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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플이 다시 불 붙인 집단소송제] 도입에 소극적이던 정부 전향적으로 바뀌나 

 

함승민 기자 sham@joongang.co.kr
법무부 “2018년 상반기 도입 예정”...전문가 “한국 실정에 맞게 도입할 만”

또 다시 집단소송제가 관심을 받고 있다. 애플이 구형 아이폰의 고의적인 성능 저하 사실을 인정한 이후 미국을 비롯해 세계에서 집단소송이 봇물 터지듯 제기되면서다. 국내에서도 몇몇 법무법인을 중심으로 소송을 준비 중이다. 그러나 미국과 달리 국내에서는 증권을 제외한 일반 소비재에는 집단소송제가 도입되지 않아 제약이 많은 상황이다. 소비자단체를 중심으로 기업의 과실로 피해를 입은 다수의 소비자를 구제할 수 있는 집단소송제가 도입돼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이런 가운데 그동안 소극적이던 정부가 집단소송제 도입에 팔을 걷어 붙이기 시작해 귀추가 주목된다.

지난 12월 20일 애플은 “성능 저하 소프트웨어 업데이트는 아이폰 배터리가 프로세서가 요구하는 최대치의 전력을 공급하는데 문제가 있을 때 전력 수요를 줄이기 위한 조치였다”고 밝혔다. 아이폰 6와 7 사용자 사이에서 전원이 갑자기 꺼지는 현상이 계속되더니 올해 초부턴 휴대폰 속도가 느려졌다는 불만이 끊이지 않자 내놓은 해명이다. 이에 대해 소비자들은 새 아이폰의 판매를 늘리기 위해 애플이 의도적으로 구형 아이폰 성능을 저하하는 운영체제(iOS) 업그레이드를 했다며 반발하고 있다.

애플의 해명에도 미국 전역으로 소송이 확대되고 있다. 현지 언론에 따르면 크리스마스 연휴 이전까지 4건에 불과하던 미국 내 집단소송은 12월 27일 현재 9건으로 늘어났다. 법원에 접수된 소장에 따르면 모두 아이폰을 사용하는 미국 전역 사용자들을 대표하는 집단소송을 원하고 있다. 이스라엘에서도 고객 2명이 애플에 손해배상을 요구하는 집단소송을 텔아비브 법원에 냈다.

아이폰 고의 ‘다운그레이드’에 집단소송 봇물

국내에서도 법무법인 한누리가 애플코리아를 상대로 한 소송인단을 모집하고 있다. 법무법인 휘명도 소송을 예고했다. 국내 아이폰 사용자가 350만 명에 이르고, 기기 성능에 민감한 소비자들이 적지 않아 파장이 클 것으로 예상된다. 다만, 국내에서는 소송을 제기해 승소하더라도 소송 당사자만 보상을 받는다. 미국과 달리 한국은 증권을 제외한 일반 분야는 아직 집단 소송제가 도입돼 있지 않은 탓이다. 국내서도 ‘집단소송’이란 말이 사용되지만, 다수가 참여한다는 의미일 뿐 사실 엄밀히 말하면 ‘공동소송’이 더 정확한 표현이다. 따라서 소송인단이 애플을 상대로 한 소송에서 승소하더라도, 다른 소비자들은 따로 소송을 제기해야 배상을 받을 수 있다.

집단소송제란 기업이나 정부의 부당행위로 인한 특정 피해자가 소송에서 이기면 소송에 참여하지 않았더라도 동일한 피해를 다른 사람도 이에 의제해서 손해 배상을 받는 제도를 말한다. 소비자 1명만 승소하면 불법을 저지른 정부나 기업은 최대 수백만 배에 이르는 보상금을 토해내야 한다. 미국에선 2000년 7월 일부 흡연 피해자가 제기한 소송 결과, 미국 플로리다주 마이애미 순회법원이 5개 담배회사에 대해 50만 명의 흡연 피해자에게 1450억 달러(약 17조원)를 배상하라고 평결한 사례 등이 있다. 미국 외에는 캐나다, 호주 등 영미법 국가와 브라질·이스라엘이 집단소송제를 도입했다.

집단소송제가 없는 국내에서는 다수의 피해자가 있더라도 개별적으로 선뜻 복잡한 소송을 제기하기가 쉽지 않다. 소송 비용 부담도 장벽이다. 피해자 개인이 소송을 제기하면 손해배상금보다 소송 비용이 커지는 경우가 발생한다.

이에 하나의 기업으로 인해 다수의 피해자가 발생하는 사건이 일어날 때마다 언론과 학계, 소비자단체 등에서 피해자 보호를 강화하는 방안 중 하나로 집단소송제를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최근에는 가습기살균제 사건, 카드사의 개인정보 유출 사건, 폴크스바겐 디젤게이트 등이 발생했을 때 피해자 구제문제가 계기가 돼 주목을 받았다.

