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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포스트 TPP 통상전략’] 아베의 속내 ‘EU와 손잡고 트럼프 압박’ 

 

이규석 국제문제 컬럼니스트
일-EU EPA 강력 추진, 궁극적 목적은 TPP 타결 … 일본 내에선 트럼프 탄핵 가능성도 열어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2월 10일(현지시간) 미·일 정상회담을 마친 뒤 백악관 이스트룸에서 공동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 사진:중앙포토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1월 20일 백악관의 공식 사이트에 미국의 통상정책을 게재하면서 TPP(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 이탈을 표명했다. 이어 1월 23일 TPP에서 이탈하는 행정명령에 서명했다. 이로써 미·일이 주도했던 TPP 협정이 붕괴되는 위기를 맞고 있는 가운데, 일본은 새로운 대외 통상전략을 수립하는 데 안간힘을 쓰고 있다.

TPP는 아베 정부의 경제정책인 아베노믹스에 있어 성장 전략의 중요한 축으로 기대를 모았지만, 트럼프 정부의 TPP 이탈로 일본은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성장력을 일본경제로 흡수해 일본의 경제규모를 한층 큰 규모로 확대시킬 수 있는 지렛대를 상실했다.

일본의 통상 전략도 벽에 부딪혔다. 일본은 TPP를 먼저 타결 지은 후 일·한·중(日·韓·中) 자유무역협정(FTA), 일-유럽연합(EU) FTA를 추진하고, 때가 무르익으면 중국 주도의 RCEP(역내포괄적경제동반자협정)에도 참가한다는 복안이었다. RCEP는 동남아시아국가연합(ASEAN) 10개국과 일본, 중국, 한국, 인도, 호주, 뉴질랜드의 6개국을 포함시킨 역내 국가들의 FTA 추진 구상이다. 일본이 RCEP에 참가하면 일본 국내에서 약 9조 엔의 경제효과를 낼 것으로 예상된다. 그러나 RCEP가 출범하면 아시아의 주도권을 중국에 넘겨야 하고, 미국도 그에 조바심을 낼 것이므로 일본의 RCEP 참가는 관측만 나올 뿐 사실상은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게 정설이다. 더욱이 현재 16개국이 참가 의사를 내비친 RCEP는 아직 실체가 없는 선언적 차원의 단계다. 후속조치가 나오는 등 실제적인 모습을 드러내기까지는 갈 길이 멀다. 또한 아시아를 놓고 펼쳐질 주도권 싸움 중에 발생할 수 있는 중간 변수들이 너무 많다. 때문에 협정이 완결되기까지는 중국과 일본, 미국 등지에서 몇 번씩 정권이 바뀌는 경우가 생길 수도 있다. 일본이 RCEP에 소극적인 이유다.

주목해야 할 것은 일본의 새로운 통상 전략이다. 일본 내에서는 미국이 빠진 TPP라도 성사시킨 후, 일-EU EPA(경제동반자협정)를 추진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크다. 이른바 ‘포스트 TPP 통상전략’이다. 일본과 EU가 EPA를 맺어 경제 교류와 무역자유화를 강화하면, 미국이 다시 일본에 손을 내밀게 될 것이고, 일본은 그때 유리한 입장에서 미국과 쌍무 협정을 맺는다는 게 일본의 새 통상전략의 골격이다. 트럼프가 TPP나 포괄적인 역내 FTA를 싫어하니, 트럼프의 요구대로 일·미간 무역협정은 쌍무협정으로 하되, 수출과 투자에 있어 일본에 유리하게 이끈다는 것이다.

TPP는 아베노믹스의 핵심 성장전략


▎2016년 2월 4일 뉴질랜드 오클랜드에서 세계 최대 자유무역협정(FTA)인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 공식 서명식이 열렸지만 미국의 탈퇴로 무산 위기에 놓였다. / 사진:중앙포토
일본의 이런 야무진 새 전략은 트럼프가 임기를 다 못 채우고 탄핵·파면되는 것까지도 시야에 넣어 수립되고 있다는 얘기가 일본 내에서 조심스레 나온다. ‘미국 우선주의(America First)’와 보호무역주의 정책을 밀어붙이면서 다른 나라와 갈등을 빚고 있는 트럼프의 기대와 달리 1~2년 내에 미국 경기가 더 안 좋아지면, 트럼프의 탄핵 가능성도 커질 수 있다는 게 일본 정치·경제계에 나돌고 있는 관측들이다. 만약 트럼프가 물러나고, 미국이 글로벌리즘과 자유무역이라는 합리적 노선으로 다시 돌아올 때, 그 때 일본은 미뤄온 TPP를 기어코 발효시킨다는 것이다. 미국은 부통령제가 있어 임기 중 트럼프가 물러나도 혼란 없이 TPP 법안을 통과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일본 측은 믿고 있다. 일본은 이미 2016년 11월 10일 TPP 법안이 중의원을 통과했고, 같은 해 12월 9일 참의원에서도 가결됐다. 일본은 미국 의회의 승인(비준)을 기다렸다가 대망의 TPP 출범을 이룩한다는 야심이다.

아베 정부가 TPP에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는 것은 TPP가 갖는 전략적, 경제적 의의가 아주 크기 때문이다. TPP는 일본, 미국, 캐나다, 멕시코 등 12개국이 참가하며 세계경제의 약 40%을 차지하는 자유무역경제권을 만들 수 있다. 일본 국내에서도 약 14조 엔의 경제효과를 기대할 수 있기 때문에, 한계에 부딪힌 가운데 새로운 돌파구를 찾고 있는 아베노믹스에 있어서도 절대 포기할 수 없는 성장전략이다.

