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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웨이의 이유 있는 질주] R&D 투자 중시한 기술 지상주의 결실 

 

채인택 중앙일보 국제전문기자 ciimccp@joongang.co.kr
2008년 국제특허 출원 건수 첫 세계 1위… 스마트폰·통신장비·시스템 등에서 두각

▎중국 최대 스마트폰 제조업체 화웨이.
화웨이(華爲)는 중국을 대표하는 통신기기 제조 업체다. 화웨이는 올해 2분기 세계 스마트폰 매출에서 ‘원조’인 애플을 누르고 2위를 차지했다. 화웨이의 시장점유율은 15.5%로 전년도보다 4.8%포인트 늘었다. 시장점유율 20.4%를 차지한 삼성전자와 15%를 확보한 애플은 2012~2013년 이후 정체 상태다. 사실 화웨이는 아직 미국 시장에는 진출도 하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중국 내수시장과 중점 공략 중인 인도·아프리카 시장에선 가격 대비 성능이 좋은 제품으로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다. 국민소득이 그리 많지 않은 신흥국에선 첨단 고급 기능을 내세운 고가의 삼성전자·애플 스마트폰보다 기본 기능에 충실하고 가격 접근성이 좋은 화웨이폰이 인기를 끌고 있다는 이야기다.

2분기 세계 스마트폰 시장점유율 2위


샤오미가 2011년 8월 처음 스마트폰을 들고 나왔을 때만 해도 중국 스마트폰을 보는 소비자들의 시선은 차가웠다. 글로벌 시장 진출도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하지만 스마트폰 시장에서 샤오미보다 후발주자인 화웨이는 경쟁이 뜨거워진 중국 시장에서 착실하게 체력을 길렀다. 현재 화웨이는 오포·비보와 함께 중국 스마트폰 시장을 삼분하고 있다.

소비자들의 원하는 가격 대비 성능 좋은 스마트폰을 내고 글로벌 시장 공략에 나서면서 세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불필요한 기능을 줄이면서 기능을 단순화하고 원가를 낮춘 것이 주효했다. 주머니 사정이 가벼운 신흥국에선 먹힐 수밖에 없었다. 선발 업체들이 고공 전투를 벌일 때 화웨이는 낮은 곳으로 임해 풀뿌리 시장을 파고 든 셈이다. 내부 경쟁이 치열한 중국 시장이 이런 시장 적응력을 강화시킨 배경의 하나로 꼽는 시각이 강하다. 하지만 화웨이의 도약을 가능하게 한 바탕은 기술 중시의 기업 철학과 연구개발(R&D)에 대한 지속적인 투자인 것으로 분석할 수 있다. 사실 화웨이는 첨단 연구개발에 투자를 아끼지 않는 R&D 중심 기업이다.

화웨이는 1987년 광둥성 선전에서 창업한 이래 매년 매출의 10% 이상을 지속적으로 R&D에 지출해왔다. 중국에서도 손꼽히는 ‘기술 중심 기업’이다. 2015년 자료에 따르면 당시 직원의 45%인 7만9000명이 R&D 분야 직원이었다. 그해 화웨이는 매출의 15.1%에 해당하는 596억700만 위안을 지출했다. 이전 10년 간 누적 R&D 투자는 2400억 위안을 넘는다. 중국에선 본사가 위치한 선전은 물론 상하이·베이징·난징·시안·청두·우한에서 R&D센터를 운영한다. 뿐만 아니라 미국 실리콘밸리와 텍사스주 댈러스, 스웨덴 스톡홀름, 네덜란드 베이헌, 러시아 모스크바와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에서도 R&D 센터를 가동한다.

1987년 창업 이후 매출의 10% 이상 R&D 투자

이를 바탕으로 오래 전부터 특허출원 건수에서 세계적인 기업으로 명성을 누려왔다. 2008년 국제특허 출원 건수가 처음으로 세계 1위에 올랐으며 이후로도 5위 이내를 유지하고 있다. 2015년 말 현재 특허 출원 건수가 중국에 5만2550건, 해외가 3만 613건에 이른다. 특허 취득 건수는 5만377건에 이른다.