집단소송제를 도입하면 피해가 소액이거나 잘 알지 못해 흩어져 있는 피해자들을 구제할 수 있게 된다. 이에 따라 기업의 동일한 불법 행위를 방지하는 효과가 있다. 기업은 반복해서 제기되는 소송에 시간과 비용이 낭비되는 것을 막고 피해 배상을 한 번에 해결할 수 있다. 법원도 같은 건에 대해 반복되는 소송을 줄이고 통일적 판결을 할 수 있어 효율적이다.

국내에서 집단소송제를 도입하자는 논의는 1990년대 후반에 시작됐다. 하지만 논의는 20년 가까이 제자리걸음이다. 1996년에 법무부에서 5년 간의 준비를 거쳐 집단소송법 시안을 작성하고는 법안 제출도 하지 못했다. 2004년 증권 분야에 한해 집단소송법을 시행했지만, 이는 외환위기 당시 구제금융을 허용한 국제부흥개발은행(IBRD)이 한국에 미국식 대표당사자소송을 도입할 것을 권고했기 때문이다. 국회에서는 집단 소송제 도입 관련 법안이 17대 국회에서 6건, 18대 국회 4건, 19대 국회서 17건이 발의됐다. 하지만 대부분 논의조차 제대로 되지 못한 채 폐기됐다. 20대 국회에서도 12건의 집단소송제 관련 법안이 계류 중이다.

긴 시간 집단소송제가 도입되지 않은 이유는 재계의 강한 반대와 국회·정부의 소극적인 태도 때문이다. 재계에서는 집단소송제가 도입될 경우 소송이 무분별하게 남용될 가능성이 있고, 이로 인해 기업의 부담이 증가할 것이라고 주장해왔다. 한 법조계 관계자는 “오랜 논의 기간을 통해 집단소송제 도입 자체에 대한 논리와 명분은 많이 쌓였지만, 경제계를 비롯한 현실 이해관계자 측에서 부작용이나 구체적인 방법을 두고 반발하고 있다”며 “이에 국회와 정부도 강하게 밀어붙이지 못한 측면이 있다”고 말했다.

집단 피해 때마다 “집단소송제 도입하자”

그러나 최근 정부의 기조가 바뀌는 분위기다. 법무부는 10월 19일 내놓은 ‘법무행정 쇄신방향’에서 집단소송제 범위를 증권에서 소비자 분야로 확대한다는 방침을 내놨다. ‘국정운영 5개년 계획’에 담긴 ‘100대 국정운영 과제’와 문재인 대통령의 대선 공약 등이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12월 27일 발표한 ‘식품안전개선 종합대책’에서는 식품 분야에 집단소송제를 도입한다고 밝혔다. 가습기 살균제와 살충제 계란 파동의 후속 조치 성격이지만, 일각에서는 이 참에 식품뿐만 아니라 위생, 환경 등 사실상 소비재 전 분야를 아우르는 집단소송제를 강행하겠다는 게 정부의 속내라고 보고 있다. 실제 법무부 관계자는 “집단적 피해를 효율적으로 구제하기 위해 소비자 분야 등에 집단소송제를 도입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2018년 상반기 중 현행 ‘증권 관련 집단소송법’을 개정해 적용범위를 확대하는 방안으로 입법을 추진한다는 방침이다. 다만 “확대 범위 및 개선 방법 등은 논의 중”이라며 “구체적 사항은 아직 확정된 바 없다”고 밝혔다. 법무부는 지난 10월부터 ‘집단소송제도 개선위원회’를 구성해 구체적인 도입방안을 논의 중이다.

전문가들은 집단소송제 도입은 긍정적이지만 구체적인 소송 방법과 범위, 요건 등에 대해서는 신중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서희석 부산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2000년대 유럽에서도 논의가 활발했지만 소비자단체가 먼저 소송을 제기하는 식으로 자국 실정에 맞게 변형해 받아들였다”며 “한국도 미국식 제도만 베낄 게 아니라 근본적으로 적합한 게 무엇인지 논의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함영주 중앙대 법학전문대학원 “지난 갤럭시 과열 사태 때 삼성의 대응 사례처럼, 미국의 집단소송제는 소송 자체보다는 소송 제기를 계기로 기업이 그 전에 사태를 해결하라는 취지도 있다”며 “넓은 영역에 도입하되 요건을 까다롭게 해 소송 남발을 방지할 필요도 있다”고 말했다. 함 교수는 “기업은 당장 망할 것처럼 얘기하고, 소비자는 사람이 많아지면 질 소송도 이길 것처럼 여긴다”며 “지나친 우려와 지나친 기대 모두 경계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1416호 (2018.0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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