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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대통령에 취임한 슈타인마이어] 우파 메르켈에 맞설 유일한 좌파 거물 정치인 

 

채인택 논설위원 ciimccp@joongang.co.kr
슈뢰더 밑에서 정치·행정 배워 … ‘아겐다 2010’ 추진한 온건·합리·개혁파

▎독일 의회에서 새 대통령으로 뽑힌 프랑크발터 슈타인마이어 전 외무장관이 지난 2월 앙겔라 메르켈 총리와 함께 일요 예배를 보고 있다.
독일 제12대 대통령으로 프랑크발터 슈타인마이어(61) 전 외무장관이 3월 19일 취임했다. 슈타인마이어는 지난 2월12일 베를린의 국가의회 의사당에서 열린 16대 연방회의 투표에서 1260표 중 73.9%에 해당하는 931표를 얻어 1차 투표에서 당선했다. 그는 2012년부터 대통령을 맡아온 요하임 가우크(77)를 이어 독일의 국가 수반에 올랐다. 최초의 동독 출신 대통령인 가우크는 최초의 무소속 대통령이기도 했다. 이번에 취임한 슈타인마이어는 앙겔라 메르켈 독일 연방총리의 우파 기민·기사연합과 두 차례 좌우 대연정을 이뤘던 좌파 사회민주당 소속의 거물 정치인이다. 사회민주당 집권기에는 연방 총리 비서실장을 지냈으며 좌우 대연정기에는 외무장관, 부총리를 맡았던 관록의 정치인이다.

독일 중서부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주의 작은 도시인 데트몰트 출신인 그는 기센대에서 법학과 정치학을 공부했으며 1991년 ‘노숙자 양산을 막는 국가의 역할’이란 제목의 논문으로 법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 직후 니더작센주의 주지사 비서실에서 미디어법 보좌관으로 정치 생활을 시작했으며 1996년부터 주총리 비서실장을 맡았다. 당시 니더작센주 주지사가 그의 평생 정치 동지로 1998~2005년 독일 연방총리를 지낸 게르하르트 슈뢰더였다. 1998년 좌파인 사회민주당이 총선에서 승리해 슈뢰더가 연방총리가 되자 그를 따라 옮겨 연방총리 비서실 산하 정보담당 부장관을 맡았다. 1999년 연방총리 비서실장에 올라 2005년 슈뢰더가 물러날 때까지 함께 일했다. 비서실장을 맡는 동안 ‘회색 능률(Graue Effizienz)’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이는 ‘최고지도자를 배후에서 좌지우지하며 영향력을 발휘하는 인물’이라는 뜻의 ‘회색 추기경(Graue Eminenz)’이라는 말을 살짝 비튼 것이다. 이념보다 정부의 능률과 국가의 미래를 걱정한 그를 잘 표현한 말이다.

이념보다 정부 능률과 국익 앞세워

2005년 슈뢰더가 정권을 잃고 기민·기사 연합의 메르켈 총리가 주도하는 좌우 대연정이 이뤄지면서 연정 내각에서 외무장관(2005~2009년)을 맡았으며 재임 후반기에는 부총리(2007~2009년)를 겸했다. 좌파 사회민주당 정치인이 독일 외무장관을 맡은 것은 동방정책으로 통독의 기틀을 닦은 빌리 브란트(1966~1969년 외무장관 재임) 이후 사실상 처음이다. 헬무트 슈미트 총리가 1982년 9~10월에 보름 남짓 외무장관을 겸임한 적은 있다. 사민당의 슈뢰더가 집권했을 때도 연정을 구성했던 녹색당의 요슈카 피셔가 외무장관을 맡아 사민당 출신 외무장관은 배출하지 못했다. 그런 외무장관을 맡았다는 사실 자체로 그의 정치력을 짐작할 수 있다. 독일 정치 지형에서 좌우 모두로부터 능력을 인정받고 신뢰를 쌓았다는 이야기도 된다.

슈타인마이어는 2009년 연방총선에서 사민당 대표로서 총리후보에 나섰지만 당이 총선에서 패배하면서 꿈을 이루지 못했다. 게다가 당시 2기 집권을 한 메르켈의 기민·기사연합이 자유민주당과 연정을 구성하면서 그는 야당 대표로 메르켈에 맞서야 했다. 2013년 총선에서 재차 사민당 대표로 총리에 도전했다가 선거 패배로 실패했다. 하지만 메르켈이 제2차 대연정을 하게 되면서 여기에 합류해 다시 외무장관을 맡아 일해왔다. 2016년 11월 연정의 대통령 후보로 발표됐으며 연방회의의 선거를 앞둔 지난 1월 외무장관에서 물러났다.

