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유럽·일본도 국가 단위 충전 네트워크 못 만들어... 한국은 국영기업이 기반시설 구축해 유리
요즘 전기차(EV)를 구입하려고 망설이는 사람을 종종 볼 수 있다. 딱 1년 전과 비교해보면 천양지차(天壤之差)다. 지난해 상반기만 해도 전기차 구매자는 친환경을 가장하고 싶은 정치인 또는 연예인 취급을 받았다. ‘수조원대 투자비’라는 장벽을 치고, 좀처럼 지각 변동이 없던 자동차 산업이 요동을 친다. 먼 미래에서나 가능할 것이라 생각했던 자율주행자 시험 모델이 2017년 현재 세계 주요 도심을 누빈다. 2021년 글로벌 자동차 업체들은 완전 자율주행차를 판매할 계획이다. 130년 내연기관 시대의 종언이 다가오고 있다. 미래의 차를 내다볼 칼럼을 연재한다.
▎사진:ⓒ 아이클릭아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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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글로벌 완성차 업계에 인수·합병(M&A) 열풍이 불고 있다. 지난 1990년대 이슈였던 ‘앞으로 세계 자동차시장은 5개 업체로 재편된다’는 ‘빅5’론과 비슷한 M&A 바람이지만 발단은 사뭇 다르다. 전기차 같은 친환경차로 시작된 엄청난 연구개발비의 여파다. 점점 자동차 업체의 목을 조르는 연비 및 충돌안전시험 규제가 그것이다. 최근에는 IT를 기반으로 하는 자율주행 기술 개발까지 더해졌다. 살아남기 위해 손을 잡거나 인수를 해야 한다. 먹거나 먹히거나의 전쟁이 시작된 셈이다.2013~2016년까지 세계 ‘톱 7’ 완성차 업체 중 GM과 닛산을 제외한 5개 업체의 영업이익률이 정체됐거나 하락했다. 연구개발비 증가로 완성차 업체들이 겪는 수익성 악화의 한 단면이다. 결국 남은 것은 힘을 합치는 것뿐이다. 규모의 경제를 가장 먼저 추진했고 무려 70년 넘게 오랫동안 세계 1위였던 GM이 2014년 유럽 시장을 포기한다고 선언한 것 자체가 자동차 산업사의 큰 획을 그은 일이다. 동시에 자동차산업 패러다임의 변화를 반영한다. 현대·기아차그룹 등 글로벌 완성차 업체들은 과연 어떤 선택을 할 것일까. 친환경차로 시작해 자율주행차의 거센 파고를 만난 자동차 업계에 해법은 이미 정해져 있을 수 있다. 기존 자동차 업체의 M&A를 넘어 거대 IT전자업체와 손을 잡는 것이다.
전기차·자율주행차 기술은 미국 독무대핵심 키인 전기차와 자율주행차 기술 개발은 사실상 미국의 독주 태세다. 핵심 포인트는 그동안 자동차 맹주였던 디트로이트 빅3(GM·포드·크라이슬러)를 가볍게 제치고 애플·구글이 자율주행차 개발의 주도권을 쥐었다는 점이다. 전기차 개발은 이미 1900년대 초반부터 시작됐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발명왕 토머스 에디슨은 내연기관 차량 대신 전기차가 이른바 ‘마이카’ 시대로 불리는 오토모빌라이제이션의 대세가 될 것으로 생각했을 정도다. 수많은 전기차 시제품이 출시됐지만 결과적으로 상업화엔 실패했다.2000년대 중반 고유가 파동을 겪은 이후 전기차는 다시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여기에 노트북에 주로 사용한 니켈수소·리튬이온 전지 같은 2차전지 개발에 힘입어 전기차의 상업화가 가속화한다. 아울러 자동차의 전자장비인 전장 분야와 각종 센서 및 제어 기술의 발달은 관련 통신기술의 발전과 더불어 교통문화의 급격한 변화까지 불러일으킬 전망이다. 지금으로선 전기차가 자율주행차의 기본 플랫폼이 될 것으로 보인다.전기차 상용화에 중요한 것은 전기차 생산 자체보다는 충전 인프라의 완비다. 한국은 전기차·자율주행차의 후발 주자다. 