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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태의 열국지 재발견(20) 무령왕의 후계자 승계] 사사롭게 자식 문제로 여기다 몰락 

 

총애한 후궁의 아들을 세자로 삼아… 권력 나눠주려다 혼란만 일으켜

▎사진:일러스트 김회룡
일반인에게는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전국시대(戰國時代)에 성공적인 개혁을 이룬 군주가 있다. 조나라에서 처음 왕을 칭한 무령왕(武靈王, 재위 기원전 326년~299년)이다.

[열국지]에 따르면 “조무령왕의 기상은 참으로 웅대했고 그 뜻은 천하를 삼키고도 남을 만했다.” 그는 “어떻게 해서든 조나라를 튼튼하게 만들겠다는 일념뿐”이었는데, 소위 호복개혁(胡服改革)을 단행한 것도 그래서였다.

호복개혁이란 나라 사람들의 의복을 오랑캐가 입는 옷인 ‘호복’으로 바꾸었다는 뜻이다. 호복은 간편하고 튼튼하여 활동적이다. 활을 쏘고 말을 타기에 적합한 옷차림으로서 실용성을 상징한다. 무령왕은 비단 의복뿐만 아니라 국가·사회 전반에 걸쳐 허례허식을 타파하고 효율성을 강화했다. 과거의 전통과 질서를 무너뜨리는 것에 대해 신하들이 우려하자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법령과 제도는 상황에 맞게 갖추는 것이고 의복과 도구는 사용하기에 편리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나라와 백성의 이익을 도모함에 있어서 반드시 옛것을 그대로 본받을 필요는 없으니, 옛 성인들도 시대의 변화와 현실의 상황에 맞게 법과 제도를 고치셨다. 책 속의 지식을 가지고 말을 모는 자는 말의 습성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는 법이다. 옛날 법도만을 따르면 세상을 뛰어넘기 어렵다. 옛 학문만을 따르면 오늘의 나라와 백성을 다스리지 못한다. 그대들은 어찌 이러한 생각에 미치지 못하는가?”

허례허식 타파하고 효율성 강화 업적

이처럼 현실에 대한 능동적인 대응을 강조한 무령왕은 수많은 반대를 뚫고 개혁 작업을 착실히 진행했다. 덕분에 조나라는 일약 강대국으로 발돋움한다. 하지만 무령왕은 만족하지 않았는데 그는 왕위를 세자에게 물려주고 주부(主父, 상왕)로 물러났다. 일상적인 국정을 아들에게 맡기고 자신은 영토 확장 사업에 집중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패권국가였던 진나라를 넘어서겠다며 연일 부국강병에 매진했다.

그런데 이런 무령왕이 비참한 최후를 맞는다. 궁궐에 갇혀 유폐된 채 굶어죽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졌던 것일까? 본래 무령왕에게는 아들이 둘 있었다. 첫 번째 왕후에게서 장(章)이라는 아들을 얻었고 두 번째 왕후 오왜(吳娃)에게서 하(何)를 얻었다. 무령왕은 오왜를 총애하여 세자였던 장을 폐하고 하를 세자로 삼았는데, 여기서 문제가 시작된다.

세자 하가 보위를 잇고 어느 날, 왕이 된 어린 동생 앞에서 굽실거리는 큰아들을 본 무령왕은 문득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잘못을 저지른 것도 아닌데 폐위시켜 이복동생의 신하로 만들어버렸으니 말이다. 무령왕은 측근을 불러 상의한다. “그대도 안양군(폐세자 장)을 보았겠지? 장성한 그가 한참 어린 동생을 왕으로 섬겨야 하니 자연 불만이 없지 않을 것이다. 내가 조나라 땅을 둘로 나누어 두 아들에게 모두 왕을 시켜볼까 하는데, 그대의 생각은 어떤가?”

측근은 펄쩍뛰며 반대했다. “지난 날 대왕께서는 분명 일을 잘못 처리하셨습니다. 그러나 임금과 신하의 분수가 이미 정해진 마당에 다시 그 질서를 흔든다면 장차 무슨 변란이 일어날지 모릅니다.” 명분도 없이 멀쩡한 형을 폐위하고 동생을 세자로 삼은 것은 분명 잘못한 일이다. 하지만 기왕 결정된 군신의 관계를 뒤집어버린다면 더 큰 혼란이 야기된다는 것이다. 측근의 말이 옳다고 생각한 무령왕은 뜻을 거둬들였다.

