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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으로 읽는 경제원리] '거울나라의 앨리스'의 '붉은여왕 효과' 

 

박병률 경향신문 기자
루이스 캐럴 원작의 계속 달려도 제자리인 체스판 장면 ... 퍼스트 무버라야 생존 가능

▎루이스 캐럴의 [거울나라의 앨리스].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다. 정원에 있다가 기차여행을 하고 있고, 가게 계산대에 앉았다가, 작은 배에 올라타 있다. 톡톡 튀는 미친 상상력을 헉헉대며 좇다 보면 어느새 이야기가 끝난다. 루이스 캐럴의 [거울나라의 앨리스] 얘기다. [거울나라의 앨리스]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출간 6년이 지난 1871년에 나온 후속작이다. 루이스 캐럴은 필명이다. 본명은 찰스 루트위지 도드슨이다. 루이스 캐럴은 크라이스트 칼리지 학장의 둘째 딸인 앨리스 리델을 좋아했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는 30세의 루이스 캐럴이 7세인 앨리스에게 자필로 써준 선물이었다. 루이스 캐럴은 12세가 된 앨리스에게 청혼을 하지만 그녀의 부모에게 거절을 당한다. 이후 루이스 캐럴은 평생 독신으로 살았다. 앨리스도 다른 남자와 결혼했지만 이혼한다. 그녀는 말년에 루이스 캐럴로부터 받은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판권 수입과 루이스 캐럴이 보냈던 편지를 팔아 살았다고 한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후속작


▎9월 5일(현지시간) 우즈베키스탄 타슈켄트 분요드코르 경기장에서 열린 2018 러시아월드컵 아시아지역 최종 예선 한국과 우즈베키스탄의 경기. 한국은 이날 우즈벡과 0-0으로 비겼지만 월드컵 본선 진출을 확정했다. 그러나 예선에서 중국·카타르에 잇따라 패하는 등 부진한 모습을 보였다. / 사진:연합뉴스
[거울나라의 앨리스]는 앨리스 리델와 헤어진 후 쓴 작품이다. 앨리스에게 체스를 가르쳐 주던 경험을 토대로 집필한 것으로 알려졌다. 소설 곳곳에는 그녀에 대한 그리움이 묻어있다. 줄거리는 이렇다. 앨리스는 전편에 등장하는 엄마고양이 다이너의 검은 아기고양이 키티와 놀고 있다. 그러다 문득 벽난로 위에 있는 거울 속 집은 어떤지 궁금해졌다. 앨리스가 선반에 올라서자 거울이 녹아내린다. 앨리스는 자신도 모르게 거울 속 방으로 뛰어든다. 거울나라에서 앨리스는 체스의 말인 붉은왕과 붉은여왕, 하얀왕과 하얀여왕을 만난다. 알고 보니 거울나라는 체스판과 닮았다. 몇 개의 작은 개울은 가로로 흐르고, 개울 사이의 땅은 개울과 개울을 이으며 세로로 쳐진 초록빛 작은 산울타리를 통해 정사각형으로 나뉘어 있다. 붉은여왕은 앨리스에게 제안한다. “원한다면 하얀여왕의 졸을 할 수 있어. 두 번째 칸에서 시작하면 될 거야. 네가 여덟 번째 칸에 도착하면 여왕이 되는 거지.” 얼결에 게임에 참여한 앨리스는 붉은여왕과 함께 달린다. 그런데 이상하다. 달려도 달려도 나무와 주변의 다른 것이 전혀 바뀌지 않는다. 아무리 빨리 달려도 주변의 것을 앞서나가지 못한다.

앨리스가 ‘주변의 모든 게 우리랑 함께 달리는 거야?’라고 궁금해 할 무렵 여왕이 말한다. “더 빨리! 말하지 말고.” 앨리스의 귓가로 바람이 윙윙 불어댔고, 머리카락은 뽑혀나갈 듯이 휘날렸다. 그런데도 주변의 나무는 똑같았다. 그제서야 앨리스가 외쳤다. “말도 안돼. 모든 게 아까와 똑같아요. 제가 사는 곳에서는 오랫동안 달리고 나면 보통 다른 곳에 도착해요” 그러자 여왕이 말한다. “정말 느린 나라구나! 여기서는 만약 다른 곳에 가고 싶으면 적어도 두 배는 더 빨리 달려야 해!”

[거울나라의 앨리스]의 이 장면을 주목한 과학자가 있다. 미국의 진화생물학자인 밴 베일런이다. 그는 계속 발전하는 경쟁 상대에 맞서 끊임없이 변화하지 않는 주체는 결국 도태된다는 가설을 세웠다. 열심히 달리지만 주변도 달리는 한 제자리를 벗어날 수 없는 앨리스의 모습은 그의 가설과 딱 맞아떨어졌다. 베일런은 이런 현상을 ‘붉은여왕 효과’라고 이름 붙이고는 1973년 자신의 논문인 ‘새로운 진화 법칙(A N ew Evolutionary Law)’에 담았다. 붉은여왕 효과는 붉은여왕 가설, 혹은 붉은여왕의 달리기라고도 한다. 베일런은 “생명체들은 모두 진화하는데 진화의 속도는 차이가 난다”며 “다른 생명체에 비해 상대적으로 진화가 더딘 생명체는 적자생존에 따라 소멸된다”고 주장했다.

