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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학각색(各學各色)’- 문화인류학] 초국가 국민·민족 정체성 정립할 필요 

 

정병호 한양대 문화인류학과 교수
탈북민·조선족 등 소수자·경계인 늘어 … 단순한 ‘민족=국민’의 도식 넘어서야

▎정병호 교수는... 평화디딤돌 이사장이자 한국문화인류학회장이다. 한국문화인류학회 연구위원장 등을 역임했다.
민족과 국민은 어떻게 다른가? ‘우리는 민족 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 유신시대에 의무적으로 암송해야 했던 국민교육헌장의 서두다. 일본 명치천황의 ‘교육칙어’를 본뜬 국민교육헌장은 분단 국가의 사상 통합과 ‘국민’ 정체성 확립의 도구로 활용됐다. 그 때는 ‘우리’가 누구인지 확실했다. ‘민족’이란 단군의 자손, 배달겨레 모두를 뜻했다. ‘이 땅’은 물론 남한 땅이었다. 북한과 해외에 동포들이 살고 있지만 이들은 언젠가 우리가 구원해야 할 대상일 뿐이었다. 흩어진 민족을 통일하는 일, 그것이 민족사의 중심지인 이곳, 남한에 태어난 사람의 역사적 사명이었다.

혈연 공동 운명체로서의 민족 개념은 탈냉전 시기에 중국에서 들어 온 조선족을 만나면서 흔들렸다. 핏줄보다 이른바 국적이 중요해진 것이다. 남한 사회는 가까운 친척이자 같은 말을 하는 조선족을 ‘중국 사람’이라고 차별했다. 일본에서 태어나 국적을 지키며 살고 있는 재일동포를 우리말이 서툴다고 ‘반쪽발이’ 취급을 하기도 했다. 이때는 언어를 온전한 민족 구성원으로서의 중요한 자격 요건으로 여겼다.

한편 2000년대부터 남한에 와서 살기 시작한 탈북민 중에는 사회적 차별이 무서워 스스로 조선족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었다. 가난한 북한 출신보다는 중국 출신이 업신여김을 덜 당한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출신국의 경제 수준이 그 집단을 차별하는 지표가 됐다. 이미 많은 남한 사람이 민족통일은 더 이상 당연한 민족과제가 아니라고 여긴다. 현격한 경제적 차이를 다른 무엇보다 큰 부담으로 여기는 것이다.

‘우리’ 민족의 범주와 정체성은 더 이상 신성한 혈통이나 반만년 역사에 빛나는 찬란한 문화전통 같은 것이 아니다. 남한 주류 집단의 민족개념은 시대상황과 대상에 따라 매우 급속하게 변했다. 경제 수준과 문화 차이에 따라 이기적인 기준을 들이대어 ‘우리’와 ‘남’을 가르고, 정통과 아류를 구별하며, 중심과 주변을 서열화했다. 탈북민과 조선족도 예외가 아니다.

한민족이 아닌 이주민이 늘어나자 국민의례에서 ‘민족’이라는 단어가 빠졌다. ‘조국과 민족’ 대신에 ‘자유롭고 정의로운 대한민국’으로 충성의 대상이 바뀐 것이다. 그러나 결혼 이주자와 자녀에게 국민으로서의 통합을 요구하면서도 민족자격은 결핍된 ‘2등 국민’으로 여기고, 한민족 이주민들은 ‘국민’ 자격에서 배제하거나, 다시 귀화해도 문화적으로 결핍된 존재로 차별했다.

객관적 정치조직으로서의 ‘국민’과 주관적 문화공동체로서의 ‘민족’을 엄밀하게 구별해 개념화할 필요가 있다. ‘우리’의 근대적 민족정체성은 일본 제국주의에 대한 저항의 역사 속에서 형성됐다. 그 후 냉전체제 속에서 남과 북 2개의 국민국가와 주변 4대 강국의 소수민족으로서 다양한 ‘국민’ 정체성을 가지고 살게 됐다. 영원히 일치할 수 없는 국경과 민족 경계선 사이에서 단순히 정치적 담론만 충돌하는 것이 아니라 그 틈새에 존재하는 다양한 경계인과 소수자들이 정체성의 혼란과 실존적 비극을 겪고 있다. 현실의 엄연한 차별과 멸시 때문이다.

이제 복합적 한민족 집단의 민족·국민 정체성을 문화상대주의적으로 이해해야 한다. 단순한 ‘민족=국민’의 도식을 넘어선 민족과 국민 정체성의 다중성을 인식하고 새로운 ‘초국가 민족 정체성’과 ‘초민족 국민 정체성’ 개념을 형성해야 할 것이다. 이것은 수많은 이주민과 난민, 망명자, 이주노동자가 겪는 차별구조 해체의 첫걸음이 될 것이다. 또한 민족 정통성을 경쟁하면서 스스로 중심을 표방하고 있는 남과 북 두 개의 국민국가가 단일민족국가의 이념적 모순을 극복하기 위한 출발점이다. 분단된 남과 북이 정치적 통일을 이루기 전에 만남과 교류, 그리고 상호보완적인 공존관계를 유지하고 발전시키기 위해서도 지금 이 시점에서 매우 긴요한 일이다.

1426호 (2018.0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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