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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필재의 ‘브라보! 세컨드 라이프’(2) | 오종남 김&장법률사무소 고문] 정년 전에 회사 나와 ‘쓸모’를 유지하라 

 

이필재
성공은 또 만나고 싶어 하는 사람이 되는 것...손해 보는 게 복 받는 길

이른바 ‘백세시대’입니다. 인생의 가을은 성공보다 행복을 추수하는 시절입니다. 수명 연장으로 퇴직을 해도 일해야 하는 ‘반퇴시대’이기도 합니다. 본지가 세컨드 라이프를 잘 개척한 이 땅의 행복한 사람들을 찾아갑니다.


▎사진:김현동 기자
“사람들이 또 만나고 싶어 하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환갑이 됐을 때 저 나름대로 성공에 대해 정의해 봤습니다. 바로 또 만나고 싶어 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었죠. 그런데 또 만나고 싶은 사람은 나를 위해 손해 보는 사람이에요.” 오종남 김&장법률사무소 고문은 “손해 보는 인생을 사는 게 실은 복 받는 길”이라고 말했다. “사람은 누구나 이기적입니다. 아니 저야말로 가장 이기적인 사람입니다. 하지만, 아닐 말로 친구에게서 평생 나한테 밥 산 사람이라는 평판을 얻으면 언젠가 그 친구가 단 한 번에 그 빚을 갚을 수도 있어요.”

길게 보면 좋은 평판도 돈으로 살 수 있다는 것이다. 그가 10여 곳에서 무보수 명예직으로 봉사를 하는 것도 그로서는 충분한 보상을 얻기 때문이다. 서울대 과학기술산업융합최고전략과정은 11년째 무보수로 주임교수를 맡고 있다. 지금은 명예주임교수지만 하는 일은 동일하다. 그가 매주 강사들을 선정하고 직접 강의도 한다. 사람들은 대단하다고 하지만 그는 평판과 보람이라는 비물질적 보상을 받는다. “처음 대학 측에서 보수 이야기를 꺼냈을 때 얼마를 지급하든 자진 반납하겠다고 했어요. 모교서 후학들을 가르치는 보람은 돈으로 환산할 수 없습니다.”

지식은 남과 나눠도 줄지 않는다

지식은 남과 나눠도 줄어들지 않는다. 물질과 다른 점이다. 가진 지식을 서로 교환하면 각자 두 개가 된다. 평생 학습을 하고, 배우고 깨친 것을 남들과 나누면 무엇보다 인생이 즐겁다. “인생의 황혼기에 젊은 사람들에게 무시당하지 않으려면 배워야 합니다. 초등학교 5학년짜리 손주가 저에게 걸핏하면 ‘할아버지 그것도 몰라요’라고 합니다. 나이 들어 그런 말을 들으면 서러워요.”

미국에서 학위를 받은 국제경제학 박사인 그는 한국방송통신대 석좌교수를 지냈다. 그에 앞서 방송대 발전후원회장과 홍보모델을 했다. 홍보모델을 한 건 마지막 공직이었던 통계청장 시절 이 대학 영어영문학과를 나왔기 때문이다. 권영수 LG유플러스 부회장, 영화배우 심혜진씨와 함께였다. 지금은 재학생의 절반이 그처럼 대학을 나온 사람이지만 이런저런 사정으로 대학에 진학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대학 교육의 기회를 주는 게 본래 이 학교의 설립 목적이었다. 석좌교수 시절 그는 대학을 나오지 않았지만 멋지게 사는 사람들과 인터뷰 하는 방송대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대학을 나와야 행복해지는 건 아니라는 메시지를 담았다. 마흔다섯에 노래를 시작해 대한민국의 유명 소리꾼이 된 장사익씨, 검정고시 출신인 세르지오 호샤 한국GM 사장 등과 인터뷰했다(학교 규정상 석좌교수 급여는 받았지만 다른 곳에 기부했다). 유니세프 한국위원회 사무총장도 무급으로 했다. 후원자들이 기부한 돈으로 보수를 받는 게 내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랬기에 기부하는 분들에게 큰소리칠 수 있었죠. 보수를 안 받으면 신뢰를 얻을 수 있어요. 재벌들이 회사 돈 말고 개인 돈으로 기부를 하면 평판이 좀 달라질 겁니다.”