일본 지식인들이 트럼프 탄핵이라는 가능성을 열어두는 이유는 분명하다. 첫째, 트럼프가 ‘탈(脫)글로벌리즘’과 ‘보호무역주의’의 간판을 내걸며 미시적으로 자국의 경제적 이익만을 노리는 ‘장사꾼’으로 행세할 때, 트럼프 정권엔 반드시 파국이 찾아올 것이라는 기대감이 있기 때문이다. 또 하나의 이유는, 대통령 고문이자 수석 전략관인 스티브 배넌, 백인 우월주의자로 2016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맹활약한 리처드 스펜서 등 트럼프 참모진과 멘토들이 ‘대안보수’(Alternative Right=Alt-Right=새로운 극우보수세력)의 기치를 높이 걸고 백인지상주의, 인종차별, 여성차별, 성(性)소수자 차별, 문화적 보호주의 등을 실행하고 있는 것에서 찾고 있다. 트럼프는 이들 참모진에 둘러싸여 이들의 생각을 과감히 받아들이고 있다. 이론적 백그라운드가 그리 튼튼하지 않은 이들이 계속 설치고 돌아다닌다면 트럼프 정권은 임기 만료 전에 끝장날 수도 있다는 우려의 소리가 미국 안팎에서도 나오는 것도 주목해야 한다.

고육지책으로 EU 손 먼저 잡는 일본

일본 정부는 미국이 TPP로 돌아올 것을 지속적으로 요구하면서도, 사용할 수 있는 수단과 방법은 우선 전부 동원하겠다는 입장이다. 일단 미국을 뺀 채 지금까지의 협상국 11개국(일본 포함)이 차선책으로 ‘사실상의 TPP’를 성립시키길 원한다. 이때는 일본이 각국에서의 의회승인(비준) 절차를 도와 줘야 한다. 미국이 빠진 TPP에는 호주와 캐나다 등이 우선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고 있으나 일본은 그들을 설득해 나간다는 입장이다. 아베 총리는 페루 대통령 등 해당국 지도자를 만날 때마다 미국 없이도 나머지 국가들이 TPP를 발효시키면 미국도 끝내 따라올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강변을 늘어놓았었다. 아마 아베 총리는 그들 앞에서 미국이 TPP에 가입하지 않는다면 미국 경제는 더 큰 위기에 처할 수가 있고, 마침내 트럼프는 권좌에서 쫓겨나게 될지도 모른다고 말하고 싶어 했을지도 모른다.

그러고 나서 미국과는 트럼프가 원하는 대로 양국간 쌍무협정을 맺어주겠다는 것이 일본의 입장이다. 미국 측은 양국 관계에서 상대적으로 유리한 협상력을 믿고 관세협상에서 미국 상품에 유리하게 협상을 이끌어 가려고 할 것이다. 그러나 미· 일 무역협상은 여간해서 쉽게 끝나지 않는다. 예컨대 한·미 FTA는 3년 반 정도 걸려 협상이 끝났지만, 미·일 FTA는 30여년을 협상하고도 아직 끝을 못 보고 있는 실정이다.

이 난관을 돌파하기 위해 일본이 고안해 낸 수단이 있다. 바로 EU와의 EPA 체결이다. 이 협정은 일본과 EU 양쪽이 윈-윈 전략으로서 염원해 왔던 것이다. 일본이 EU와 EPA를 체결해 상품 교역뿐만이 아니라 서비스와 투자, 경제협력 등을 늘리면, 상대적으로 EU시장에 대한 미국의 수출이 줄어드니, 미국이 안달이 나게 될 것이라는 얘기다. 바로 그 때, 일본이 미국에 대한 협상 우위를 확보해 미·일 양국간 쌍무협정을 타결 지으면 일본이 만족할 수 있게 되리라는 것이다. 이 쌍무협정은 상품 하나하나에 별도의 관세를 매길 수도 있고, 몇 개 중요 산업 단위로 관세협상을 벌일 수도 있다(이 쌍무협정은 원칙적으로 무관세를 목표로 하는 FTA와는 다른 협정이다). 그리고 만약 트럼프가 권력을 잃으면 미국을 포함해 TPP로 이행해 간다는 게 아베 정부의 ‘블루 프린트’인 것이다.

일본은 이 야심적인 구상을 실현하기 위한 첫 단계가 바로 EU시장에 대한 주도권을 잡는 일이라고 본다. 그래서 일-EU 간의 EPA 체결을 지금의 통상전략의 핵심적 과제이자 최우선 과제로 설정해 놓고 있는 것이다. 즉 트럼프 등장 후 어쩔 수 없이 우회로를 걷게 된 일본의 통상전략의 키(열쇠)는 바로 일-EU의 EPA에 있다. 그러나 미국을 다시 끌어들여 아시아·태평양지역의 포괄적인 경제협력체를 만들겠다는 일본의 TPP 구상이 실현되기는 쉽지 않을 것이라는 지적이 많다. 유럽에서 EU가 출범하기까지는 40년 이상의 시간이 걸렸다. 경제 규모나 기술 수준이 비슷한 나라들이었음에도 그렇게 많은 시간이 걸린 것이다. 그런데 TPP에는 최첨단 국가에서 최후진 국가까지 골고루 배치되어 있기 때문에 파트너십이나 통합이 어려울 것이라는 전망이 많다. 동남아와 유럽 등지에서 일본을 편들어주는 나라도 많지 않다. 아프리카 지역도 일본보다는 중국 쪽에 기울어 있다. 국제무대는 어차피 ‘쪽수(숫자) 싸움’인데, 일본은 국제사회에서 발언권을 높이기 위해 자기편을 들어주는 나라들의 수를 확보하는 일이 시급할 것으로 보인다. 국제무대에서 일본이 고도의 정치력을 발휘해야 하는 이유이자, 한국이 주목해야 할 관전 포인트다.

1376호 (2017.0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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