1996년 붉은여왕 효과는 경영학에 접목됐다. 미국 스탠퍼드 대학 교수인 윌리엄 바넷과 모튼 헨슨의 공동논문 ‘조직 진화 내의 붉은여왕(The Red Queen in Organizational Evolution)’이 계기가 됐다. 이들은 경쟁에서 성과를 높인 기업은 시장에서 승자가 되지만 오래 지속되기는 힘들다고 봤다. 후발주자는 선발주자의 장점과 단점을 알기 때문에 훨씬 빨리 달릴 수 있다는 것이다. 이른바 패스트 팔로어(fast follower)이다. 후발주자는 선발주자의 성공 사례만 흡수하며 시행착오 없이 재빠르게 시장에 진입할 수 있다. ‘1등을 하는 것보다 지키기가 어렵다’는 것은 이 때문이다.

국내 대기업들은 세계 시장에서 ‘패스트 팔로어’였다. 삼성전자와 하이닉스는 뒤늦게 반도체 기술을 습득하고도 재빨리 선발주자를 따라잡았다. 아이폰이 원조지만 갤럭시 시리즈는 한때 세계 시장에서 맹위를 떨쳤다. 문제는 지금이다. 명실상부한 세계 1위로 올라선 지금 한국 기업들은 ‘퍼스트 무버(first mover)’가 되어야 하지만 이게 쉽지 않다. 세상에 없는 기술과 시장을 개척해본 경험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어디에 투자할지 모르겠다’는 대기업들의 고민은 이와 무관하지 않다.

자유경쟁 시장에서는 새로운 경쟁기업이 끊임없이 등장한다. 아무리 성공한 기업이라도 혁신을 멈추는 순간 곧바로 도태될 수 있다. 세계 최고의 핸드폰 제조업체였던 노키아가 그렇게 쉽게 무너질 것이라고 상상한 경제 전문가는 별로 없었다. 올 들어 현대차그룹이 어렵다는 얘기가 들린다. 세계적인 자동차 메이커들과 중국 자동차 업체 사이에 낀 현대·기아차의 상황이 녹록하지 않아 보인다. 더딘 변화가 망치는 사례는 스포츠에서 흔히 볼 수 있다. 급변하는 세계적 흐름을 적극적으로 흡수하지 못하면 국제무대에서 바로 밀려나버린다. 한국 축구가 러시아월드컵 예선에서 중국·카타르에 잇따라 진 것은 ‘어쩌다 일어난 일’이 아닐지 모른다. 중국과 카타르는 막대한 자금을 바탕으로 자국 축구에 엄청난 투자를 해왔다.

러시아월드컵 예선에서 부진한 한국 축구 

앨리스는 첫 두 칸은 기차를 타고 이동한다. 체스에서 졸은 첫 수에 두 칸을 움직이기 때문이다. 네 번째 칸은 트위들디와 트위들덤의 땅이다. 다섯 번째 칸은 물로 가득차 있고, 여섯 번째 칸은 험프티 덤프티의 땅이다. 일곱 번째 칸은 숲속이다. 여덟번째 칸에서는 여왕이 되어 축제를 즐긴다. 앨리스가 개울을 뛰어넘으면 새로운 칸으로 이동한다. 여덟 째 칸에 도달한 앨리스는 마침내 왕관을 쓴다. 하지만 축제는 엉망이 된다. 깨고 보니 꿈이었다. 붉은여왕은 검은 아기고양이 키티, 하얀여왕은 하얀 아기고양이 스노드롭, 험프티 덤프티는 엄마고양이 다이너일 것이라고 앨리스는 추측한다.

[거울나라의 앨리스]의 마지막에는 21행으로 된 시가 있다. 루이스 캐럴은 앨리스를 더 이상 만나지 못하는 마음을 여기에 꼭꼭 숨겨뒀다. 시는 7월의 화창한 하늘 아래 아이들 셋과 함께 뱃놀이를 했던 때를 그리워하는 내용이다. 재밌는 것은 싯구다. 각 행의 첫 알파벳을 위에서부터 아래로 읽으면 앨리스의 이름인 ‘Alice Pleasance Liddell’이 된다. ‘인생, 꿈이 아니라면 무엇일까(Life, what is it but a dream)’. [거울나라의 앨리스]의 마지막 문장이다. 루이스 캐럴에게 가장 아름다웠던 순간은 앨리스와 뱃놀이 하던 그때였다. 다시는 되돌릴 수 없는, 지나간 그 시간이 그에는 하룻밤의 꿈처럼 느껴졌을까. 하긴 루이스 캐럴만 그러랴. 인생은 한바탕의 봄꿈(一場春夢)이라는 것, 좀 살다 보면 깨닫게 되는 건 인지상정이 아닌가.

1401호 (2017.0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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