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umn

저무는 것과 여무는 것 

 

이상호 참좋은여행 대표

세월의 속도는 나이에 비례한다고 했던가. 어느새 시속 60㎞. 올해도 이제 두 달 남았다고 생각하니 괜히 가슴이 철렁하다. 연간 실적도 대략 맞춰보고 내년 계획도 벌써 잡아야 하는데 도대체 뭐 하나 제대로 해놓은 것이 없는 것 같아서다. 그러고 보니 해마다 이맘때면 가벼운 우울증이 도지곤 했다. 단지 가을이라서 그런 것만은 아니라는 걸 잘 안다. 잠시라도 머리를 식히려 덕수궁 근처를 거니는데, 옛 서울시청 건물 외벽에 걸린 현수막이 눈에 들어온다. ‘저물어 가는 게 아니라 여물어 가는 겁니다’. “아!” 이토록 간단한 열일곱 글자에게 위로를 받을 줄이야.

그동안 인생의 50대를, 회사의 마지막 분기를, 하루의 저녁을, 1년의 가을을 ‘저물어 간다’고 생각했던 것은 아닐까. 저무는 것과 여무는 것. 글자 하나가 달라졌을 뿐인데 그 단어가 갖는 모든 의미와 지금껏 생각해왔던 모든 관점이 확 바뀌어 버렸다. 그래, 가을의 농부에게는 해가 가는 아쉬움보다는 수확의 기쁨이 더 큰 것이겠지. 맨몸으로 미지의 세계에 첫 발을 떼는 것도 아니고, 마르지 않는 물과 식량을 지닌 채로 걸어온 길을 계속 걸을 뿐인데 무엇이 걱정이랴.

사실 경영자의 ‘가을 우울증’이란 뻔하지 않은가. 실적이 좋아도 고민 나빠도 고민, 회사 인원을 지금대로 유지하고 가는 것이 맞는지 공격적으로 늘려야 하는 건지, 연구개발(R&D)는 어느 종목에 얼마만큼 투자하고 신경 써야 하는지, 미래 먹거리를 책임질 우리 회사의 신성장 동력은 무엇인지. 여기에 요즘처럼 어디로 튈지 모르는 미국과 북한 관계 같은 국제정세 문제와 슬금슬금 요동칠 준비를 하는 금리 문제까지 끼어들면 고민의 수준은 번뇌로까지 발전한다. 이 모든 생각이 가을에 한꺼번에 몰려오니 가슴이 답답할 수밖에. 올 한 해 유난히 길었던 연휴 특수로 좋은 실적을 거둘 수 있었던 여행사의 최고경영자(CEO)임에도 크게 만족스럽지 않았던 것도 그래서일지 모른다. 해가 바뀐다고 해서 지금까지 쌓아온 결과물이 전부 ‘리셋(reset)’되는 것도 아닌데, 열심히 살아왔던 지난 열 달이 남은 두 달보다 더 소중하다는 것을 왜 이제야 깨달은 것일까.

이 가을, 경영자와 똑같은 우울증을 앓고 있을 것이 분명한 사람들이 또 있다. 바야흐로 취업시즌, 어제 신입사원 선발 최종 면접장에서 만난 취업준비생들이다. 모두들 개구리 배 부풀리듯 한껏 각자를 뽐내던 젊은 친구들, 맞지 않는 옷을 입은 듯 오버하거나 어색한 모습을 보는 부끄러움은 면접관의 몫. 눈에 확 들어오는 톡톡 튀는 인재보다는 바른 인성을 가진 사원을 뽑고 싶은 면접관의 마음을 그들이 알 턱이 없으니 어쩔 도리가 없다. ‘못생긴 나무가 산을 지킨다’고 했다. 일찍 베어지기보다는 악착같이 버텨 가을을 맞이할 것, 꽃처럼 아름답게 한 철만 피었다 지기보다, 땅에 뿌리를 굳건히 박고 갖은 풍파와 시련을 견디어 낼 것. 그래서 잘 여문 채로 다음 가을을 맞이할 것.

여물고 있는 이 친구들에게 딱 한마디만 더 하고 싶다. “괜찮아 지금까지 잘했잖아. 앞으로 더 잘 될 거야. 너는 정말 멋있어. 최고야.” 덕수궁 앞에서 눈을 사로잡았던 그 멋진 간판, 그 감동적인 문안을 만든 시민이 진짜로 사람들에게 전하고 싶었던 메시지 아닐까.

1407호 (2017.1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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