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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적 측면에서 본 러시아 혁명 100년] 편중된 중공업·군수업 투자로 경제에 주름 

 

채인택 국제전문기자 ciimccp@joongang.co.kr
인간의 욕망 무시한 마르크스주의 무리한 적용 … 1991년 소련 붕괴로 역사 속으로

▎러시아군이 11월 7일(현지시간) 모스크바 붉은광장에서 1941년 있었던 군사 퍼레이드 기념행사를 열었다. 당시 러시아군은 붉은광장에서 10월 혁명을 기념한 퍼레이드를 한 후 제2차 세계대전 전장으로 향했다.
지금으로부터 딱 100년 전인 1917년 11월 7일 러시아제국의 수도 페트로그라드(현재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볼셰비키가 주도하는 10월 혁명이 벌어졌다. 앞서 3월 7일에는 물자 부족에 항의하는 노동자 파업과 이에 동조한 군대의 봉기로 2월 혁명이 터져 차르 군주제가 무너지고 임시정부가 들어섰다. 임시정부는 마르크스주의 정당인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 온건파 멘셰비키의 중심 인물인 알렉산드르 케렌스키(1881~1970)가 수반을 맡았다. 임시정부에서 소수파였던 볼셰비키는 지도자 블라디미르 레닌(1870~1924)이 그해 4월 망명 중이던 스위스에서 독일제국이 제공한 봉인열차를 타고 귀국하면서 세력을 모았다. 결국 레닌은 귀국 6개월 만에 10월 혁명을 일으켜 정권을 탈취했다. 볼셰비키 군사위원장 레프 트로츠키(1879~1940)가 무장봉기를 일으켜 1000명의 적위대가 11월 7일 새벽 2시 임시정부 거점이던 겨울궁전을 점령했다. 볼셰비키는 이날 무장봉기로 케렌스키가 이끄는 임시정부를 밀어내고 권력을 장악했다. 이 군사쿠데타를 통해 혁명 권력은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를 외치며 급진 계급혁명을 주장하던 볼셰비키에 넘어갔다. 11월 7일은 현재 대부분의 나라에서 쓰는 그레고리우스력 기준이며 당시 러시아가 쓰던 구력(율리우스력)으론 10월 25일이라 10월 혁명으로 불린다. 2월 혁명도 구력 2월 23일, 그레고리우스력으론 3월 8일에 발생했다.

첫 마르크스레닌주의 정권 수립


▎몽골인들이 2012년 10월 14일 수도 울란바토르에 마지막으로 남아 있던 러시아 혁명가 블라디미르 레닌 동상을 철거하고 있다.
이 혁명은 세계사적인 사건이었다. 2월 혁명까지는 1776년 미국 혁명과 1789년 프랑스 혁명의 계보를 잇는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왕정을 쫓아내거나 전복한 후 시민들이 정부를 세워 운영하는 민중혁명의 재연으로서 말이다. 하지만 볼셰비키의 10월 혁명은 세계사적인 사건이다. 20세기 최대의 역사적인 사건으로 보기도 한다. 최초로 마르크스레닌주의 정권을 수립했기 때문이다. 계급혁명과 프롤레타리아 독재, 노동계급 전위론, 민주집중제를 앞세운 소비에트 혁명은 러시아를 넘어 세계로 파급됐다. 형식적으로는 노동자 계급이 지배층의 핵심이 됐다. 사유재산제를 폐지하고 모든 생산수단을 공유화했다. 소련식 사회주의 경제체제는 세계에 수출됐다. 하지만 결론적으로 이 거대한 실험은 결국 실패로 끝났다. 계획경제를 추구했던 소련은 극심한 경제난으로 1991년 종말을 고했다. 러시아 혁명의 경제적 측면을 살펴본다.

러시아 혁명은 모순에서 출발했다. 유럽에서 자본주의가 가장 덜 성숙했던 후발국가 러시아에서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앞세운 혁명이 발발했다는 사실이다. 자본주의가 고도로 발전하면 역사 발전의 단계에 따라 혁명을 거쳐 공산주의로 이행한다는 마르크스주의 이론과 근본적으로 맞지 않는 혁명이었다. 유럽에서 자본주의가 발달한 영국이나 프랑스에선 혁명은 시도조차 없었다. 제1차 세계대전 직후의 혼란 속에서 독일과 헝가리에선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앞세운 혁명 시도가 있었으나 대중의 호응을 얻지 못해 실패로 끝났다. 독일에선 1919년 1월 공산주의자 카를 리프크네히트와 로자 룩셈부르크가 스파르타쿠스단이란 조직을 이끌고 무장봉기를 일으켰다가 진압됐다. 헝가리에선 1919년 3월 볼셰비키를 모델로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내세운 헝가리 공산당이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를 외치며 헝가리 민주공화국을 무너뜨리고 헝가리 사회주의 연방소비에트 공화국을 세웠지만 5개월 후 무너졌다.

