후 날아온 e메일에는 10여개의 질문이 담겨 있었다. 올해 A그룹 투자와 고용 계획을 관련 자료와 함께 달라는 요구였다. 새 정권 출범을 앞두고 난데없이 국가정보기관이 기업들의 투자계획 조사에 나선 것만 해도 움찔할 일이었다. A그룹이 특히나 곤혹스러웠던 것은 설문 내용 중 어이없는 한 문항 때문이었다. 지난해 투자·고용 실적과 올해 계획, 대형 투자계획의 경우 투자 규모와 고용유발효과 등을 밝혀 달라는 것까지는 괜찮았다. 얼마 정도 투자하겠다는 계획을 적어내면 그만이었다. 그런데 이명박 당선자와 총수 간 면담을 전후해 투자계획이 늘었는지 여부를 묻는 질문에 가서 A그룹 관계자들은 적잖이 당황했다고 한다. 한마디로 국정원이 당선자 관심사안인 투자 확대 여부를 확인하는 작업에 나선 것이다. 30대 그룹이 모두 국정원으로부터 이 같은 내용의 e메일을 받았다.

변한 것이 없다고 하자니 ‘관찰대상기업’으로 찍힐 것 같고, 회동 후 투자계획을 확대·수정했다고 답하자니 거짓말을 해야 될 판이었다. 결국 며칠 후 사달이 났다. 대통령직인수위원회가 국정원에 발끈한 것이다. 국정원은 일부 대기업에게 이 설문조사가 인수위의 요청에 따라 진행되는 것이라고 배경설명을 했다. 차기 정권의 청와대를 구성할 인수위 하명을 받아 국정원이 설문조사를 한다 하니 기업으로서는 없는 투자도 당장 만들어 내야 할 판이었다. 그러니 밖으로 소문이 안 날 리 없었다. 언론에 기사가 나자, 인수위가 서둘러 해명에 나섰다. 인수위 관계자는 “국정원에 이런 걸 조사하라고 지시한 적이 없다”며 “대기업 중 한 곳으로부터 인수위가 실제 요청한 것이 맞는지 확인하는 전화를 받았는데, 국정원이 인수위를 사칭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국정원이 인수위를 사칭했다는 것은 거의 코미디처럼 들렸다.

인수위 사칭 반박에 “핵심 인사 지시였다” 얼버무려

국정원은 이를 순순히 인정하지는 않았다. 국정원은 “인수위의 한 핵심 인사 지시에 따른 것”이라고 얼버무렸고, 이 일은 금세 유야무야 처리됐다. 국정원의 비공식 해명이 사실이라면, 당선자 회동 전후 기업의 투자 확대 여부를 파악하겠다는 발상을 한 핵심 인사가 과연 누구였는지 참으로 궁금하다. 국정원을 움직여 투자동향을 알아보라는 지시를 그에게 내린 또 다른 누군가가 있었는지도 궁금하다.

그로부터 8년이 지났다. 청와대 수석이 이른바 최순실 재단으로 불리는 K스포츠재단과 미르재단 자금을 모으려 기업체 ‘삥’을 뜯으러 다닌 것으로 드러났다. 직접 기업에다 전화질을 하는 등 수백억원의 강제 모금을 지휘한 행각이 까발려지고 있다. 폭로자를 회유하려 대포폰까지 사용했다고 한다. 2008년 당시 국정원의 행동은 그래도 조금은 선량했다는 생각마저 든다.

재단에 기부한 기업들은 문화·스포츠 발전에 기여하기 위해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했을까. 이들이 그렇게 짧은 시간에 거액을 내야만 했던 이유는 재단 뒤에 어른거리는 청와대의 그림자를 보았기 때문이다. 이들에게 재단 기부금은 일종의 ‘정치자금 제공’과도 같았을 것이다.

잠깐 화제를 돌려, 딱딱한 회계 이야기를 한번 해보자. 우리는 일상에서 자산을 재산과 거의 같게 생각한다. 하지만 기업 회계로 들어가면 좀 다르다. 회계에서 말하는 ‘자산’의 정의는 이렇다. ‘미래에 회사에 경제적 효과나 이익을 가져다 줄 가능성이 큰 것으로서, 그 취득원가를 신뢰성 있게 측정할 수 있는 것’. 회사에 미래 경제적 대가를 유입시킬 수 있다면 자산의 성격이 있는 것으로 간주한다.

예를 들어보자. 호떡장수가 밀가루장수에게 “일주일 후 밀가루 두 포대를 갖다 달라”며 밀가루 값 5만원을 선지급했다. 호떡장수는 장부에 이 거래를 어떻게 기록해야 할까. 대부분 사람들은 재료 매입 비용 5만원이 발생한 것으로 생각할 것이다. 회계에서 이 선급금 5만원은 자산으로 처리한다. 선급금 때문에 호떡장수는 미래에 밀가루 2포대라는 경제적 대가의 유입을 기대할 수 있다. 그래서 자산으로 분류한다. 물론 호떡장수가 보유하고 있는 선급금 자산은 계속 자산으로 유지되는 것은 아니다. 밀가루 장수로부터 밀가루를 건네받는 시점에 자산 항목에서 삭제되고 이제서야 비용(매입 비용)으로 신분이 바뀔 것이다.