2016년 3월 글로벌 지적재산권을 담당하는 유엔특별기구인 세계지식재산권기구(WIPO)는 2015년 특허출원 건수에서 화웨이가 2년 연속 세계 1위라고 발표했다. 특히 3.9세대 이동통신 시스템인 LTE와 4세대 이동통신 시스템인 LTE-어드밴스드의 기준에 필수적인 특허 분야에서 오랫동안 업계를 주도했던 에릭슨과 노키아를 누르고 미국의 퀄컴사에 이어 특허 보유 건수가 세계 2위인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화웨이가 앞으로 모바일 업계를 주도할 수 있는 기술력을 보유했다는 의미다.

화웨이는 2016년 LTE 관련 표준특허를 둘러싸고 한국의 삼성전자를 상태로 중국에서 소송을 걸어 승소했으며, 미국에선 서로 맞고소를 한 상태다. 화웨이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공세적으로 삼성전자의 발목을 잡으며 1위에 도전하고 있다는 이야기다. 창업자인 린청페이(任正非) 회장부터가 중국 인민해방군의 군사기술자였다. 이 때문에 화웨이는 사실상 중국 정부의 ‘글로벌 통신망 기업’이라는 추측이 돌기도 했다.

화웨이는 이제 단말기 제조사로 새롭게 급성장하고 있지만 처음엔 휴대전화의 인프라 정비에 필요한 통신기기를 개발하는 업체로 시작했다. 그 후 다양한 기술로 세계적인 솔루션 프로바이더로 성장했다. R&D를 통한 통신장비 기술 확보와 이를 바탕으로 부품과 장비를 개발하고 생산해 통신 사업자에게 맞춤형 네트워크 시스템과 장비를 제공해왔다.

설립 초인 1990년대 중반까지도 화웨이는 유선통신사인 중국전신, 이동통신사인 중국이동통신, 네트워크 통신사업자인 중국망통, 통신사업자인 중국연합통신통 등 중국 기업의 용역만 맡은 로컬 업체였다. 1997년 홍콩에 있는 세계적인 항만 운영업체인 ‘허치슨 왐포아’와 계약을 맺은 것이 중국 본토 밖 기업과의 첫 계약이다. 1997년은 영국 식민지이던 홍콩이 중국의 품으로 돌아간 시기라 정치적인 배려가 있었을 가능성도 짐작할 수 있다. 이를 계기로 화웨이는 본격적으로 해외 진출에 나섰다. 시작이 어려웠을 뿐, 그 뒤로 줄줄이 해외 진출에 성공하면서 거미줄 같은 글로벌 네트워크를 건설하기 시작했다. 2000년 이후 영국의 브리티시 텔레콤, 독일의 도이체 텔레콤, 스페인의 텔레포니아, 스웨덴·핀란드의 텔리아소네라, 태국의 어드밴스드인포서비스, 싱가포르의 싱가포르텔레콤(싱텔) 등과 계약을 맺으면서 글로벌 시장에서 성장을 가속화했다. 그 뒤 유럽과 아시아, 아프리카, 남미 등 영역을 날로 확장했다.

2012년에는 매출이 에릭슨을 넘어서면서 매출 규모로 세계 최대의 통신기기 회사로 발돋움했다. 모바일·브로드밴드 제품, 모바일·소프트스위치, 패킷 코어 제품, 광케이블 제품에선 세계 1위를 차지하고 있다. 현재 세계 300개에 가까운 통신사업자에 솔루션을 제공하고 있다. 글로벌 상위 50개 사업자 가운데 45개가 화웨이 제품이나 솔루션을 사용한다. 이미 이 분야에선 글로벌 강자인 셈이다. 소비자 제품인 스마트폰은 내놓으면서 뒤늦게 관심을 받고 있는 셈이다. 스마트폰 출하대수와 시장점유율은 2017년 이전에는 세계 3위에 머물렀지만 2017년 애플을 누르고 세계 2위에 올랐다. 화웨이는 2010년 미국 비즈니스 잡지인 패스트 컴퍼니(Fast Company)가 선정한 ‘전 세계에서 가장 창의적인 기업 순위(Most Innovative Company Ranking)’에서 페이스북·아마존·애플·구글에 이어 세계 5위에 올랐다. 2016년에는 13위로 뽑혔다.

