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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태의 세기의 담판(11) 최영·이성계, 명분과 명분이 충돌할 때] 상대의 명분 무력화할 방안 찾아야 

 


▎태조 이성계(왼쪽)와 최영 장군.
담판은 기본적으로 협상의 장이다. 자신의 입장을 100% 관철시키는 것이 아니라 양보할 것은 양보하면서 최선의 합의를 도출해야 한다. 담판의 결과가 전부 혹은 전무(All or nothing)라면 그 결과는 지속되기 힘들다. 표면상 결론이 난다고 해도 패배한 쪽에서 승복할 리가 없기 때문이다.

1388년(우왕 14년)의 고려로 가보자. 이 해 2월 명나라 황제 주원장이 보내 온 국서가 고려 조정을 발칵 뒤집어 놓았다. 고려가 차지하고 있는 철령(鐵嶺) 이북 지역은 본래 원나라의 땅이었으니 내놓으라는 것이었다. 고려의 임금과 신하들은 명나라의 조처에 분개하면서도 해당 지역은 역사적으로 고려의 영토였다는 것을 상세히 설명한 답서를 보냈다. 답서 말미에는 “엎드려 바라옵건대 폐하께서는 넓은 도량으로 포용하시고 두터운 덕으로 어루만져 주셔서, (철령 이북) 몇 개 주의 땅을 하국(下國)의 땅으로 삼아 주십시오. 신은 삼가 더욱 나라를 다시 만들어주신 은혜에 감읍하며 만수무강을 항상 축원하겠습니다”라고 적었는데 이처럼 저자세를 보인 것은 명나라와의 정면충돌을 원치 않아서이다.

명나라 철령위 통보에 고려 조정 분개

하지만 주원장은 고려의 요청을 듣지 않았다. 명나라의 요동도사가 압록강에 ‘철령 이북은 모두 명나라 요동에 귀속 된다’라는 공고문을 붙였고, 1000명의 명군이 평안북도 강계 지역으로 진주해 관아와 역참(驛站)을 설치했다. 그리고는 요동백호 왕득명을 보내 철령위를 세웠다며 일방적으로 통보해왔다. 명나라가 이처럼 나오자 고려는 격분했다. 특히 당시 시중(侍中, 오늘날 총리)으로서 국정을 책임지고 있던 최영은 아예 요동 정벌에 나서자고 주장한다. 그는 요동 정벌을 반대하는 공산부원군 이자송을 유배 보내 죽이는 등 시종일관 강경론을 펼쳤다. 고려가 명나라에 한번 우습게 보이면 앞으로는 더 심한 요구를 해오리라는 뜻에서였다. 우왕도 최영에게 적극 동조했는데 나라의 영토를 다른 나라에 빼앗긴다는 것은 임금으로서 최대 수치일 뿐 아니라 무엇보다 최영이 우왕의 정치적 보호자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부총리격인 수시중(守侍中) 이성계가 제동을 걸고 나섰다. 정권의 2대 주주였던 그는 우왕과 최영을 만난 자리에서 이른바 ‘4불가론’을 내세우며 요동 정벌을 반대했다. “지금 출병하는 것은 네 가지 점에서 옳지 못합니다. 작은 나라로서 큰 나라에 거역하는 것이 첫 번째 옳지 못함이요, 여름철에 군사를 동원하는 것이 두 번째 옳지 못함이요, 온 나라의 군사를 동원해 멀리 정벌에 나서면 그 허술한 틈을 타서 왜적이 쳐들어 올 것이니 세 번째 옳지 못함이요, 지금은 장마철이므로 활의 아교가 풀어지고 많은 군사가 질병을 앓을 수 있으니 네 번째 옳지 못함입니다.”

첫 번째 주장은 사대주의의 입장에서 국가의 자존심을 저버렸다는 비판을 받을 수 있겠지만, 지금 고려의 국력으로는 이제 막 중원을 통일한 강대국 명나라의 상대가 될 수 없다는 현실적인 진단이기도 하다. 나머지 세 가지도 충분히 합리적인 우려였다. 그러나 최영은 단호하게 거부한다. [조선왕조실록]과 [고려사]에서는 우왕이 이성계의 말에 동의를 했지만 한밤중에 최영이 다시 찾아와 “다른 의견을 받아들이지 마십시오”라고 권해 최영의 뜻대로 관철됐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렇지만 이것은 이성계의 정당성을 강조하기 위한 ‘승자의 기록’이고 실제로 최영은 이성계의 면전에서 반박했으리라 생각된다. 이 문제에 대한 최영의 다른 발언들로 추측건대 ‘설령 실패할지언정 싸워보지도 않고 나라의 땅을 내어주는 굴욕을 당할 수는 없다’며 이성계를 꾸짖었을 것이다.