다른 산업 분야에서 그랬듯이 기술적으로 앞선 나라들이 내놓은 결과물을 가까스로 따라잡고 있다. 여전히 패스트 팔로워다. 전기차·자율주행차가 상용화되고 관련 산업이 발전하려면 각 국가의 기반시설을 충분히 고려한 장기적이고도 차별화된 전략이 필요하다. 이런 전략을 바탕으로 운영시스템을 구축해야 한다. 한국은 출발은 늦었지만 나름의 장점을 발휘해 효과적인 장기 전략을 세운다면 경쟁력 있는 시스템을 구축할 수 있다. 나아가 세계 시장에서 통용되는 표준을 개발할 가능성도 크다. 관련 전후방 산업을 발달시키고 고용 및 부가가치도 창출할 수 있다. 이런 전제 위에 우리보다 앞선 나라는 어떤 문제와 한계가 있는지, 우리에겐 어떤 장점이 있는지 따져보자.전기차 충전 시설은 상용화의 필요충분조건이다. 차량 및 부품 관련 제조기술 개발은 민간이 담당할 수 있다. 하지만 충전 및 관련 서비스는 국가가 제공하는 게 효율적이다. 아직 어느 나라도 이 문제를 제대로 해결하지 못했다. 앞으로도 상당 기간 해결이 쉽지 않은 게 현실이다. 한마디로 전기차 보급에 가장 큰 걸림돌이 충전 및 관련 서비스 네트워크다. 미국·유럽처럼 전력 부문이 민영화된 국가는 통일되고 효율적인 충전 네트워크를 구축하기 어렵다. 미국은 땅덩어리가 엄청나게 광활하다. 대도심이 아니라면 사실상 전국에 이런 충전 네트워크를 만드는 게 거의 불가능해 보인다. 테슬라·닛산 등 일부 회사는 노변이나 쇼핑몰 등 공공시설에 충전 설비를 설치하고 있지만 아직까지 충분한 충전 인프라를 갖추지 못했다. 또 충전 설비 간에 호환성이 낮아 문제가 종종 발생한다. 마치 1980년대 비디오 표준 전쟁을 연상시킨다. 소니의 베타, 전자업체 연합군의 VHS 표준 쟁탈전이다.이런 제약으로 미국인은 전기차를 ‘근거리용 세컨드 패밀리카’로 간주하는 경향이 생겼다. 충전은 자기 집 차고에서 하는 게 기본이다. 가정용 충전 설비는 이미 미국의 여러 회사가 상품화했다. 대형마트 매장에서도 구입할 수 있다. 이런 방식의 충전은 고밀도 아파트가 중심인 한국의 주거 문화와는 잘 맞지 않는다. 더구나 대형마트 같은 상업시설의 주차 환경에도 충전시설을 확충하기 어렵다.
한국은 글로벌 표준 장악에 유리한 조건 갖춰
▎1912년 전기차를 충전하는 모습. 전기차는 19세기에 이미 나왔던 아이디어였다 / 사진:쌤앤파커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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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은 EU의 복잡한 관료 체계와 국가 간 이익 상충이 장애물이다. 일본은 일찍이 내수 중심의 폐쇄적 사업 방식을 고집했다. 그 결과 관련 단위 기술면으로는 우수하지만 세계 시장에서 통용되는 글로벌 표준으로 전환하기는 어려운 상황이다. 전 세계 어느 나라도 국가 단위의 통일된 충전 네트워크를 구축하지 못했다. 이런 선진국도 전기차의 확산과 관련 산업 발전을 위해 국가 단위의 충전 네트워크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걸 알지만 이를 실현시키기는 매우 어려운 실정이다.한국에서는 발전·변전·송전·배전의 모든 부문을 국영 기업인 한국전력 중심 아래 운영한다. 자율주행에 필수적인 5G 와이어리스(Wireless) 통신망과 국가 전체의 광통신망도 국영기업이 구축했다. 고속도로와 충전시설이 들어설 토지 역시 국영기업이 건설하거나 관리를 하고 있다. 전기차 및 자율주행차 확산과 글로벌 표준화에 절대적으로 유리한 조건이다. 이렇게 한국처럼 국가 기반시설을 소수의 국영기업이 담당하는 국가는 많지 않다. 전기차와 자율주행차의 글로벌 표준을 놓고 경쟁할 국가가 상상하기 힘든 차별성이자 쫓아올 수 없는 매력적인 조건이다.
