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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광원의 ‘CEO를 위한 생태학 산책’(12) 삶의 속도] 치타는 왜 멸종 위기에 몰렸나 

 

서광원 인간자연생명력연구소 소장
급격한 환경 변화로 ‘속도’ 경쟁력 사라져 … 방향성 설정이 더욱 중요

▎사진:ⓒgetty images bank
아프리카 초원엔 속도에 관한 한 타의추종을 불허하는 녀석이 산다. 바람의 파이터 치타다. 치타는 200만~300만 년 전 덩치 큰 사자가 제대로 공략하지 못하던 재빠른 가젤들을 타깃으로 출현했다. 물론 쉬운 일이 아니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모든 걸 바꾸어야 했다. 머리 크기는 물론이고 턱과 이빨, 발톱까지 줄여 스피드를 높였다. 대신 호흡량 확대를 위해 코에서 심장으로 가는 통로를 대폭 넓혔고 심장도 크게 키웠다. 가젤 사냥에 전문화·차별화한 것이다. 덕분에 치타는 네 발 달린 동물 중에서 가장 빠른 속도를 자랑할 수 있었고 시쳇말로 잘 먹고 잘 살 수 있었다.

속도 높일 수 있게 진화한 치타


▎시대적 전환기가 삶을 어떻게 휩쓸어 가는지, 이런 광풍에 휩쓸리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담은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명저 [월든].
그런데 이 최고의 능력자가 지금 멸종 위기에 있다. 인간의 보호가 아니면 언제 사라질지 모르는 상황이다. 현재 야생에 남은 치타는 많아야 2000~3000마리뿐. 최고 속도라는 능력을 잃은 걸까? 아니다. 녀석은 여전히 가장 빠른 속도로 달린다. 그런데 왜 막다른 골목에 몰려 있을까? 치타를 이 지경으로 만든 건 아이러니하게도 치타를 멸종 위기에서 보호하고 있는 인간이다. 아프리카 전역에 개발 바람이 불면서 치타가 달리던 초원을 가축 방목장과 옥수수 밭으로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초원이 급격하게 줄어들면서 가젤 또한 덩달아 줄어드는 데다 생존공간이 좁아지다 보니 별로 만나고 싶지 않은 사자와 하이에나들과도 자주 부딪친다. 만나고 싶지 않은 건 속도를 얻기 위해 덩치를 희생한 바람에 몸무게가 40~50kg 밖에 안 되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상대가 안 된다. 애써 잡은 먹이를 눈앞에서 억울하게 빼앗기는 일이 한두 번이 아니다.

바뀌는 환경에 적응하는 일은 오랜 노력과 시간을 필요로 하는 법인데, 환경이 워낙 빠르게, 그것도 다른 방향으로 변하다 보니 치타는 대처할 시간이 없다. 자연은 언제나 그렇듯 개체의 이런저런 사정을 봐주지 않는다. 능력이란 과거형이 아니라 현재형이어야 하고, 어제가 아니라 오늘의 환경에 맞는 것이어야 하는데, 이런 제대로 된 능력을 미리 준비하지 못한 생명에게 자연은 혹독한 대가를 치르게 한다. 어제까지 아무리 잘 살아왔더라도 오늘의 환경에 맞는 능력이 없으면 어떻게 되는지 자연은 치타를 통해 알려주고 있다.

자연은 기본적으로 경쟁을 토대로 하기에 속도는 언제나 생사를 가르는 요인이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하지만 치타의 삶에서 보듯 속도는 그 자체로 전부일 수 없다. 나무를 오랫동안 키워 본 사람들은 빨리 자라는 나무는 빨리 죽는다는 걸 안다. 하루가 다르게 쑥쑥 자라 옆 나무를 한참 앞질러 가는 나무는 언제까지 그렇게 살 것 같지만 세상은 묘하게 공평하다. 그런 속성수는 빨리 자라는 만큼 빨리 사라진다. 반면에 느리게 꾸준히 자라는 소나무나 은행나무는 몇 백년을 산다. 굵고 지속성 있게 산다. 깊이 뿌리를 내려 웬만해서는 끄덕하지 않는다.