정치인으로서 슈타인마이어는 독일 국내에서 우파의 메르켈에 대적할 좌파의 거의 유일한 거물로 꼽힌다. 외무장관으로서의 업무수행 평가도 좋았다. 슈타인마이어는 현실적인 외교노선으로 주목받았다. 유럽이 러시아를 고립시키기보다 협력을 해야 갈등을 줄일 수 있다며 친러시아 정책을 펴왔다는 평가를 받는다. 당연히 러시아를 고립시키려고 했던 당시 버락 오바마의 미국 행정부와는 어느 정도 긴장 관계를 유지했다. 2008년에는 티베트 망명정부 지도자 달라이 라마와 만나기를 거부한 뒤 “요즘은 그를 만나지 않는 것이 더 많은 용기를 필요로 한다”는 성명을 발표하기도 했다. 현실적으로 중국을 무시할 수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한 것이다. 이런 일련의 사건 때문에 그는 독일의 국익을 인류 보편의 인권문제보다 앞세웠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하지만 이 때문에 독일 국내에서 폭넓은 지지를 받기도 한다.

슈타인마이어는 사민당 내에서 중도좌파 정치인으로 통한다. 온건파, 합리파, 개혁파로 불린다. 그런 그가 슈뢰더의 비서실장으로 있던 당시 대표적으로 추진했던 정책이 ‘아겐다(Agenda) 2010 개혁정책’이다. 아겐다 2010은 2003년 3월 게르하르트 슈뢰더 당시 연방총리가 발표한 개혁안으로 노동시장노동법, 사회보장제도, 경제·재정정책, 교육과 기업혁신 등에 대한 독일정부의 중장기적 개혁 프로그램이다. 연금을 비롯한 사회보장을 동결하고 노동시장을 유연하게 하며 세금을 줄이는 개혁정책이다. 이 개혁은 독일의 미래를 위해 반드시 필요했지만 좌파에 표를 몰아줘 슈뢰더를 총리로 만든 지지자들의 등을 돌리게 한 요인도 됐다. 2005년 연방총선에서 슈뢰더의 사민당이 아슬아슬하게 재집권 기회를 놓친 가장 큰 이유라는 평가도 있다.

하지만 사민당의 게르하르트 슈뢰더 총리 정권에서 추진했던 아겐다 2010은 앙겔라 메르켈의 기민·기사연합 보수정권에서 빛을 발휘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았다. 개혁으로 재정을 튼튼히 하고 노동유연성을 높인 독일이 경제발전을 이어갔기 때문이다. 이후 수많은 나라가 이 정책에 관심을 보였으며 벤치마킹을 해갔다. 한국도 공무원 연금개혁에서 이 사례를 참조한 것이 사실이다.

한국에 던진 메시지

2014년 10월 외무장관으로서 방한했던 슈타인마이어를 인터뷰하면서 이와 관련한 질문을 했다. 그의 대답은 단호했다.

“많은 나라가 독일의 개혁 경험에 관심이 많다. 독일은 이 개혁정책의 추진으로 인해 단호한 개혁정책은 마침내 결실을 맺는다는 사실을 보여줬다. 물론 개혁이 무르익고 국민에게 긍정적인 효과를 내기까지는 많은 노력과 인내가 필요하다는 점도 사실이다. 개혁이 가진 이런 점을 숨기지 않겠다. 개혁이란 처음에는 많은 사람이 무리라고 생각하기 쉽다. 개혁 정책으로 인해 정치적으로, 실질적으로 손해를 보기도 한다. 현재 유럽에서 금융위기를 극복하는 과정에서도 이런 상황을 경험하고 있다. 독일은 우리가 결심한 개혁을 단호하게 함께 실행해나갈 것이다.”

통일과 관련한 교훈을 청하자 이렇게 대답했다.

“독일은 25년 전 아주 행복하고 정치적으로 유일무이한 정치 상황에서 통일을 이룰 수 있었다. 우리가 베를린 장벽 붕괴 기념일(11월 9일)을 특히 감사하는 마음으로 맞는 이유다. 한국민도 한반도의 분단 상황을 언젠가는 극복할 수 있기를 진심으로 기원한다. 한반도 상황은 통일 당시 독일 상황과 다르기 때문에 한국에서 통일이 이뤄진다면 이는 독일과는 다른 방법이 될 것이다. 통일에 대한 남북한 간의 접근도 독일과는 차이가 나는, 또 다른 유일무이한 방식으로 이뤄질 것이다. 독일은 한국에 외교정책에 대해 직접적인 ‘교훈’을 줄 생각은 없다. 하지만, 신뢰구축과 공동의 관심을 통해 대치상황을 극복한 독일 및 유럽의 경험이 다른 지역, 어쩌면 한국에도 도움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독일 대통령은 비록 실권이 별로 없는 자리이긴 하지만 어쨌든 한 국가의 수반이다. 슈타인마이어의 인터뷰 대답을 들어보면 그가 그런 독일의 국가 수반으로 뽑힌 이유를 잘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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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77호 (2017.0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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