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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태의 보스와 참모의 관계학(29) 선조와 유성룡] 전란의 책임 뒤집어쓴 유성룡 

 

김준태 칼럼니스트이자 정치철학자
임진왜란 막바지까지 전시(戰時) 조정 이끌어 … 스스로 죄 지어 낙향

촉한의 황제 유비는 자신의 수석참모인 제갈량을 두고 “나에게 공명(孔明)이 있음은 물고기에게 물이 있는 것과 같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수어지교(水魚之交)라는 고사성어를 유래한 이 말은 보스와 참모의 관계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물고기는 물이 없으면 살지 못하고, 물은 물고기 없이는 의미를 실현할 수 없듯이, 보스와 참모는 진정한 한 팀이 될 때 비로소 빛을 발한다. 이 연재에선 한 팀을 이루는 바로 그 과정에 주목한다. 어떻게 보스를 선택하고 참모를 선택하는지, 어떤 식으로 관계를 맺으며 서로에게 도움이 되었는지 역사 속의 사례로 살펴본다


▎선조 때의 재상 유성룡과 그가 임진왜란 동안 경험한 내용을 기록한 [징비록]
‘목릉성세(穆陵盛世, 목릉은 선조의 능)’라는 말이 있다. 조선의 14대 임금 선조의 재위 기간(1567~1608) 동안 뛰어난 시인과 문장가들이 대거 등장하는 등 문화가 크게 융성한 것을 가리킨다. 성혼·이이·허준·유성룡·이순신·이원익·이항복·이덕형과 같이 조선을 통틀어서도 손꼽히는 인물들이 한꺼번에 출현했다는 점에서 인재가 번성했던 시대를 의미하기도 한다.

선조 재위 기간 인재 수없이 나왔지만…

그런데 ‘융성한 세상(盛世)’이라는 표현과는 달리 우리가 갖고 있는 선조 대의 이미지는 오히려 ‘난세’에 가깝다. 동인과 서인의 당쟁, 정여립의 옥사, 무엇보다 이제껏 겪어본 적이 없던 임진왜란이라는 대참화는 이 시기를 혼란과 어둠, 고난의 시간으로 기억하게 한다. 수많았던 인재들 역시 선조가 이들을 등용해 국난을 헤쳐 나갔다고는 하나 과연 이들의 재능과 역량을 제대로 활용했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있다. 특히 지난 번에 살펴본 율곡 이이와 이번 회에서 살펴볼 서애 유성룡은 큰 아쉬움을 남긴다.

유성룡(柳成龍, 1542~1607)은 퇴계 이황의 제자로 동인이 남인과 북인으로 분기하면서 남인의 대표격이었던 인물이다. 임진왜란 당시 그는 평안도 도체찰사로서 조선에 파병된 명나라 군대에 대한 군수보급을 책임졌다(선조 25년 12월 1일). 국토가 대부분 적들에게 침탈당하고 통치시스템이 붕괴되다시피 한 상황에서 수만 명에 대한 보급이 차질 없이 이루어지도록 한다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었다. 그러나 유성룡은 그 어려운 걸 해낸다. 실록은 ‘유성룡이 군량과 마초를 마련하였기 때문에 공급에 부족함이 없었다’고 기록하고 있다(선조 26년 1월 1일).

선조는 이런 유성룡을 1593년(선조 26년) 11월, 영의정에 임명했는데 이때부터 그는 전쟁이 막바지에 이르는 1598년까지 수석재상으로 재임하며 전시(戰時) 조정을 이끌었다. 유성룡은 전장을 누비며 병사들을 격려했고 민심을 안정시키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서인 재상 윤두수와 협력해 조정의 힘을 한데 모았으며 제도를 정비하고 인재를 적재적소에 배치했다. 이 기간 동안 보여준 그의 활약은 그야말로 눈부신 것이었다.

하지만 1598년(선조 31년) 11월 1일, 유성룡에게 위기가 닥친다. 그의 동지 이순신이 노량해전에서 적을 패퇴시키고 장렬히 전사했다는 기록이 실록에 담긴 바로 그 날, 그는 정인홍의 제자 문홍도로부터 살벌한 내용의 탄핵을 당했다. 이경전·남이공·이이첨 등 북인계 신하들이 주축이 된 이 탄핵의 핵심은 유성룡이 임금의 명을 거역했고 화친을 주장해 나라를 팔아먹으려 했다는 것이다. 결국 유성룡은 파직돼 고향으로 내려왔는데 얼마 후 관직이 회복되었지만 다시는 조정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그렇다면 유성룡은 대체 왜 탄핵을 당했고 조정에서 물러나야 했을까. 직접적인 계기는 이른바 ‘무술변무(戊戌辨誣)’ 때문이다. 무술년(1598년), 명군의 경리(총지휘관) 양호가 울산전투에서 명군이 상당한 피해를 입었음에도 대승을 거두었다며 황제에게 허위 보고를 하자, 명나라의 병부주사 정응태가 이를 탄핵했다. 격노한 황제는 양호를 본국으로 소환했는데 선조가 그를 변호하겠다고 나서면서 정응태의 심기를 건드린다. 정응태는 ‘조선이 양호와 결탁해 황제를 기망했고’ ‘왜와 공모해 요동을 침범하려 한다’며 무고했다.

