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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골프사의 4대 괴짜] 노래하는 악동 골퍼 댈리 ... 툭하면 클럽 내던진 볼트 

 

남화영 헤럴드경제 스포츠팀 편집장
타이거 우즈가 스윙폼 본받고 싶어했던 모 노먼 ... 드라이버샷은 오른손, 퍼팅은 왼손으로 했던 맥 오그레디

▎‘필드의 악동’ 존 댈리(51·미국)가 올 5월 8일 미국 텍사스주 우들랜즈 골프장(파72)에서 끝난 미국프로골프협회(PGA) 시니어 투어인 챔피언스 투어에서 14언더파로 우승했다. 챔피언스 투어 첫 우승. 정규 투어까지 합치면 지난 뷰익 인비테이셔널 이후 13년 만의 우승이다.
20세기 이후 수많은 천재 골퍼와 뛰어난 기량을 가진 선수들이 넘쳐났다. 천재성과 함께 특이한 자취를 남긴 괴짜와 기인 골퍼도 간혹 있었다. 4차원 세계에서 온 4대 괴짜 혹은 기인 선수들은 3차원 골퍼 세상에 자신들의 자취를 남겼다.

토미 볼트(1916~2008) | 성급함으로 ‘번개’로 불린 천재

세계 2차 대전 기간에 군 복무를 마치고 서른 살인 1946년에 투어에 데뷔한 토마스 헨리 볼트는 성질이 엄청나게 급했다. 1953년 투산오픈에서 짧은 숏 퍼트를 놓치자마자 ‘꼭지’가 돈 나머지 퍼터를 던져버린다. 그럼에도 마지막날 65타를 쳐서 한 타차로 우승하자 다음날 신문에 ‘위험한 토미(Terrible Tommy)’란 별명이 붙게 됐다. 하지만 볼트를 부르는 더 유명한 별명은 ‘번개(Thunder) 토미’였다. 역대 골퍼 중에 성격이 가장 급하면서 가장 다혈질적인 선수로 꼽힌다. 화가 나서 클럽을 물속에 던진 사례는 무수히 많다. 그가 워낙 자주 클럽을 내던지다 보니 미국 프로골프협회(PGA)에서는 1957년 장비를 던질 경우 벌금을 부과하는 이른바 ‘토미 볼트 규칙’을 제정하기에 이른다. 이 규칙이 발효된 다음날 볼트는 퍼터를 하늘로 내던졌다. ‘자신으로 인해 만들어진 규칙에 따라 벌금을 납부한 첫 번째 사례가 되고 싶었다’는 게 이유였다. 요즘은 선수가 이렇게 클럽을 던지는 등의 부적절한 행동을 하면 2000~1만 달러의 벌금을 내야 한다.

메이저에서 우승한 지 2년만인 1960년 US오픈에서 볼트는 18번 홀 티 샷을 하다가 볼을 두 번이나 연못에 빠뜨리고 말았다. 끓어오르는 격동을 참지못한 그는 다시 폭발했다. 드라이버를 물에 내던져버렸다. 이를 본 한 소년이 호수에 뛰어들어 드라이버를 냅다 건져갔다. 페블비치에서 열린 한 대회에서의 일화는 전설이 됐다. 볼트는 16번 홀 두 번째 샷 지점에서 캐디에게 거리가 얼마나 남았느냐고 물었다.

(캐디)“135야드요.”

(볼트)“7번 아이언 줘.”

(캐디)“3번 우드나 아이언으로 쳐야 해요. 지금 남은 클럽은 그거 두 개밖엔 없어요.”

이미 나머지 클럽은 다 내던져버린 뒤였다. 그렇게 성급하게 인생을 산 볼트지만 1951~61년까지 11년간 PGA투어에서 15승을 거두었고, 시니어투어에서도 3승을 올렸다. 그리고 92세까지 장수했다.

모 노먼(1929~2004) | 자폐증 가진 컴퓨터 스윙어

‘골프 황제’ 타이거 우즈가 2005년 잡지 인터뷰에서 ‘본받고 싶었던 자신만의 스윙을 가졌던 골퍼는 두 명’이었다고 밝혔다. 벤 호건과 모 노먼이었다. 커리어슬램을 달성한 호건이야 당연해도, 캐나다인 노먼은 투어 우승도 없었고, 생소했던 무명 선수라 다들 깜짝 놀랐다.

노먼은 5살 때 교통사고를 당한 이후로는 자폐증 증세를 가진 선수였다. 수줍음이 몹시 심하고, 늘 불안해하고 예민했다. 사교성이 떨어졌지만, 수학 재능이 뛰어났다. 수십 년 전 플레이한 코스도 각 홀의 길이를 정확하게 기억했다.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샷을 했고, 했던 말을 또 하고 쉬지 않고 뭔가를 중얼거렸다. 노먼은 주변 사람들의 관심이 질색이었다. 1949년에 세인트토머스인비테이셔널에서 첫 승을 거두고는 시상식에 불참했다. 그는 이미 차를 얻어 타고 집으로 가고 있었다. 1955년에 캐나다 아마추어 대회에서 우승했을 땐 수상 연설이 싫어서 강변에 내려가 숨어 있었다.