속성수는 빨라 자란 만큼 빨리 사라져

불과 얼마 전인 1980년대만 해도 전국 각지에 산재한 아까시나무는 우려의 대상이었다. 모든 숲을 잠식할 게 뻔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젠 보기조차 힘들다. 그 많던 아까시 나무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기껏해야 20~30년 밖에 못 사는 수명을 가진 까닭에 ‘자연스럽게’ 사라져 가고 있다. 쉬지 않고 달리기만 하면 오래 달리지 못하듯 나무도 마찬가지라는 것이 연구자들의 말이다. 1년 내내 쉬지 않고 숨가쁘게 자라다 보니 우리로 치면 피로도가 높아져 수명이 짧아지는 것이다. 세계적으로 오래 사는 나무를 연구했던 미국의 에드먼드 슐먼은 빠르고 맹렬하게 자라는 나무가 오래 살 것 같지만 사실은 그 반대라는 걸 일찌감치 발견한 학자다.

하지만 경쟁이라는 상황에 갇히면 속도가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깨닫는 건 지극히 쉽지 않은 일이 된다. 그래서 이런 세상을 살게 된다.

세상은 지금 “가느다란 전선이 생각의 고속도로가 되고 있다.” 사람들은 “조리 있게 이야기하기보다는 더 빨리 이야기하려고” 하고, “가벼운 읽을거리로 지적능력을 소모시켜 버린다.” “독서를 잘한다고 하는 사람들까지도 양서를 읽지 않는다. (…) 대학물을 먹고 이른바 교육을 잘 받았다고 하는 사람들조차 고전에 대해 거의 또는 전혀 아는 바가 없다.” 이뿐인가? “정신을 위한 자양분은 등한시하면서도 육체를 위한 자양분이나 육체적인 질병에는 비용을 아끼지 않는다.” “어떤 유명한 사람과 만났는지, 저녁을 얼마나 높은 사람들과 먹었는지를 내세우는 게 자랑거리”가 되다 보니 “오늘날 철학교수는 있지만 철학자는 없다.”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을 신랄하게 지적한 것 같은데 사실 이 한탄은 벌써 172년이나 된 오래된 것이다. 나중에 자연주의 철학자가 된 헨리 데이비드 소로가 당시 미국 동부 사람들을 보며 쓴 것이니 말이다. 172년 전인 1845년이면 말할 것도 없는 옛날이다. 당시 이 땅에 있던 조선은 주변 상황을 몰랐고, 제대로 알려고도 하지 않았기에 엉거주춤 세상에 끌려가고 있었지만 미국 동부는 엄청난 변화를 겪고 있었다. 어느 날 수많은 사람과 물건을 대량으로 이동시켜 주는 철도가 속속 방방곡곡으로 달리면서 멀리 떨어져있던 다른 세상을 가깝게, 더 가깝게 연결하고 있었고, 그 5년 전인 1840년 등장한 전신, 즉 전보는 연결을 거리가 아닌 시간으로, 오랜 기다림을 눈 깜짝할 사이로 만들어 버렸다. 기껏해야 말이 달리던 속도에 익숙해 있던 세상은 철마(鐵馬)의 속도를 따라가기 바빴고, 전보의 속도로 달려야 했다.

전에 없던 연결이 세상을 혁명적으로 바꾸면서 삶의 속도가 급격하게 가속되고 있었다. 가끔 먼 곳에서 들려오는 소식이 반가웠던 시절은 가고 시시각각 변하는 세상에서 숨차게 뛰어야 하는 시대가 됐다. 너도나도 바빠야 했다. 누군가는 신나게 시대의 흐름을 타고 앞으로 달려 나갔지만 그러지 못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뒤쳐져야 했다. 빈부 격차가 벌어지기 시작했고 “괜찮은 집을 하나 마련하려면 부양가족이 없는 노동자라도 10년에서 15년을 모아야 했으며” 다들 그렇게 하다 보니 “집 한 채 마련하느라고 평생 가난에 쪼들리면서 살고 있는” 사람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다들 “들떠 있고 신경질적이며 어수선한” 세상에서 살고 있었다.

속도가 전부는 아니다

꼭 이렇게 살 수밖에 없을까? 이게 최선인가? 명문 하버드대를 졸업하고 고향에서 학교를 운영해 상당히 인정받기도 했던 28살의 전도유망한 젊은이는 휘몰아치는 광풍 속에서 한 걸음 벗어나 그런 시대의 광풍과 세상을 관찰해 보기로 했다. 어릴 적부터 자주 다니던 근처 호숫가 숲 속에 통나무 집을 짓고 자연 속에서 인간을 지켜보기로 한 것이다. 정신 없이 휩쓸려 가는 게 아니라 “인생을 천천히 의도적으로 살아보기 위해서” “삶의 본질적인 사실들을 직면해보기 위해서” “그리하여 마침내 죽음을 맞이했을 때 내가 헛된 삶을 살았구나 하고 깨닫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 “쫓기듯이 인생을 낭비해가면서 살아야 하는” 세상을 벗어나기로 했던 것이다.