2017년 2월 영국 런던에 본사를 두고 있는 브랜드 파이낸스가 발표한 ‘2017년 브랜드 파이낸스 글로벌 500’ 순위에서 전년도보다 7계단을 뛰어 40위에 올랐다. 세계 40위 정도의 브랜드 파워를 지닌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2017년 5월에는 미국 경제잡지 포브스가 발표한 ‘2017년 가장 가치가 있는 100대 기업’ 명단에서 중국 기업으론 유일하게 순위에 들었다. 그해 6월 캄타르 밀워드 브라운이 선정한 세계 기업 브랜드 파원 순위에선 브랜드 가치 203억 8800만 달러로 49위에 올랐다. 2년 연속 50위 안에 든 것이기도 하다. 미국 경제잡지 포천이 매년 선정하는 ‘글로벌 500’ 순위에선 2016년 129위에서 2017년 83위, 2018년엔 72위에 각각 올랐다. 일취월장이라는 표현이 딱 어울리는 상황이다.

화웨이의 기세는 무섭다. 2017년 9월에는 세계 최초로 인공지능을 내장한 프로세서인 NPU를 발표했다. 지난 2월에는 세계 최초로 5G를 지원하는 ‘5G CPE 칩셋’인 ‘발롱 5G01’을 내놨다. 초당 2Gbps의 초고속 다운로드 속도를 구현한다. 화웨이는 올 하반기엔 발롱 5G01을 이용한 5G 스마트폰을 내놓을 것으로 알려졌다. 단말기를 놓고 삼성전자에 대한 정면 도전에 나서는 것이다.

세계 최초로 5G 지원하는 칩셋 선보여


▎화웨이는 공격적인 R&D 투자와 특유의 기업문화를 토대로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했다. 화웨이 선전 본사(왼쪽)와 상하이 R&D센터. / 사진:화웨이
이 기업이 문을 열고 지금도 본부가 자리 잡은 선전이라는 도시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도시는 1978년 중국 지도자 덩샤오핑(鄧小平·1904~1997년)이 시작한 개혁·개방의 상징과도 같은 도시이기 때문이다. 덩샤오핑은 부총리 시절이던 78년 11월 중국 지도자 가운데 처음으로 싱가포르를 방문해 리콴유(李光耀·1923~2015년) 초대 총리를 만났다. 덩은 깨끗하고 경제적 활기로 넘치는 이 ‘범중화권’ 도시국가를 보고 감동했다. 덩샤오핑은 청소년기였던 1919년 프랑스로 근공검학(勤工倹学) 고학생으로 유학을 떠났다. 중국어 근공검학은 ‘부지런히 일하고 절약해서 공부한다’라는 뜻인데 한마디로 요약하면 ‘일하면서 배운다’라는 의미다. 외국에 나가 일을 하면서 공부하고 공부하면서 일을 하자는 취지로 20세기 초 중국에서 벌어진 교육운동의 이름이기도 하다. 쓰촨성 출신의 교육자 우위장이 1915년 6월 교육자 차이위안페이와 근공검학 학회를 결성하고 이듬해 3월 중국-프랑스 교육회를 만들어 청년들을 프랑스로 유학을 보낼 수 있는 길을 열었다.

프랑스는 1918년 11월 11일 독일의 항복을 받으면서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전후 재건과 경제 발전을 위해 노동력이 절실했다. 그러자 식민지는 물론 관련 없는 나라에서도 인력을 모았다. 근검공학 고학생을 중국에서 모집해 데려간 배경이다. 이에 따라 1919년 3월17일 1차 유학생 89명이, 3월31일에는 2차 유학생 26명이 상하이를 출발해 프랑스로 떠났다.

주목할 점은 이 근공검학 유학생에 중국 혁명과 신중국 건국의 주역이 여럿 포함됐다는 사실이다. 저우언라이와 덩샤오핑이 대표적인 인물이다. 이들은 근공검학 유학생으로 프랑스의 공장에서 일하며 공부했다. 마오쩌둥은 본국에 머물렀지만 유학생 친구의 학비를 보탰다. 그가 당시 해외를 경험했더라면 중국 혁명의 방향이 달라졌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역사에 가정은 없지만, 마오쩌둥이 현실을 무시하고 이념에 맞춰 정책을 강요하면서 대약진운동(1958~1962년)을 벌이다 3000만 명이 아사하는 대참사는 막을 수 있지 않았을까. 정치적인 권위가 떨어지자 재기를 노려 문화대혁명(1966~1976)이라는 소란을 일으켜 중국을 정체에 빠뜨린 일도 어쩌면 피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덩샤오핑을 비롯한 근검공학 유학생들은 프랑스를 비롯한 머나먼 유럽에서 새로운 세상을 보고 돌아왔다. 그 충격은 컸다. 뒤떨어진 중국을 근대 국가로 발전시켜야 하겠다는 의지를 담고 돌아왔다. 서구에서 이주노동자와 고학유학생으로 살며 혁명도 배워왔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합리주의와 실용주의를 체득할 기회를 얻었다는 사실을 빼놓을 수 없다. 근공검학 출신의 저우언라이는 합리적인 노선으로 질풍노도 시기의 중국에서 ‘현명한 중재자’로 활동했다. 덩샤오핑은 중국의 개혁·개방을 추진해 강대국의 기틀을 닦았다.