노먼의 스윙은 독특한 원 플레인(One plane) 즉, 단일 면 스윙이었다. 스탠스를 넓게 벌리고 다리는 쇠꼬챙이처럼 곧게 폈으며, 팔도 쭉 뻗었다. 짧은 백스윙에 이어 채찍을 휘두르듯 순식간에 스윙했는데 단순하면서도 정확하고, 손목을 꺾지 않는 스윙은 일관됐다. 사람들은 그의 묘기와 같은 스윙과 초인적인 샷 정확성에 감탄했다. 한 행사장에서는 1540번의 드라이버 샷을 했는데, 모두 225야드 이상 날아갔고, 전부 30야드 폭의 원안에 안착했다.

기록을 면밀히 살펴보면 노먼은 과연 컴퓨터 같은 일관된 스윙을 가진 노력하는 천재 골퍼였다. 평생 홀인원 17번, 알바트로스 9번, 한 라운드 최저타인 59타 3번, 61타 4번, 대회에서의 코스 레코드를 33번 달성했다. 하지만 인생에서는 늘 서툴렀고 우승도 없었다.

수줍은 성격, 빨리 플레이를 해야 한다는 강박증, 그리고 사람들의 관심을 불편하게 여기는 기질 때문에 모는 큰 성공을 거둘 수 없었다. 가족과도 연락을 끊고 살았다. 게다가 은행을 믿지 않았고, 돈을 허투루 썼다. 여름이면 골프장의 벙커, 또는 공원 벤치, 자동차에서 자는 일도 종종 있었다. 1980년대에는 급기야 빚에 쪼들렸다. 2004년에 노먼이 세상을 떠났을 때 지인이 유품 정리를 맡게 되었다. 유일한 재산이던 캐딜락 트렁크를 열자 신문 스크랩과 1000여 개의 볼, 신발 10켤레, 아이언 3세트, 그리고 2만 달러 지폐가 흩어져 있었다. 노먼은 가장 좋아하는 노래로 ‘마이웨이’를 꼽았다. 그가 어느 인터뷰에서 말한 골프란 이랬다. ‘골프가 나에게는 그저 공원의 산책이었어요.’

맥 오그레디(1951~) | 양손잡이 머신을 꿈꾼 골퍼


▎스페인 골퍼 세베 바예스테로스는 양손잡이 골퍼 맥 오그레디에게 스윙을 배웠다.
맥 오그레디의 본명은 필립 맥글레노로 7남매의 막내이자 쌍둥이로 태어났다. 자라면서 힘든 유년기를 보내야 했다. 아버지와 형들에게 툭하면 매질을 당했다. 16세 때는 모친마저 세상을 떴다. 오그레디는 골프에서 위안을 찾았다. 좋은 샷을 하기 위해 컴퓨터와 같은 스윙을 연구했고, 결국에는 왼손, 오른손 모두로도 뛰어난 스윙을 하게 됐다.

청소년기에는 종종 반바지에 민소매 셔츠를 입고 카우보이 모자를 쓴 채 LA 인근 코스들을 어슬렁거렸다. 한동안 노숙자 생활을 했고, 어머니가 다니던 교회 앞에서 잠을 자기도 했는데, 처음 골프를 배운 랜초파크 골프코스의 맞은편이었다. 오그레디는 청년 시절엔 레스토랑에서 일하고 골프장에서는 캐디와 용품샵 직원 생활도 했다. 그러면서 투어프로를 꿈꿨다. Q-스쿨에서 열여섯 번 고배를 마신 뒤 1982년에 TPC쏘그래스에서 마침내 PGA투어 카드를 손에 넣었다. 이전까지 탈락했던 아픔이 얼마나 심했는지 그는 떨어졌던 Q-스쿨 횟수에 맞춰 16개 야구 방망이를 사서 밤에 코스로 나가 그걸로 나무를 쳐서 전부 부러뜨렸다.

맥은 양손을 다 쓰지만 왼손잡이 플레이로 아마추어 자격을 신청했고, 팀 매치 대회가 열리자 ‘나 혼자 2명 역할을 하겠다’면서 오른손잡이 맥과 왼손잡이 맥을 동시에 신청한 적도 있었다.

오그래디는 뛰어난 골프 스윙을 가졌음에도 항상 자신만의 세계에 갇혀 살면서 주변사람들과 부딪쳤다. 1984년에 토너먼트의 자원봉사자 한 명이 자신에게 욕을 했다며 오그래디를 고발했다. 이 때문에 PGA투어에서 500달러 벌금 처분을 받자 화가 난 맥은 인기 TV 토크 프로그램 레터맨쇼에 출연해 딘 비먼 당시 PGA투어 커미셔너를 ‘폭군이며 독재자이자 히틀러’라고 원색적으로 비난해 다시 5000달러의 벌금과 6주 출전 정지 처분을 받기도 했다.