그는 스크랜턴여성리더십센터 이사장을 맡고 있다. 이 단체는 지난 10년 간 1000여 명의 아시아 개발도상국 여성들에게 대학등록금을 전액 지원했다. 이들은 거의 모두 가족 중 최초의 대학생이다. 이 단체의 종잣돈은 135년 전 볼드윈이라는 미국의 부인이 마련했다. 꼬레아의 여성은 이름도 없고 한 인격체로서 인정을 받지 못한다는 이야기를 접한 그녀는 언젠가 이 나라가 개방되면 이 나라 여성을 위해 써 달라고 당시로서는 매우 큰돈인 88달러를 작정 헌금했다. 2년 후 미국 여성 스크랜턴 여사가 최초의 여선교사로 조선에 들어와 시작한 학교가 이화학당의 모태이다. 그녀의 목표는 ‘조선 여성을 더 나은 조선 여성으로 만드는 것’이었다. 조선 여성을 더 낫게 만드는 꿈은 그러나 그보다 2년 전 오하이오의 한 부인이 꾼 것이었다. “잘 때 꾸는 꿈은 좋은 것으로 꾸고 싶다고 꾸어지는 게 아니지만 깨어 있을 때 꾸는 꿈은 원대한 비전이 될 수 있습니다.”

그는 나눔은 누구나 실천할 수 있다고 말한다. 못하는 건 사람들이 위를 바라보기 때문이다. 옆을 보면 위안을 얻고 아래를 내려다볼 때 비로소 나보다 못한 사람과 나눌 수 있다. 서울 도심에 목디스크 병원이 유독 많은 건 사람들이 자기보다 위에 있는 사람과 비교하기 때문이라고 그가 조크를 했다.

행정고시 동기 중 선두주자였던 그가 김&장에 몸담은 건 통계청장을 마치면서 국영기업체 포함해 공직은 맡지 않기로 마음먹었기 때문이었다. 재정경제비서관 등 청와대에서 네 개의 비서관을 지낸 그는 권력의 맛을 볼 만큼 봤다고 말했다. 사람들이 물먹었다고 한 통계청장도 지원을 해서 갔다. 노무현 정부와 이명박 정부 시절 입각을 제의 받았지만 그는 고사했다.

“저 같은 지공거사(지하철을 공짜로 타는 ‘어르신’)가 매일 출근한다는 건 감사한 일이죠. 봉급쟁이가 정년을 한 10년 남겨 놓고 일찍 세컨드 라이프를 시작하면 쓸모를 유지할 수 있습니다. 공무원이 정년을 채우고 기업에 몸담는 건 자칫 ‘의탁’이 될 수 있어요. 돌이켜보면 법대 시절 경제학을 가르치신 은사가 법조인 말고 공무원이 되라고 하셨습니다. 그 덕에 경제기획원에 근무한 것과 평생의 비판자인 제 아내를 반려로 만난 것이 저로서는 말하자면 ‘인생 결단’이었죠.”

나눔은 일찍이 시작했다. 집안 형편이 어려워 중2 때 가정교사를 시작한 그는 대학도 가정교사로 스스로 벌어서 다녔다. 그 시절에도 친구를 만나면 거의 그가 밥값을 냈다.

지난해 봄 주민센터에서 ‘어르신교통카드’를 발급받은 그는 그 전에도 지하철을 많이 탔었다. 과거 고소득층 시니어에 대한 지하철 무상 이용 혜택은 예산 낭비라고 생각했지만 그는 ‘짐 되는 노인’이 아니라 ‘보탬이 되는 어르신’이 되기로 마음을 바꿨다. “국가가 세금을 제대로 써야 조세 저항이 줄어듭니다. 국제사회에서 높아진 위상에 걸맞은 역할도 해야죠. 우리의 활동 무대를 지구촌으로 확장해야 합니다. 우리나라 무역 규모가 중계무역을 많이 하는 네덜란드를 제외하면 세계 5~6위 수준입니다. 일본·중국을 포함해 우리보다 무역 규모가 큰 나라의 통화는 다 국제통화가 됐습니다. 원화가 국제통화가 될 때가 무르익었다는 거죠.”

국제통화기금(IMF) 대리이사를 지낸 그는 공직을 마친 후 IMF 상임이사를 지냈다. 호주·뉴질랜드를 포함해 아시아태평양 지역 14개 국을 대표하는 자리다. 대한민국은 이른바 ‘IMF 체제’를 겪고서 어떤 교훈을 얻었을까?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이지만, 성공이 실패의 아버지가 될 수도 있습니다. 우리나라가 30년 걸려 압축성장을 했는데 1인당 소득 1만 달러가 된 1994년 이래 3년 만에 경제식민 각서를 쓰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로부터 20년, 다시 자만에 빠질 수 있습니다. 개인도 국가도 자만에 빠지면 파멸하게 마련이죠.”

1436호 (2018.0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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