당황한 선조는 대명외교에서 뛰어난 능력을 발휘해온 영의정 유성룡을 변무사(잘못 알려진 사실을 해명하는 사신)로 삼아 정응태의 무고를 밝히고 사태를 무마하고자 했다. 그러나 유성룡이 팔순 노모를 봉양해야 한다는 이유를 대며 거절한 것이다(선조 31년 9월 1일). 관직에 있는 사람이 임금의 명을 거역한다는 것은 크나큰 불충으로 탄핵을 당하고 처벌을 받아도 이상할 것이 없는 상황이었다.

여기에 대해 유성룡이 평소 자신과 사이가 좋지 않았던 데다가 조선을 핍박한 양호를 변호하고 싶지 않아서 였을 것이라는 견해가 있지만 이는 그의 그릇을 너무 좁게 본 것이다. 양호를 옹호할 경우 명나라 내부의 권력 투쟁에 휘말려 자칫 조선에 더 큰 화가 닥치리라고 예상했기 때문이라는 판단도 적절해 보이지 않는다. 만약 그렇게 생각했다면 정응태의 무고를 해명하되 양호에 대한 옹호만큼은 포기하라고 간언했을 것이다. 선조는 “내가 양 경리(양호)를 위해 죽더라도 그것을 영광으로 여겨 지하에서 웃을 것이다”라고까지 말했는데(선조 31년 9월 1일), 유성룡은 아무런 반론도 제기하지 않았다. 어디까지나 주관적인 판단이지만 유성룡은 스스로 위기를 초래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전쟁이 끝나게 되면, 전쟁을 예견하지 못한 책임, 국방력을 갖추지 못한 책임, 전쟁 과정에서 일어난 여러 가지 잘잘못에 대한 책임 추궁이 일어날 것이고, 그것에 대해 누군가는 책임을 져야 한다. 전쟁이 일본에 대한 완벽한 응징으로 귀결되지 않고, 조·명·일 삼국 간의 강화로 종결될 것이 예상됨에 따라 조선 백성들의 울분을 떠안을 사람도 필요하다. 그것을 임금에게 요구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개전 당시의 좌의정이자 도체찰사 겸 영의정으로 전쟁 기간 동안 조정을 이끈 자신이 그 무게를 짊어져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차제에 자신이 먼저 잘못을 만듦으로서 탄핵을 유발하고 모든 책임과 비난이 자신에게 향하도록 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더욱이 유성룡은 주군을 믿을 수 없었을 것이다. 선조는 원래부터가 신하를 보호해주지 않는 임금이었다. 효용가치가 있을 때는 아껴주는 것 같다가도 가치가 사라지면 이내 외면해버린다. 이때에도 선조가 “오늘날 조정이 분분한 것은 영상 때문이다”(선조 31년 9월 1일)라고 선언해버리면서 유성룡에 대한 공격은 더욱 매서워졌다. 유성룡이 사직을 청하자 그럴 것 없다며 반려했지만 탄핵을 막아주기는커녕 조장하다시피 했다. 또한 선조는 책임을 떠넘기는 임금이었다. 전쟁이 끝나고 선조는 이런 말을 한다. “지난날 내가 나라의 형세가 위급함을 걱정하여 수습할 수 없는 재앙이 일어날까 두려워하였지만 경들은 아무런 대비책도 진달하지 않았었다… (중략)…왜적이 깊이 쳐들어오자 유성룡은 체찰사의 명을 받고서도 가지 않았다”(선조 34년 2월 1일). 임진왜란이 일어난 것이 신하들 때문이며 특히 유성룡은 책무를 방기했다는 것이었다. 이 때 유성룡이 도체찰사에 임명되었는데도 가지 못한 것은 선조가 황급히 몽진을 재촉했기 때문이지 그가 늑장을 부려서가 아니다. 그런데도 적반하장의 태도를 보이는 것이다.

반대 붕당의 사관까지 극찬한 유성룡의 개혁안

따라서 그대로 조정에 남아 있으면 더 큰 화가 닥칠지도 모를 노릇. 유성룡은 아예 죄를 지어 낙향을 택한 것이라 추측된다. 이것은 조선으로서 큰 손실이 아닐 수 없는데, 임진왜란 기간 동안 유성룡이 제안한 각종 제도와 개혁 방안들은 반대 붕당의 사관들까지 극찬할 정도로 뛰어나고 조선에 절실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가 물러나면서 “모두 폐지되어 실행되지 않았는데, 유독 훈련도감만은 존속되어 오늘에 이르도록 그 덕을 보고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선조 40년 5월 1일). 만약 그가 재상으로 남아 전후복구를 담당했더라면 조선의 재건은 보다 빨라지지 않았을까? 선조가 그를 지켜주고 힘을 실어주었더라면 하는 안타까움이 남는다.

※ 김준태 - 칼럼니스트이자 정치철학자. 성균관대와 동 대학원에서 공부하고 성균관대 유교문화연구소와 동양철학문화연구소를 거치며 한국의 정치철학을 연구하고 있다. 우리 역사 속 정치가들의 리더십과 사상을 연구한 논문을 다수 썼다. 저서로는 [왕의 경영], [군주의 조건] 등이 있다.

1402호 (2017.0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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