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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기중의 사진, 그리고 거짓말] 푼크툼이 있어야 좋은 사진 

 

주기중 아주특별한사진교실 대표
사진은 우연성 강한 예술 ... 해석의 가능성 열어놓는 제목 바람직

▎[사진1] 고흐, 구두
현대미술은 제목 대신 숫자를 나열하는 경우도 있고, 아예 제목이 없는 ‘무제’도 많습니다. 작품의 해석을 전적으로 감상자에게 맡긴다는 의도가 담겼습니다. 음악도 그렇습니다. 표제음악에는 구체적인 제목이 붙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교향곡·소나타·협주곡 등 절대음악은 제목 대신 번호를 사용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절대음감을 즐기라는 뜻입니다.

고흐의 그림 ‘구두’ 둘러싼 제목 논쟁


▎[사진2] 알, 2017
수용이론은 하이데거의 ‘존재론적 인식’에도 힘입은 바가 큽니다. 하이데거는 어떤 대상을 ‘존재자’와 ‘존재’로 나눕니다. ‘존재자’는 누구나 보편적으로 인식하는 어떤 대상입니다. 이 존재자는 나와의 교감을 통해 지시대상 이상의 ‘그 무엇’이 됩니다. 이를 ‘존재’라고 합니다. 김춘수의 시 ‘꽃’은 존재자와 존재의 관계를 시적으로 표현한 작품입니다. 하이데거 예술론의 핵심은 ‘존재자’와 ‘존재’의 관계 속에서 보이지 않는 존재를 현시하는 것에 있습니다. ‘예술은 재현’이라는 근대의 틀을 깨는 개념입니다.

재미있는 일화가 있습니다. 하이데거는 고흐의 그림 ‘구두’[사진1]를 보고 그림이 자신에게 말을 했다고 주장합니다. 나와 아무런 관계가 없는 구두는 하나의 보통명사(존재자)일 뿐입니다. 그러나 하이데거는 “구두는 농촌 아낙네의 것(존재)”이라며 ‘대지’ ‘노동’ ‘곡식’ ‘들판’ ‘궁핍’ 등의 단어를 써 가며 아주 근사한 ‘썰’을 풀며 작품을 해석합니다. 그런데 엉뚱한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미술비평가 사피로가 하이데거의 글을 보고 작품 속의 구두는 고흐 자신의 것이라고 반박한 것입니다. 고흐는 자신이 갖고 있는 소품을 즐겨 그렸으며 구두 작품이 발표될 당시 고흐는 파리에 머물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는 비평가답게 성격이 까칠했나 봅니다. 사소한 문제를 가지고 핏대를 올렸습니다. 촌스럽게! 그리고 고흐가 자신의 구두에 노동의 의미를 담았다고 작품을 해석합니다. 구두의 주체는 다르지만 ‘노동’이라는 해석은 비슷합니다. 사피로는 한 수 아래로 보입니다. 예술은 ‘원본의 재현’이라는 근대의 틀을 벗지 못한 것입니다. 작품의 해석도 작가 중심의 ‘생산 미학’에 머물러 있습니다.

‘해체론’의 데리다는 한 발 더 나가 작품의 해석을 완전히 열어놓습니다. 구두는 고흐의 것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으며, 구두의 주체를 밝히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하이데거가 구두가 농촌 아낙네의 것이라고 단언하는 것은 근거가 없다고 비판합니다. 또 사피로에 대해서는 구두의 원본, 즉 구두의 주인을 전제한 것이기 때문에 구시대적이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작품의 진실은 뭘까요. 구두는 누구의 것일까요. 고흐 자신? 농촌 아낙네? 도시노동자? 농민? 남자? 여자? 도플갱어? 아바타? 아니면 공사장의 ‘노가다’? 솔직히 필자는 고흐 구두그림을 처음 봤을 때 ‘노가다’를 떠올렸습니다. 만약 고흐가 제목을 ‘농촌 아낙네의 구두’ 또는 ‘나의 구두’라고 구체적으로 붙였다면 이런 논쟁도 일어나지 않았을 겁니다. 그렇지만 작품의 창의적인 해석은 제목에 묶여 한 발짝도 나가지 못했을 겁니다. 물론 작품을 감상하는 맛도 떨어집니다. 구두의 실제 주인공이 누구냐를 밝히는 것은 사소한 일이며 의미가 없어 보입니다. 작품의 해석은 감상자의 마음에 달렸다는 것이 정답 아닐까요.

자, 그럼 다시 사진의 제목 얘기로 돌아가 봅시다. 그림은 설계의 개념이 있습니다. 작가가 의도한 요소만 반영됩니다. 사진은 좀 다릅니다. 일단 프레임 안에 들어 오면 어느 것도 마음대로 빼거나 보탤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우연성이 강합니다. 찍을 때부터 그렇습니다. ‘이거다’ 싶어 앵글을 잡고 셔터를 누릅니다. 그러나 막상 결과를 보면 찍을 때 미쳐 보지 못했던 요소가 발견됩니다. 찍을 때의 느낌과 그 맥락이 달라지는 상황이 자주 있습니다. 사람의 눈은 선택적으로 대상을 보기 때문입니다. 사진에 달라붙는 우연성 때문에 제목 달기가 더 부담스럽습니다.

우연성은 사진을 사진답게 만드는 요소이기도 하지만 사진가의 입장에서 볼 때 종종 엉뚱한 해석을 낳기도 합니다. 롤랑바르트가 말한 ‘푼크툼’이 대표적인 경우입니다. 푼크툼은 철저하게 수용미학의 영역입니다. 사진을 보며 느끼는 지극히 개인적이고 심리적인 감성입니다. 이는 사진가가 의도하지 않았고, 의도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푼크툼이 있는 사진이 좋은 사진”이라는 말은 성립되지만 “푼크툼이 있는 사진을 찍어라”는 것은 말이 되지 않습니다.

제목은 구어체나 호기심 부르는 단어로

수용미학이 시대정신이라면 제목은 해석의 가능성을 열어 놓는 용어 선택이 필요합니다. 작품의 해석을 강요하는 제목은 적절치 않습니다. 작가의 의도가 개입된 제목에는 수식어가 많이 붙습니다. 가능한 감상자가 사진을 보는 데 영향을 주지 않은 가치 중립적인 단어를 택하는 것이 좋습니다.

구체적이고 작은 개념보다는 한 단계 위에 있는 추상적이고 큰 개념의 용어를 고르는 것이 낫습니다. 예를 들면 ‘마지막 잎새’보다는 ‘나무’나 ‘가을’이 수용자를 배려하는 제목이 됩니다. 마그리트처럼 지적 호기심이나 궁금증을 불러일으키는 제목도 괜찮습니다. 감상자가 작품 앞에 오래 머물 수 있게 해줍니다. ‘굿모닝’ 같은 구어체 제목도 신선해 보입니다.

사진이 어렵다면 제목에 약간의 실마리를 주거나 ‘작가노트’ 형식으로 팁을 주는 것도 방법입니다. [사진2]는 겨울 얼음판에서 본 병아리의 모습입니다. 제가 보기엔 그랬습니다. 그러나 사진 제목은 병아리 대신 ‘알’이라고 붙였습니다.

※ 필자는 중앙일보 사진부장을 역임했다. 현재 아주특별한사진교실의 대표다.

1425호 (2018.0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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