러시아 혁명은 마르크스의 이론에 따른 것이라기보다 무능하고 억압적인 군주정치의 모순이 곪아서 터진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런 점에서 필연성을 찾을 수 있다. 당시 러시아제국은 가난과 열악한 노동 조건과 극심한 빈부격차로 사회적으로 분열과 대립이 극심했다. 그럼에도 로마노프 왕조는 개혁을 거부하고 시대의 흐름을 거스르는 전제 군주제를 유지하려고 인권과 언론, 사상 결사의 자유를 억압했다. 여기에 극심한 희생이 요구되는 제1차 세계대전이라는 국난을 겪는 과정에서 지도층의 탐욕과 무능함이 더욱 적나라하게 폭로됐다. 로마노프 왕조의 마지막 차르(황제) 니콜라이 2세(1868~1918, 재위1894~1917)는 국민의 불만을 제대로 헤아리지 못했다. 차르의 권위와 러시아 정교라는 신앙, 그리고 비밀경찰의 폭력을 앞세운 가혹한 통치 탓에 민심을 잃었다. 전쟁에서 잇따라 패배하고 후방에선 물자까지 부족하자 민중의 분노는 극에 달했다. 독일 아이히슈타트-잉골슈타트 가톨릭대학의 중동유럽사 담당 레오니트 루크스 교수는 역사잡지인 차이트게시히테의 러시아 혁명 특집 기사에서 “2월 혁명 당시 수도 페트로그라드에서 파업에 참가한 노동자들은 ‘우리에게 빵을 달라’라는 구호를 앞세우고 행진했다는 데 주목해야 한다”라고 지적했다.

차르 정부의 무능과 전제체의 모순이 빚은 결과


▎붉은광장 유리관에 안치돼 있는 레닌의 시신.
러시아 혁명은 국가 경제가 제대로 성장하지 못한 상태에서 차르의 위신을 앞세워 무리하게 전쟁에 참가한 로마노프 왕조의 모순이 빚었다는 분석이다. 그런 와중에 국민이 기본적인 욕구를 채우지 못한 상태에서 왕실과 귀족, 부유한 부르주아 계급에 대한 적개심이 커졌다. 결국 러시아 혁명은 차르 정부의 무능과 전제체제의 모순이 빚은 결과로 볼 수 있다.

러시아 혁명으로 권력을 장악한 볼셰비키는 무리한 계획경제를 추구했다. 이들은 10월 혁명 직후 그렇게 외쳐왔던 사회주의 경제의 실험에 들어갔다. 모든 토지와 은행을 국유화했으며 모든 공장의 운영은 노동자로 구성된 소비에트에 넘겼다. 개인 금융계좌와 교회 재산은 전액 국가가 몰수했다. 대외부채는 갚지 않겠다고 선언했으며 노동자 임금을 인상하고 노동시간은 8시간으로 줄였다. 볼셰비키는 이렇게 사적소유를 없애고 생산수단을 국유화한 후 중앙계획경제체제를 출범했다. 생산수단을 국유화하는 대신 모든 사람을 고용하고 평등 분배를 하겠다는 볼셰비키의 약속에 사람들은 솔깃했지만 이는 구호였을 뿐 현실에선 제대로 적용되지 않았다. 생산수단의 국유화와 계획경제는 인간의 자발성을 억눌러 경제를 망치는 요인이 됐다. 소련은 1920년대 일시 상당한 성장을 이루기도 했다. 집중적인 투자와 노력 동원에 따른 결과였다.

하지만 사회주의 경제를 연구한 헝가리 경제학자 코르나이 야노스에 따르면 소련은 가격통제, 공급자 중심의 경제 등 시장원리를 무시한 중앙계획경제라는 사회주의 경제방식을 가동한 후 구조적인 모순이 극에 달해 결국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고 강조한다. 코르나이 교수는 “소련을 비롯한 사회주의 국가는 경제원리를 무시하고 전시성 중공업 투자와 양적 팽창에 집착했으며 군비를 과도하게 지출했다”는 지적도 한다. 그 결과 소비재가 부족했고 경제는 파탄이 나서 1991년 소련이 무너진 핵심적인 원인을 제공한 것으로 평가한다.