차량 반도체 경쟁력은 보완해야
▎서울 금천구 가산동의 공중전화 부스에 설치된 전기차 급속 충전기. / 사진:KT링커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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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이 이 조건을 최대한 활용해 세계 최초로 국가 차원의 전기차 충전 네트워크를 만든다고 가정해 보자. 전기차 및 자율주행차 부문에서 세계 최고, 아니 글로벌 표준이 될 가능성이 커진다. 세계 최초로 전국에 전기차 충전 네트워크를 구축하면 해당 분야의 세계적인 기술 선도 기업이 한국에 들어올 것이다. 사계절이 있고 산악·고밀도·도심·해안 등 거의 모든 지리적 실험 요소를 갖춘 한국은 글로벌 호환성에 전혀 문제가 없다. 더욱이 전기차의 핵심 기술 가운데 하나인 교류·직류의 제한 요소도 없다. 이런 국가 차원의 충전 네트워크를 구축하면 한국은 전 세계 신기술의 각축장이 될 수 있다. 고용과 부가가치 창출도 가능해진다. 여기에 5G 통신망을 갖추면 자율주행기술 개발에 최적의 실험장이 된다. 이 과정에서 적지 않은 부품·소재·소프트웨어 관련 스타트업이 무궁무진 설립될 수 있다. 청년 실업을 해결할 수 있는 일자리 창출뿐 아니라 관련 스타트업이 글로벌로 성장할 기회인 셈이다.여기서 결코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 있다. 과거 정부처럼 대기업이 특혜를 모두 누리는 전철을 반복해서는 안 된다. 기존 대기업이 이 분야에서 강점이 있다면 그 기술을 활용할 뿐 대기업 중심의 충전 네트워크 청사진을 짜면 첫 단추부터 잘못 끼는 형국이 된다. 중소·중견기업을 포함하는 가치사슬을 구축하고 운영하는 게 불가능해진다는 얘기다. 단적으로 대기업을 보호하기 위한 비관세 장벽, 제반 법규 및 규정을 만들어 해외 선진 업체의 진출을 차단해서는 안 된다. 처음부터 시장을 완전 개방해야 한다. 전기차 충전과 관련한 기반·요소 기술이 부족한 상황에서 완전 개방을 통한 경쟁 환경을 만들어야 글로벌 표준이 될 전기차 충전 네트워크가 완성 될 수 있다.한국은 전 세계가 인정해 주는 반도체 강국이다. 하지만 자동차에 들어가는 차량용 반도체 경쟁력은 매우 취약하다. 전기차·자율주행차뿐 아니라 기존의 내연기관 차량과 관련한 전장산업에 반도체는 핵심 기술이다. 상대적으로 부가가치가 떨어지는 메모리 반도체 대량 생산에 특화된 국내 반도체산업은 특수 반도체 제조 기반에서는 불모지나 다름없다. 이 분야도 패러다임의 변화가 필요하다. 강소기업 중심으로 다양한 고부가가치 반도체 업체가 생길 수 있는 기반이 갖춰져야 한다. 아울러 연구·설계 서비스 및 반도체 생산에 특화한 중소기업이 나와야 한다. 그래야만 이 분야에서 한국을 앞지른 중국을 따라잡을 수 있다. 다행히 중국은 그동안 최종 제품 생산에만 집중해 스스로 부가가치를 훼손해왔다. 최근 중국 정부는 이런 문제점을 인식하고 차량용 반도체의 가치사슬을 확대 생산할 구조조정 플랜을 짜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아직까지 이 분야는 한국이 빠르게 앞설 수 있는 여지가 충분하다. 전기차 충전 네트워크 구축이 제대로 시행된다면 중국에 뒤처진 차량용 반도체 분야에서도 역전의 기회를 만들어 낼 수 있다국영기업의 효율성 향상을 위한 민영화 목소리가 높았다. 국영기업은 이런 문제점을 보완하기 위해 신규 사업을 통해 수익성 증대를 모색해 왔다. 전력·통신·건설 관련 국영기업은 기술과 노하우 면에서 경쟁국가 보다 높은 수준이다. 한국은 이런 4차 산업혁명 시대에 딱 맞는 영토 크기와 경제구조를 가진 몇 안 되는 나라다. 미국·유럽은 하고 싶어도 못하는 제약이 많다. 한국이 4차 산업혁명 시대에 강소국으로 거듭나려면 정확한 분석 없이 그저 남의 뒤 따라갔던 ‘패스트 팔로워’는 이제 버려야 한다. 제대로 된 청사진 아래 전기차·자율주행차 부문에서 국영기업의 인프라를 활용해 성공스토리를 만들어 낼 수 있다.
김태진 - 모빌리티솔루션즈코리아 CEO 겸 자율주행연구소장(tj.kim@globalmsk.com)이다. 중앙일보 자동차 전문기자 출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