월든 호수가 내려다 보이는 통나무 집에서의 2년2개월은 자연과 세상에 대해 많은 걸 알 수 있게 했던 시간이었다. 여우들은 생각만큼 영리했고 철새 오리들은 예상 외로 영리했다. 부드럽게 오는 봄은 망치를 든 우레의 신 토르보다 훨씬 더 큰 힘을 갖고 있었다. 물론 더 중요한 것도 알게 됐다. 세상에서 한걸음 밖으로 걸어 나온 그는 빠르게 흘러 가는 세상에서 정신 없이 뛰다가 자신을 잃어버리는 사람들을 자주 볼 수 있었다. “길을 잃고 나서야 (…) 세상을 잃어버리고 나서야 비로소 자기 자신을 발견하는” 사람들이었다. 반면에 그는 세상에서 떨어져 있었음에도 “조그만 책 한 권 말고는 아무것도 잃어버린 것이 없었다.” 아니 사실은 세상을 보는 눈을 가질 수 있었다. “우리는 너무 자주 만나기 때문에 각자 새로운 가치를 획득할 시간적 여유가 없다. 우리는 너무 얽혀 살고 있어서 서로의 길을 막기도 하고 서로에게 걸려 넘어지기도 한다. 그 결과 우리는 서로에 대한 존경심을 잃어버렸다.” “우리는 핵심에서 벗어난, 일시적인 일들만 주요 관심사로 삼는다. (…) 우리의 정신이 교란되는 근본 원인이다.”

그는 근본적인 처방책이 뭔지도 알 수 있었다. “하루를 의도적으로 보내자.” (흘러가는) 물결에 떠내려가지 말고 “율리시스처럼 돛대에 몸을 묶어 (우리를 유혹하는) 세이렌을 외면하면서 그 소용돌이 옆으로 빠져나가자. 만약 (세이렌의) 기적이 울면목이 쉴 때까지 울도록 내버려두자. (…) 그러면 행복감 속에서 삶을 마치게 되리라. (…) 우리가 살아 있는 한 우리가 할 일을 해나가도록 하자.”

헨리 데이비드 소로는 시대적 전환기가 삶을 어떻게 휩쓸어 가는지, 이런 광풍에 휩쓸리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명저 [월든]에 남겼다. 속도가 전부가 아니라는 걸, 그리고 진짜 필요한 속도는 남들처럼 달려가는 게 아니라 우리가 해야 할 일에서 나와야 한다는 것을, 그래서 하루하루를 의도적으로 보내야 한다는 것을 세상에 알렸다. 간디와 법정스님에게까지 영향을 미친 삶의 태도다.

손정의, 미국 유학으로 인생 목표 달성할 추진력 얻어


▎어려운 집안 형편에도 유학을 결심한 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은 ‘장래의 가족을 책임지겠다’는 명확한 목표가 있었다. 또 사업에 필요한 종자돈을 빨리 마련하려면 미국 유학이라는 속도가 필요했다.
생명체가 가진 삶의 속도는 보통 세 가지에서 나온다. 바람직한 적응이든 아니든 지금까지 살아 온 (또는 일해온) 방식과 지금 당면한 상황, 그리고 지향하는 목표가 그것이다. 앞의 두 가지가 전술적 속도라면 나머지 한 가지는 전략적 속도다. 어떤 삶의 속도를 가져야 할까? 지금까지 그렇게 해왔기에 오늘도 내는 속도나 발등에 불이 떨어지는 상황에서 나온 속도는 지속적인 생산성을 만들어내지 못한다. 나만의 목표에서 시작되는 속도야말로 필요하고도 의도적인 속도다.