특히 수요가 공급이 지배하는 시장원리를 무시하고 가격을 정부 통제에 맡기는 바람에 만성적인 물자 부족에 시달릴 수밖에 없었다. 미국과 대결한다던 소련이었지만 국내적으로는 심각한 물자 부족에 시달렸다. 옛 소련 시절 모스크바 한복판에서도 흔히 볼 수 있었던 상점 앞의 긴 줄은 계획경제의 실패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이는 숱한 농담을 낳았다. 당시 농담 하나. “이반 안토노비치, 어제 왜 레닌그라드에 갔나?” “정육점에 줄을 서려고.” “정육점은 모스크바 붉은 광장에 있지 않나?” “글쎄, 그 줄의 끝이 레닌그라드까지 이어졌더라고.” 또 다른 농담 하나. “드미트리 이바노비치, 왜 여기 서있나?” “사람들이 물건을 사려고 줄을 섰기에 따라서 섰어.” “뭘 파는 줄인가?” “글쎄, 나도 모르겠어. 일단 뭐라고 사두는 게 좋잖아.” “필요하지 않은 물건이면 어떻게 하려고.” “딴 것과 바꾸면 되잖아.” 비슷한 버전의 다른 농담. “알렉산데르 블라디미르비치, 여자 속옷 가게 앞에 왜 줄을 섰나? 부인에게 선물하려고?” “아냐, 이걸 사서 소시지와 바꾸려고.” 소련이 아무리 국민을 통제하고 감시해도 시장을 이기지는 못했던 현장이다.

시장원리 무시해 만성적인 물자 부족에 시달려


▎로마노프 왕조의 마지막 황제 니콜라이 2세는 차르의 권위와 러시아 정교라는 신앙, 그리고 비밀경찰의 폭력을 앞세운 가혹한 통치 탓에 민심을 잃었다. 전쟁에서 잇따라 패배하고 후방에선 물자까지 부족하자 민중의 분노는 극에 달했다.
소련이 정권의 생존을 위해 과시적인 중공업과 군수공업 육성에 지나치게 열중한 측면도 있다. 이런 불균형적인 경제정책은 소련의 군사국가화에도 일조하면서 소련 경제를 망치는 원인을 제공했다. 한정된 자원을 정권 유지나 과시를 위해 편중되게 사용해 경제를 흔든 것이다. 그 배경은 러시아 내전에서 찾을 수 있다. 볼셰비키는 10월 혁명 이듬해인 1918년 3월 3일 1차 대전에서 빠져 나왔다. 독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오스만 튀르크 제국, 불가리아 등 동맹국과 서부 영토 상당 부분을 넘겨주고 브레스트-리토프스크 평화조약을 맺었다. 우크라이나, 벨로루스, 발트3국 등을 떼어준 결과다.

하지만 평화는 찾아오지 않았다. 볼셰비키의 적군은 혁명에 반대하는 백군과 치열한 내전을 벌였다. 내전 결과 볼셰비키의 적군 121만 명, 백군 150만 명 정도의 사상자를 냈다. 수많은 사람이 집을 잃었으며 일부는 해외로 망명했다. 그 상황은 소설과 영화로 나온 ‘닥터 지바고’가 생생하게 보여준다. 1918년 11월 11일 1차 대전에서 승리한 연합군이 볼셰비키에 대항하는 백군을 지원하면서 러시아 내전은 국제적인 성격으로 변했다. 미국·영국(캐나다·호주·인도·남아프리카공화국 포함)·프랑스·이탈리아·그리스·일본·체코슬로바키아·폴란드·루마니아·세르비아·중화민국 등 연합국 지원군이 백군과 함께 볼셰비키와 싸웠다. 이 과정에서 볼셰비키는 제국주의 국가들의 간섭에 맞서 싸워 혁명을 수호했다는 자부심을 얻었다. 하지만 지나친 자부심은 군사국가로 이어졌고 경제엔 불균형을 더했다.