덩샤오핑의 경우 프랑스로 가는 도중 잠시 싱가포르를 들른 것이 그의 인생과 정책 노선, 그리고 그 후 중국이 나아간 방향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1919년에 이어 1978년 싱가포르에 들른 덩샤오핑은 그동안의 변화 과정을 실감할 수 있었다. 프랑스로 가던 도중에 목격했던 과거 낙후된 식민지 싱가포르의 모습을 기억하는 덩에게 1978년의 싱가포르는 상전벽해(桑田碧海)를 이룬 혁신, 아니 새로운 현장으로 비쳤을 것이다.

덩샤오핑은 1978년 12월 중국공산당 제11기 중앙위원회 제3회 전체회의에서 개혁·개방을 처음 제안했다. 이 역사적인 현장에서 그는 싱가포르 발전상 언급을 빼놓지 않았다. 싱가포르를 거울삼아 나라를 개방하고 외자를 유치하기로 결정한 덩샤오핑은 1978년 “나의 꿈은 중국에 싱가포르 같은 도시를 1000개 세우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런 1000개의 싱가포르 중 하나가 선전이다. 선전은 덩샤오핑이 1992년 남방 지역을 시찰하고 담화를 발표한 남순강화의 현장이기도 하다. 당시 그는 1월 18일부터 2월 22일까지 돌아본 남방 지역에는 우한·주하이·상하이와 함께 선전이 포함됐다. 1989년에는 천안문 사건이 벌어졌고 1991년엔 소련이 무너졌다. 이 때문에 중국 내부에선 개혁·개방 정책을 둘러싸고 논란이 한창이었다. 특히 8대 원로로 불리는 천윈(陳雲·1905~1995년)이 보수파를 이끌고 개혁파인 덩샤오핑에 맞섰다. 중앙정치국 상무위원 중 한 명으로 부총리와 중앙기율검사위원회 제1서기를 지낸 천윈은 세상을 떠날 때까지 덩샤오핑이 만든 경제특구를 한 차례도 방문하지 않을 정도였다. 당시 이런 보수파들은 개혁파에 맞서 ‘싱쯔싱서(姓資姓社)’, 즉 ‘자본주의냐 사회주의냐’라는 논쟁을 일으켰다. 덩샤오핑이 남순강화에 나선 이유다. 덩샤오핑은 남순강화에서 “자본주의에도 계획이 있고 사회주의에도 시장이 있다”는 말로 ‘싱쯔싱서’를 앞세운 이념논쟁을 벌인 보수파를 머쓱하게 만들었다.

중국 개혁·개방의 심장부 선전


▎화웨이는 포르셰와 손잡고 스마트폰으로 작동하는 자율주행차를 선보였다. / 사진:연합뉴스
덩샤오핑은 “인민들이 잘먹고 잘사느냐가 사회주의냐 아니냐의 핵심”이라며 이념보다 실용주의 노선을 앞세웠다. 덩샤오핑의 개혁·개방 사상은 ‘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위만 잘 잡으면 된다’는 흑묘백묘론(黑猫白猫論), ‘자본주의에도 계획경제가 존재하듯 사회주의에도 시장경제가 있다’는 사회주의 시장경제론, 일방적인 평등화나 평준화보다 ‘부유할 수 있는 사람부터 먼저 부유해져라’는 선부론(先富論) 등으로 정리할 수 있다. 이를 바탕으로 오늘날 강력한 중국의 건설이 가능했다. 이를 이끄는 중국 기업군에서도 화웨이는 기술에 중점을 두고 있다는 점에서 단연 관심의 대상이다.

1449호 (2018.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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