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은 고등학교 시절 미국 유학을 가겠다고 했다가 친척들에게 엄청난 욕을 먹어야 했다. 과로로 쓰러진 아버지를 대신해 형이 고교를 중퇴한 채 생계를 이어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자기만 살려고 하는 냉정한 놈”이라는 소리를 들었지만 그는 갔다. “형이 현재의 가족을 책임지면 나는 장래의 가족을 책임지겠다”는 명확한 목표가 있었다. 또 하나, 사업을 하려면 종자돈도 필요했다. 이 목표를 달성하려면 남다른 속도, 그러니까 미국 유학이라는 속도가 필요했다. 덕분에 그는 필요한 속도를 얻을 수 있었고 지금도 누구보다 빠른 속도로 미래로 달려가고 있다.

‘최선’이란 살아가는 속도의 다른 표현이다. 아무데나 최선을 다하는 건 아무 곳으로나 달리는 것과 같다. 힘은 빠지고 숨이 가빠져도 남는 게 없다. 또 다시 달려야 할 곳만 무수하게 남아 있을 뿐이다. 최선이 의미 있는 성과로 이어지려면 방향에서 나온 속도, 방향이 있는 속도여야 한다.

지금 내가, 또는 우리 회사가 다하고 있는 최선은 어디서 나오고 있는가? 또 어디로 향하는 최선인가? 지금까지 그렇게 해왔기에, 또 세상이 그렇게 하고 있기에 나도 하는 최선인가, 아니면 나만의 목표에서 나온 최선인가? 치타는 적절한 목표 설정에서 만들어 낸 최고의 속도로 바람의 파이터가 됐지만 바로 그 최고의 속도에 너무 의존하는 바람에 비극의 주인공이 되어 가고 있다. 세상 밖으로 나가 세상을 보고, 조직 밖으로 나가 조직을 보는 눈이 필요할 때다.

[박스기사] 우리는 왜 바쁠까?

해야 할 일이 없는 것만큼 괴로운 일도 없지만, 해야 할 일을 못할 만큼 바쁜 것도 못지 않게 괴롭다. 우리는 왜 바쁠까? 워싱턴포스트의 기자이자 두 아이를 키우는 브리짓 슐트에게 하루는 바쁨 그 자체였다. 스타벅스에서 여유롭게 커피를 마시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도대체 이들은 어떤 사람일까, 궁금했을 정도로 말이다. 그런데 50년 이상 시간관리를 연구한 메릴랜드 대학의 사회학자 존 로빈슨은 그에게 예상 외의 말을 했다. 일주일에 무려 30시간의 여유시간이 있을 텐데 무슨 소리냐는 것이다. 나에게 그런 시간이 있다고? 하루하루 눈 코 뜰 새 없는데? 기자 정신이 발동한 그는 발품을 통해 확인에 들어갔다. 결과는? 사실이었다. 취재 중에 만난 사회학자 에드슨 로드리게즈는 이렇게 말했다. “사람들은 누가 더 바쁜지 경쟁하고 있어요. 자신의 지위를 과시하는 거죠. 바쁜 사람이 중요한 사람이고, 바쁜 삶이 충실하고 가치 있는 삶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다들 ‘당신보다 내가 더 바쁘다’고 자랑해요. 자신이 이웃들만큼 바쁘지 않으면 더 분발해야 한다고 생각하죠.” 무엇보다 현대사회 자체가 바쁘게 살아야 정상이고, 속도가 미덕이라고 압박하고 사람들은 이런 사회적 기대에 순응한다. “하루라도 바쁘지 않으면 뭔가 잘못된 것처럼” 말이다. 무엇보다 자신만의 방향이 없다 보니 다른 사람들처럼 살게 되고 당장 발등에 불 떨어진 걸 해결하다 보니 날마다 바빠진다. 사실은 휩쓸려 가느라 바쁜 것인데 말이다. 우리가 바쁜 두 번째 이유는 우리도 모르게 허투루 쓰는 시간이 많기 때문이다. 갑자기 생기는 자투리 시간을 별 생각 없이 허비하는 것만 줄여도 많은 시간을 벌 수 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많은 심리학 연구에서 나오듯 인정 욕구를 채우느라 시간을 허비한다. 남들에게 인정받지 않아도 되는 일에서도 인정받기 위해 하지 않아도 될 일을 하느라 바쁘다.

※ 필자는 인간자연생명력연구소 소장이다. 조직과 리더의 지속가능한 성장을 위한 콘텐트를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 [사장으로 산다는 것] [사장의 길] [사자도 굶어 죽는다] 등이 있다.

1402호 (2017.0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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