최영이 요지부동으로 나오자 이성계는 새로운 의견을 제시했다. “그렇다면 우선 전하께서 서경(西京, 평양)에 머무시면서 가을에 출병하시옵소서. 곡식이 들판을 덮어 군량도 충분해질 것이니 많은 군사가 북을 치며 진군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은 출병하기에 적합한 시기가 아닙니다. 비록 요동의 한 성을 함락시키더라도 비가 한창 내려 군대가 전진할 수도 없고 퇴각할 수도 없는 지경에 빠질 것입니다. 병사들이 피곤하고 군량도 떨어질 것이니 큰 화가 닥칠 수 있습니다.”

좋다, 요동을 정벌하는 것에 동의하겠다. 다만 농번기와 장마철이 끝난 뒤로 정벌을 미뤄달라는 것이었다. 물론 이성계가 시기를 뒤로 미룬다고 해서 정말 출병할 마음이었는지는 알 수가 없다. 국면을 바꿀 시간을 벌기 위한 계책이었을 수도 있다. 어쨌든 이성계로서는 타협책을 제시한 것이었다. 하지만 이성계가 마지막으로 시도한 담판은 무위로 돌아갔다. 우왕과 최영은 이성계의 제안을 무시하고 요동 정벌군을 출병시켰다. 정벌군의 지휘관으로 압록강 위화도에 도착한 이성계가 장맛비와 질병 등 상황이 좋지 않다며 회군을 요청했지만 이 역시 거절하고 진군을 독촉했다. 그 뒤의 이야기는 역사가 알려주는 바와 같다.

만약 최영과 이성계의 담판이 다른 결론에 이르렀다면 어땠을까? 처음의 대립이야 어쩔 수 없었다 해도 최영이 이성계의 타협책을 받아들였다면? 위화도에서의 회군 요청을 수용했다면? 아니 애초에 위화도 회군 이후 이성계가 협상을 통해 명나라가 더 이상 철령 문제를 거론하지 않게 만든 것처럼 이때에도 외교적 대응에 나섰더라면? 그렇다고 최영이 틀렸고 이성계가 옳다는 뜻은 아니다. 나라의 소중한 영토를 강대국이 요구했다고 해서 아무런 저항도 해보지 않고 갖다 바친다는 것은 국가의 자존심을 무너뜨린다는 최영의 입장이나 승산 없는 전쟁을 일으켜 나라와 백성을 고통 속으로 내몰 수 없다는 이성계의 입장이나 모두 나름의 타당성을 가지고 있다. 한번 우습게 보이면 앞으로 더 심한 요구를 해올 것이라는 최영의 우려나 4불가론에서 나타나는 이성계의 우려는 각기 충분한 설득력을 갖는다.

문제는 이처럼 옳음과 옳음, 명분과 명분이 부딪힐 때다. 양측 모두 자신의 생각이 옳다고 확신하기 때문에 반대편의 의견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타협을 하는 것은 정의롭지 못한 일이라고까지 생각한다. 이런 상황에서는 아무리 협상을 하고 담판을 벌여봤자 소용이 없다. 전부 아니면 전무라고 충돌하며 갈등만 심화될 뿐이다. 최영과 이성계의 대립뿐 아니라 병자호란 때 척화파와 주화파의 대립, 조선의 붕당 간의 갈등도 모두 그러했다.

전부 또는 전무라고 충돌하며 갈등만 심화

그렇다면 상대방의 명분도 경청하고 합의점을 찾아라? 파국이 예상되니 어떻게든 뜻을 모아라? 그렇게만 된다면 좋겠지만 명분과 명분이 평행선을 달리는 것을 확인했다면 담판이 실패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을 각오해야 한다. 그리고 상대방의 명분을 무력화하고 자신의 주장이 이길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대응해야 한다. 최영은 그 점에 소홀해 실패했고 이성계는 그 점에 충실함으로써 성공한 것이다.

※ 필자는 칼럼니스트이자 정치철학자다. - 성균관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고 같은 대학의 한국철학인문문화연구소에서 한국의 전통철학과 정치사상을 연구하고 있다. 우리 역사 속 정치가들의 경세론과 리더십을 연구한 논문을 다수 썼다. 저서로는 [왕의 경영] [군주의 조건] [탁월한 조정자들] 등이 있다.

1509호 (2019.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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