한데 무령왕의 큰아들은 실제로 큰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동생을 제거하고 왕위를 빼앗겠다는 욕심에 군사를 일으킨다. 장의 반란은 손쉽게 진압되었는데 이 때 무령왕이 도망 온 장을 숨겨주면서 사태가 커졌다. 반란을 진압한 대신들이 무령왕의 거부에도 강제로 군사를 진입시켜 장의 목을 벤 것이다. 왕에게 도전한 역적을 그대로 둘 수 없었기 때문이지만 그로 인해 상왕에게 죄를 지은 상황이었다.

이에 대신들은 일을 꾸민다. “주부(무령왕)는 장을 동정하여 궁궐 안에 감춰주었소. 우리가 할 수 없이 직접 장을 찾아내어 죽이긴 했소만, 진노한 주부는 필시 우리에게 궁궐을 침범한 죄와 허락 없이 장을 처형한 일을 문책할 것이오. 우리 일족을 모조리 죽여 버릴지도 모르오. 그러니 이제 과감히 대응해야 하오. 그래야만 우리가 살 수 있소.” 그리곤 무령왕의 궁궐을 폐쇄하고 사람들을 모두 쫓아내 버렸다. 식량도 없애버렸다. 무령왕 홀로 궁궐 안에 갇힌 것이다.

유폐된 무령왕은 굶주림에 시달려야 했다. 새 둥지의 알을 집어먹으며 필사적으로 버텼지만 한 달 후, 그는 쓰러진 채 더 이상 움직이지 못했다. 석 달이 지나 궁궐 문이 다시 열렸을 때 무령왕의 시신은 시들고 말라버려 살가죽만 남은 상태였다고 한다. 한 때 천하를 호령했던 군주가 아사한 것이다.

만약 무령왕이 원래대로 큰아들에게 보위를 넘겼다면 어땠을까? 작은 아들에게 왕위를 물려준 후 큰아들을 엄히 단속했다면 어땠을까? 큰아들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국법에 따라 처리하게 했다면 어땠을까? 이 세 가지 중 하나만 지켰더라도 저와 같은 비극은 막을 수 있었을 것이다.

이와 같은 무령왕의 사례는 후계자 승계 과정에서 유념해야 할 점을 보여준다. 우선, 후계자의 자격문제다. 왕위는 가장 현명하고 뛰어난 사람이 잇는 것이 이상적이겠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세습 군주제라는 상황과 정치적 안정을 고려해야 한다. 적장자 승계 기준이 세워진 것은 그 때문이다. 적장자 승계는 후계 구도를 둘러싼 분쟁을 차단하고 안정적인 왕위 계승이 가능하도록 하며, 리더십의 예측 가능성을 높인다는 장점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무령왕은 이 기준을 지키지 않음으로 써 혼란을 자초한 것이다. 물론 적장자라 해도 과오를 범했거나 왕위를 이을 자질이 없다면 당연히 교체할 수 있다. 하지만 무령왕의 맏아들 장은 그러한 하자가 없었다. 그렇다고 둘째 아들 하가 형보다 뛰어난 것도 아니었다. 심지어 한 나라를 책임지기에는 나이도 매우 어렸다. 단지 무령왕이 두 번째 왕비를 총애했기 때문에 그녀의 아들로 세자를 교체해버린 것이다. 명분 없이 후계자를 바꾼 것, 그리하여 맏아들에게 불필요한 원망을 심어준 것, 이것이 무령왕의 크나큰 과오라 할 수 있다.

명분 없이 후계자 바꿔

또 왕권의 안정성을 해친 것도 잘못이다. 과정이야 어찌됐든 일단 후계자에게 권력을 승계하기로 결정했다면 그의 권위를 세워주어야 한다. 후계자를 위협할 수 있는 요인을 제거하는 것이 그 첩경이다. 그런데 무령왕은 권력을 나눠주겠다는 의중을 보임으로써(측근에게 한 말이지만, 공개적이었기 때문에 모두에게 알려졌다), 후계자의 위상을 흔들어놓았다. 아무리 자식이라지만 왕을 죽이려고 반란을 일으킨 아들을 숨겨주려고 했다. 이는 국가의 공적질서를 위기에 빠뜨린 행동이었다. 무릇 후계자는 공동체의 미래를 위한 존재다. 아무리 자식을 후사로 삼는 세습군주제라고 해도 공적인 마음으로 최선의 선택을 해야 한다. 무령왕은 후계문제를 사사로운 자식 문제로 생각했기 때문에 본인의 몰락까지 초래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 필자는 칼럼니스트이자 정치철학자다. 성균관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고 같은 대학의 한국철학인문문화연구소에서 한국의 전통철학과 정치사상을 연구하고 있다. 우리 역사 속 정치가들의 경세론과 리더십을 연구한 논문을 다수 썼다. 저서로는 [왕의 경영] [군주의 조건] [탁월한 조정자들] 등이 있다.

1473호 (2019.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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