1972년 PGA투어에 데뷔한 맥은 1986~87년 사이에 투어에서 2승을 거뒀지만 메이저에서는 좀처럼 좋은 성적을 거두지는 못했다. 90년대 중반 이후로는 교습가로도 활동했다. 오그래디는 플레이의 돌파구를 찾지 못하던 스페인의 세베 바예스테로스의 코치를 하게 됐다. 하루는 둘이 자동차를 몰고 사막으로 가 바예스테로스의 안 좋은 스윙 사진이 가득 담긴 신발 상자를 파묻는 의식을 치렀다. 그 뒤에 세베는 훨씬 나은 스윙 자세를 가지게 되었고, 이후로 항상 자신의 스윙의 공을 오그래디에게 돌렸다.

오그레디는 양손 모두 가능한 자신의 스윙을 절대적인 것으로 신봉했다. 그래서 2000년대 투어에서 들불처럼 번져간 ‘스택&틸트(Stack &Tilt) 스윙’을 자신의 이론을 훔친 것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스스로의 이론 역시 1979년에 나와 고전의 반열에 오른 [골프 머신]의 저자인 호머 켈리를 만나서 큰 감화를 받은 뒤에 나왔다. 이후 오그래디 인생의 목표가 하나 생겼다. 인간의 스윙을 18만7200가지 변수로 분석하는 집필 프로젝트라는데 아직 출판되지 않았다.

존 댈리(1966~) | 노래하는 악동 300야드의 장타자

존 댈리는 ‘악동’이 닉네임처럼 불리지만 동시에 미국에서 가장 사랑받는 골퍼이기도 하다. 1987년 PGA투어에 데뷔한 이래 드라마틱한 감동의 우승 스토리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선수로 살면서 양 극단을 오가는 행태들은 많은 아마추어에게 즐거움을 주기 때문이다.

예컨대 1991년 메이저 첫 승이 그렇다. PGA챔피언십에서 9번째 대기선수로 기다리다가 출전 예정인 닉 프라이스가 아내의 출산을 이유로 기권하면서 돌연 출전 기회를 얻은 뒤에 출전해 덜커덕 우승까지 쟁취했다. 그로부터 4년 뒤인 1995년 스코틀랜드 세인트앤드루스 올드코스에서 열린 디 오픈에서 이탈리아의 코스탄티노 로카를 연장전에서 꺾고 우승했다. PGA투어에서 5승을 비롯해, 유럽·아시아에서 18승을 달성했다. 2003년 충남 천안 우정힐스에서 열린 한국오픈에서는 초청선수로 와서 덜컥 우승하기도 했다.

댈리는 1997년에 평균 드라이버샷 비거리 300야드를 넘는 유일한 선수였고, 2008년까지 이 기록은 이어졌다. 지금이야 300야드를 넘기는 장타자가 예사지만, 당시에는 유일했다. 그래서 ‘움켜쥐고 강타해(Grip it Rip it)’가 댈리의 골프 슬로건이었다. 나이를 먹으면서 삐에로처럼 그의 패션도 화려해졌다. 총천연색으로 알록달록한 무늬를 새긴 바지와 셔츠를 입고, 뚱뚱한 몸집에 튀어나온 배를 출렁거리면서 우격다짐으로 300야드를 넘기는 샷으로 관심을 끌었다.

댈리는 술에 취해 알몸으로 노래를 부르다 경찰에 체포되는가 하면, 1992년부터 15년간 도박으로 5500만 달러(620억원)를 날렸다. 경기가 안 풀릴 때는 갤러리를 향해 샷을 해 물의를 일으킨 적도 있다. 2000년 페블비치에서 열린 US오픈에서 첫날 83타를 치고 기권했다. 그런데 마지막 홀에서만 14타를 쳤다. 그중에 볼 세 개는 태평양을 향해 날렸고, 또 하나의 샷은 페어웨이 옆 빌라의 뒷마당으로 날린 샷이었다.

필드에서건 사생활에서건 그는 ‘악동’으로 알려져 있지만 보기와는 다른 구석도 있다. 낭만적인 서정시를 직접 쓰고 컨트리풍의 기타 연주를 하며 노래를 부르고 앨범도 2집까지 냈다. 2002년 ‘마이 라이프’, 2010년 ‘나는 한 개의 길만 안다’이다. 2집의 수록곡인 ‘세게 쳐(Hit it hard)’는 골프에서 영감을 얻은 노래다.

50세를 넘긴 지난해부터 시니어투어에 모습을 보인다. 최근 댈리는 텍사스 우들랜드에서 열린 인스페리티인비테이셔널에서 시니어 투어에서 첫 승을 올렸다. 2004년 PGA투어 뷰익인비테이셔널 이후 찾아온 우승이었다. 지천명 나이를 넘겨도 여전히 튀는 선수였다. 성조기가 그려진 바지에 빨강 셔츠를 입고 나온 그는 18번 홀 그린에서 챔피언 퍼트를 하기 전 바닥에 엎으려 잔디에 입을 맞췄다. 우승을 확정한 순간엔 커플룩을 맞춰 입은 애인 클라다키스와 키스한 뒤 동료들이 뿌리는 샴페인을 양팔 벌려 음미하듯 맞았다. 간혹 홀짝거리면서 마시기도 했다.

1390호 (2017.0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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