볼셰비키는 1922년 내전에서 승리하고 소비에트사회주의연방공화국(소련·USSR)을 세웠다. 러시아 소비에트공화국을 주축으로 옛 러시아제국에서 일시 독립했던 유럽 지역의 우크라이나·벨로루시는 물론 카프카스의 그루지아·아제르바이잔·아르메니아와 중앙아시아의 우즈베키스탄·카자흐스탄·키그기즈스탄·타지키스탄·투르크메니스탄 등 거의 모든 나라를 통합했다. 옛 러시아제국 영역에서 독립한 나라 중 발트3국과 폴란드, 핀란드는 제외됐다. 소련은 제2차 세계대전 중인 1939년 나치 독일과 폴란드를 분할 점령했으며 1940년엔 발트 3국을 점령해 소련에 병합했다. 소련은 1939~1940년 핀란드를 침공했지만 필사적인 저항으로 맞선 핀란드인의 의지 앞에 결국 점령에 실패했다. 핀란드는 유일한 예외다. 소련은 주변국을 무력으로 침략해 끊임없는 영토 야욕을 드러냈다. 소련이 펼친 대외정책을 혁명의 연장이 아니라 러시아제국의 팽창주의를 계승한 ‘소비에트 제국주의’로 평가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내전 과정에선 잔혹한 상호 살상극과 보복행위, 그리고 이산가족이 발생했다. 러시아 역사학자 드미트리 볼코고로프는 당시의 잔학상이 “제정 러시아 시대의 비극조차 별것 아닌 것으로 보이게 했을 정도로 지극히 비인간적이었다”라고 기술했다. 이런 끔찍한 내전은 소련 지도층으로 하여금 자국이 서구 국가에 포위당해 있다는 피해의식을 낳았다. 피해의식은 경제는 물론 군사 분야에서도 서구를 따라잡아야 한다는 강박관념으로 이어졌다. 이에 따라 소련은 군수산업 중심의 중공업에 집중 투자하고 소비재는 뒷전으로 밀렸다. 아울러 군대를 앞세우는 군사국가의 특성도 보이게 됐다. 권력의 아집과 정치적인 목적이 경제의 발목을 잡은 대표적인 경우다.

러시아 혁명은 세계로 수출됐다. 중국에선 러시아 혁명에 자극받아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중국 공산당을 창당했다. 1921년 7월 코민테른의 지도를 받아 첸두슈·리다자오·마오쩌둥 등이 상하이에 모여 중국 공산당을 창당했다. 중국 공산당은 두 차례에 걸친 국공내전(1927~36, 46~50) 끝에 1949년 10월 1일 베이징 천안문 망루에서 마오의 선언문 낭독으로 신중국을 세웠다. 민간인과 군인이 합쳐 800만~950만 명이 희생된 국공 내전의 피 위에서 건국이 이뤄졌다. 중국 공산당은 1958~62년 체제 우월성을 보여주고 자본주의 국가들을 추월하겠다며 농공업 증산을 위한 대약진운동을 벌였다. 철강 생산을 늘리겠다며 시골에 원시적인 고로를 설치했지만 조잡한 쇠만 양산했을 뿐이다. 결국 농업까지 실패해 대흉년과 기근으로 약 3000만 명의 아사자(추산)가 발생했다.

경제에선 시장을 거스를 수 없다

1966~76년에는 문화대혁명의 광풍이 지나갔다. 사회 곳곳에 남아있는 부르주아 계급의 자본주의·봉건주의·관료주의 적폐를 제거하고 ‘혁명 후 영구적 계급투쟁’을 계속해야 한다며 홍위병을 앞세워 일으킨 사건이다. 마오는 이를 통해 반대파를 제거할 수 있었지만 중국 사회는 홍위병 폭력 속에 힘겨운 시기를 견뎌야 했다. 문화대혁명으로 공식 통계로 72만9511명이 박해받았으며 3만4800명이 숨졌지만 실제 피해는 더욱 광범위할 것으로 추정된다. 결국 중국은 1978년 덩샤오핑의 개혁·개방정책으로 시장경제를 도입하며 경제를 추스를 수 있었다. 그 결과 중국은 국내총생산 세계 1위의 경제대국이 될 수 있었다.

마르크스레닌주의라는 신기루를 좇은 러시아 혁명의 실험은 인류에게 커다란 교훈을 남겼다. 경제에선 시장을 거스를 수 없다는 게 가장 큰 교훈이다. 하지만 세계는 그 교훈을 얻기 위해 너무도 큰 대가를 치렀다. 100년이 지난 지금 러시아 혁명을 반추해보는 이유다.

1410호 (2017.1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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