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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태의 보스와 참모의 관계학(6) | 육조원로 (六朝元老) 최지몽] ‘보스 맞춤형 보좌’로 여섯 왕 섬긴 大참모 

 

김준태 칼럼니스트이자 정치철학자
책사·보호자·고문 등 역할로 왕실의 바람막이 … 보스 성향에 맞춰 조언하고 행동해야

촉한의 황제 유비는 자신의 수석참모인 제갈량을 두고 “나에게 공명(孔明)이 있음은 물고기에게 물이 있는 것과 같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수어지교(水魚之交)라는 고사성어를 유래한 이 말은 보스와 참모의 관계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물고기는 물이 없으면 살지 못하고, 물은 물고기 없이는 의미를 실현할 수 없듯이, 보스와 참모는 진정한 한 팀이 될 때 비로소 빛을 발한다. 이 연재에선 한 팀을 이루는 바로 그 과정에 주목한다. 어떻게 보스를 선택하고 참모를 선택하는지, 어떤 식으로 관계를 맺으며 서로에게 도움이 되었는지 역사 속의 사례로 살펴본다.


▎경기도 파주군 서곡리 민통선 북방지역에서 발견된 고려시대 벽화. 화강암 석벽에 묵선으로 당시 관료로 추정되는 인물상을 그렸다.
‘삼조원로(三朝元老)’라는 한자성어가 있다. 세 명의 군주를 연이어 섬긴 원로 대신이라는 뜻으로 경륜과 명망이 탁월한 사람을 가리킨다. 이 칭호를 얻은 사람은 손으로 꼽을 정도인데, 삼조에 걸쳐 관직생활을 할 정도로 오래 살아야 해서 그런 것은 아니다. 고려를 예로 들면 임금의 평균 재위기간이 대략 14년이므로 한 사람의 신하가 세 임금의 조정에서 일한 사례는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다. 다만 모시는 임금마다 최측근에서 보좌하며 뚜렷한 자취를 남기는 경우가 드물다. 선대의 신하를 부담스러워하는 것이 왕의 일반적인 속성인데다가 왕권교체기의 권력재편과정도 무사히 넘겨야하기 때문이다. 모든 왕의 선택을 받을 정도로 대체불가의 영역이 있어야 하며, 서로 다른 성향을 가진 임금들에게 각각 적응해야 한다는 문제도 있다. 이들 난제를 통과해야 비로소 ‘삼조원로’라는 명예를 갖게 되는 것이다.

왕건이 ‘지몽’ 이름 하사

그런데 고려 초기에는 ‘삼조원로’를 넘어서 여섯 명의 군주를 모신 ‘육조원로’가 있었다. 태조에서 성종에 이르는 여섯 임금의 일급 참모였으며 거듭된 역모를 막아 왕실의 수호자로 불렸던 최지몽(崔知夢, 907~987, 본명 최총진)이다. 최지몽은 어렸을 적부터 총명하고 뛰어난 학문으로 명성이 높았는데, 특히 천문(天文)과 복서(卜筮, 점을 쳐서 길흉화복을 예측함)에 정통한 것으로 소문이 자자했다. 태조 왕건과 처음 인연을 맺게 된 것도 이 때문이었는데, 어느 날 기이한 꿈을 꾼 왕건이 그를 불러서 해몽하게 했다. 최지몽은 “삼한(三韓)을 모두 다스리게 될 징조입니다”라고 답했다. ‘지몽(知夢)’이라는 이름은 이날 왕건으로부터 하사받은 것으로서 그의 나이 18세 때의 일이다.

[고려사]에 따르면 이후 최지몽은 왕건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고 한다. 궁궐 안에서건 전쟁터에서건 그는 항상 옆에서 왕건을 보필하며 자문에 응했다. 측근이자 책사로서 깊은 신임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최지몽은 관직에 있는 내내 사천대(司天臺)와 내의성(內議省)의 업무를 도맡았다. 천문지리 관측과 기후예측, 역법(曆法)을 담당하는 사천대는 하늘의 뜻을 살펴 국정에 정당성을 부여하고, 달력과 농사 등 백성의 일상을 관장한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관청이다. 게다가 천문지리와 기후를 살핀다는 것은 나라 안의 모든 정보를 취합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내의성은 임금에 대한 조언과 왕명의 출납을 담당하는 기관으로 오늘날 대통령자문회의와 청와대 비서실을 합친 것에 해당한다. 그야말로 국가의 핵심중추를 장악하고 있었던 것이다.