조직폭력배들이 상인들에게 돈을 뜯어낼 때 ‘보호비’라는 명분을 내세운다. 걱정없이 장사를 안전하게 할 수 있게 보호해준다는 것이다. 정작 자신들이 상인들의 걱정거리인데도 말이다. 보호비는 단순 비용이다. 자산성이 없다. 조폭들에게서 상인들이 무슨 경제적 효과나 이익 같은 대가를 기대할 수 있겠는가.

그렇다면 대기업들이 미르재단이나 K스포츠재단에 갖다 바친 돈은 어떨까. 한겨레신문이 입수보도한 K스포츠재단의 지난 2월 회의록은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이 될 수 있다. 회의장소는 서울 소공동 롯데호텔. 참석자는 안종범 당시 청와대 경제수석와 건설회사 부영의 이중근 회장, 그리고 재단과 회사 관계자들이다. 회의록에 따르면 재단 관계자는 “부영에서 5대 거점지역(5대 거점 체육인재 육성사업) 중 우선 경기도 하남지역 시설건립과 운영지원을 부탁한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그는 “1개 거점에 대략 70억~80억원이 필요하다. 부영이 시설을 건립하라는 이야기는 아니고 재정 지원을 부탁한다”고 발언했다. 쉽게 말해, 건물 짓는 건 우리가 나중에 알아서 할 테니 일단 돈만 내놓으라는 노골적 요구다. 그러자 이중근 부영 회장은 뒷거래를 시도한다. 그는 “최선을 다해 도울 수 있도록 하겠다”고 답했다. 그리고는 “다만 현재 우리가 세무조사를 받게 되었는데 이 부분을 도와주실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말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자금 지원 약속과 세무조사 선처라는 음습한 ‘바터’를 하고 있는 장면이다. 회의록 내용이 사실이라면, 이 회장은 70억원 또는 그 이상의 재단 지원금을 내는 대신 회사에 대한 세무조사 선처라는 경제적 대가를 기대하고 있다. 이 회장에게 70억원은 단순 비용이 아니라는 이야기다. 그의 마음속에서 이 돈은 세무조사 선처라는 경제적 대가를 가져올 수도 있는 회사의 자산이었을 것이다.

대가 바라는 기업 있다면 또 다른 최순실·안종범 나올 것

그런데 이 자산은 불량식품을 만들어 내는 기계설비와도 같다. 기업주에게는 돈벌이가 되는 우량자산일지 모르지만, 국민들에게는 끔찍한 복통을 안겨주는 불량자산이다. 부영은 이 회의가 있기 며칠 전 3억원을 K스포츠재단에 입금했다고 한다. 부영 측은 “이 회장과 안 수석이 만나지는 않았다”며 “재단 관계자와 부영 사장이 만났을 때 회사 사정이 어렵고 세무조사를 받고 있기 때문에 지원이 어렵다는 의사를 전달했다”고 해명했다고 한다. 회의록 내용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내용이다.

정치적 성격의 자금 제공이 회사에 유·무형의 경제적 대가를 가져다 줄 것으로 생각하는 기업인이 있다면 또 다른 최순실·안종범이 끊임없이 나타날 것이다. 재단에 대한 의혹이 한참 제기되던 지난 9월 말, 재단 기금을 출연한 한 대기업에서 대외업무를 담당하는 간부에게 조심스레 물어봤다. “이승철 부회장(전국경제인연합회)이 전경련 차원에서 모금 결정을 했고, 그래서 본인이 주도적으로 나섰다고 주장하는데 어떻게 생각합니까?” 필자는 “다 아시면서 뭘…”이라는 답변을 예상했다. 민감하지만 뻔한 이슈에 대해 기업이 보이는 일반적 반응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달랐다. 질문에 대한 그의 답변은 아주 명확하고 간결했다. “이승철이 무슨 힘이 있다고…” 그래서 또 물어봤다. “그럼 이승철의 뒤에는 누가?” 이번에는 “다 아시면서…”라고 말하겠구나 싶었다. 그런데 그의 입에서는 “청(靑)”이라는 말이 나왔다.

일사천리로 진행된 재단 설립과 공무원들의 지원, 수백억원의 기업 자금 모집은 청와대 개입이 아니면 설명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안종범 전 수석은 검찰 조사에서 강제 모금 의혹을 부인했다. 기업들이 각자 판단에 따라 자발적으로 동참한 것이라는 취지의 진술을 했다고 한다. 두 재단이 잘 운영되게 돕는 것이 대통령의 뜻이라고 생각해 참모로서 재단을 도왔다는 내용의 진술도 했다고 한다.

만약 2008년 국정원 조사 결과 기업들이 투자계획을 대폭 확대한 것으로 나타났다면 어떻게 발표했을까. 아마 이랬을 것 같다. “한달 전 기업하기 좋은 환경을 만들겠다는 당선자의 약속을 믿고 기업들이 각자 판단에 따라 자발적으로 투자확대에 나선 것으로 나타났다. 기업들이 잘되게 돕는 것이 대통령의 뜻이라고 생각해 국가정보기관으로서 설문조사를 진행하는 방식으로 기업들을 도왔다.”

필자는 국제경제와 금융시장을 분석하는 미디어&리서치 ‘글로벌모니터’ 대표를 맡고 있다.

1359호 (2016.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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