더욱이 최지몽은 ‘복서’를 토대로 국정 전 분야의 의사결정 과정에 깊숙이 관여했다. 군사의 출병과 전략의 수립, 정책의 시행과 위기 대응 등에 있어서 최지몽이 내놓는 점괘는 중요한 판단 기준이 됐다. 그런데 ‘복서’를 담당했다고 하여 그가 역술가나 무속인이었던 것은 아니다. 그는 어디까지나 유교경전과 역사를 전공한 학자였다. 다만 정보수집 능력과 정세 분석력이 탁월했고 이를 기반으로 한 예측 역시 매우 정확했기 때문에 신비주의적인 색채를 지니게 된 것이다. [삼국지연의]에서 제갈량이 천문을 읽고 바람을 부르는 술법을 썼다고 기술되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최지몽이 여러 차례 역모를 분쇄한 것은 바로 이러한 능력을 잘 보여준다. 최지몽은 태조에게 두 딸을 시집 보낸 조정의 실력자 왕규(王規)가 왕요·왕소 형제(훗날 정종과 광종)를 죽이려는 시도를 가로막았다. 왕규는 자신의 외손자인 광주원군을 왕으로 옹립하려는 속셈을 가지고 있었는데, 왕위 계승 서열이 가장 높았던 이들 형제를 걸림돌로 보고 사전에 제거하려 한 것이다. 그는 또 비밀리에 혜종의 거처를 옮기도록 해 암살 기도를 무산시켰다. 그날 밤 군사를 이끌고 침입한 왕규는 최지몽에게 칼을 겨누며 왕의 행방을 물었지만 그는 끝끝내 대답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 밖에도 최지몽은 경종 때 왕승(王承)의 반역을 예측하고 이를 좌절시켰는데, 요주의 인물에 대한 치밀한 정보 수집과 동향 파악, 상황 분석을 통해 만반의 대비를 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판단된다.

광종 때엔 11년간 귀양살이도

그런데 광종의 집권 후반기에 최지몽은 돌연 귀양을 떠났다. 광종의 개혁 드라이브를 뒷받침했던 그가 술에 취해서 왕에게 무례했다는 죄목으로 11년간이나 유배생활을 하게 된다. 구신(舊臣)과 귀족세력을 억제하고 왕권을 강화하고자 했던 광종에게 시범 케이스로 걸렸다는 분석이 있지만, 자기 관리에 철저했던 최지몽이 임금 앞에서 술주정을 했다는 것은 믿기 힘든 일이다. 당시 광종은 초반기의 훌륭했던 모습을 잃어버리고 참소(讒訴)를 믿어 수많은 사람을 죄 없이 죽이고 있었다. 최승로는 “훈공(勳功)을 세운 신하와 장군들도 모두 죽음을 면치 못하였다”고 기술했다. 이러한 때에 최지몽은 광종의 광기로부터 살아남고자 스스로 죄를 범함으로써 지방으로 피신했을 가능성이 크다. 이후 최지몽은 경종이 즉위하면서 다시 중용되는데, 광종 말년의 폭정으로 왕권이 흔들리고 국정이 혼란에 빠지면서 이를 수습해 줄 사람이 필요했던 것이다. 최지몽은 내의령(內議令)과 좌집정(左執政, 수석 재상)을 역임하며 다음 임금인 성종까지 계속 보좌했는데, 그의 나이가 70대 후반에 이르러 거듭 사직을 요청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성종은 조회에 참석하는 일 등 신하로서의 의무를 면제해 주며 내의성의 업무만이라도 계속 관장해달라고 강권하다시피 했다. 이 임무는 987년(성종 6년)에 그가 81세의 나이로 사망하고 나서야 마침표를 찍게 된다.

이 같은 ‘육조원로’로서 최지몽의 성공적인 생애는 무엇보다 그의 탁월했던 능력 덕분으로 생각된다. 뛰어난 정보력과 정세 분석에다가 깊은 충성심으로 왕실의 바람막이가 되어 주었기 때문에 왕들도 계속 그를 찾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여섯 임금 개개인의 성향과 요구를 모두 맞춰주지 않았다면 그는 결코 ‘육조원로’로서의 이름을 남기지 못했을 것이다. 고려 초기의 혼란한 정국에 휩쓸려 목숨을 잃었을 수도 있다. 최지몽은 전장의 전략가가 필요했던 태조에게는 책사가 되어 주었고, 안전을 지켜줄 사람이 필요했던 혜종에게는 든든한 보호자가 되어주었다. 정종이 무사히 왕이 될 수 있도록 지원했고 광종의 개혁 작업을 후원했다. 왕권이 흔들리던 경종의 버팀목이 됐고, 유교적 국가체제를 건설하고자 했던 성종에게는 훌륭한 고문(顧問)이 돼 주었다. 또한 왕이 그를 부를 때는 지성으로 섬기고 왕이 그를 의심할 때는 주저 없이 물러났다. 왕의 성향에 맞춰 조언하고 행동한 것이다. 이것을 보스의 심기까지 경호하는 아첨으로 봐서는 안 된다. 임금을 보좌함에 있어서 최선의 결과를 도출할 수 있도록 가장 적합한 방식을 고려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보스에 대한 참모의 맞춤형 대응, 이것이 최지몽이 주는 교훈이다.

김준태 - 칼럼니스트이자 정치철학자. 성균관대와 동 대학원에서 공부하고 성균관대 유교문화연구소와 동양철학문화연구소를 거치며 한국의 정치철학을 연구하고 있다. 우리 역사 속 정치가들의 리더십과 사상을 연구한 논문을 다수 썼다. 저서로는 [왕의 경영], [군주의 조건] 등이 있다.

1372호 (2017.0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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