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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태의 세기의 담판(17) 신개, 실록의 신뢰성을 확보하다] 연산군도 두려워한 사관(史官) 

 

역사 기록의 투명성은 정론직필에서 나와… 권력자 개입 원천 차단이 핵심 조건

▎조선시대 사관 복장을 한 직원들이 오동나무 상자에 넣은 조선왕조실록 태백산본을 실록 전용서고로 옮기는 환안(還安) 의식. / 사진:국가기록원
흔히 역사란 승자의 기록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조선왕조실록]은 역사의 진실을 제대로 담고 있을까? 물론 국가가 편찬한 만큼 일정한 목표가 있었을 테고, 편찬자나 집필자의 의도가 반영됐을 것이다. 실록과 수정·개수실록에서 한 인물에 대한 평가가 상반되는 경우도 있듯이 정치색이 개입되지 않았다고 말할 수도 없다. 그러나 일부 해석에 고개를 기웃거릴지언정 실록 자체에 의문을 갖는 사람은 드물다. 실록의 투명성과 공정성을 확보하기 위한 조선왕조의 여러 노력 덕분인데, 무엇보다 사관(史官)들의 헌신이 공헌한 바가 크다.

그 중에서도 꼭 기억해야 할 인물은 신개(申)다. 우선 태조 2년으로 가보자. 1월 12일 태조는 고려 공양왕 때 사관이었던 이행(李行)을 붙잡아 국문하라고 지시했다. 이행이 고려왕조의 사초(史草)에 태조가 우왕과 창왕을 죽게 만들었다고 적었기 때문이다. 태조는 “모든 백관과 나라 사람들이 함께 청한 것이지 나는 처음부터 저들을 살해할 마음이 없었다”라고 부인한다. 그리고 2년이 지난 태조 4년 6월 9일, 태조는 자신이 즉위한 이후의 모든 사초(史草)를 가져오라고 명을 내렸다. 이행 때의 일을 겪으면서 자신이 어떻게 기록되고 있는지 궁금했던 것 같다. 신하들의 반대로 물러서는 듯 했지만 태조 7년 윤5월 1일 다시 같은 명을 내렸다. 그러면서 당나라 태종도 동시대의 역사기록을 본 일이 있다며 당위성을 내세웠다. 일찍이 당나라 태종은 실록 편찬을 지시하면서 편찬된 내용을 읽어보고 수정까지 요청했었다.([자치통감]권197, 당기(唐紀) 13) 당 태종 같은 훌륭한 군주의 전례가 있으므로 자신의 명령을 따르라는 것이었다.

군주의 자아수양을 이끈 실록 직필


▎1. 임금의 언행을 기록하고 있는 사관(史官)의 모습을 묘사한 그림 / 2. 국보 151호이자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된 조선왕조실록.
이에 사초를 관리하는 총책임자이자 정승이었던 조준이 공민왕에서 공양왕까지의 (고려왕조)실록과 태조 즉위 이후의 사초를 모아 바치려 했다.([태조실록] 7년 6월 12일) 태조가 정계에서 활동했던 시기에 해당한다. 태조는 예전에는 사관이 의무적으로 배석하지 않았으므로 임금과 신하가 독대하며 나눈 이야기를 파악할 수 있는 방법이 없을 테니, 자신이 그 내용을 점검해주겠다는 명분을 내세웠다. 그러자 사관이었던 신개가 강력히 반박했다.

“옛날 당나라 태종이 방현령에게 말하길 ‘앞 시대의 사관이 기록한 것을 군주가 보지 못하게 하는 이유는 어째서인가?’라 하니, 방현령은 ‘사관은 허위로 미화하지 않고 악을 숨기지 않으니, 군주가 이를 본다면 필시 노여워하게 될 것이므로 감히 임금께 올리지 않는 것입니다’라고 답했습니다. … 삼가 생각하옵건대 창업한 군주는 자손들의 모범이 됩니다. 전하께서 당대의 역사를 살펴보시게 되면 뒤를 잇는 임금들은 반드시 이를 구실로 삼아 “선고(先考)께서 하신 일이요 아조(我祖)께서 하신 일”이라면서 이어가고 습관화하여 실록을 보는 것을 일상적인 일로 만들어 버릴 것입니다. 그리 되면 역사를 기록하는 신하로서 누가 감히 직필(直筆)을 할 수 있겠나이까. 역사에 직필이 없어져서 아름다운 일과 나쁜 일을 보여주어 권장하고 경계하는 뜻이 어두워지게 된다면, 그 시대의 군주와 신하가 무엇을 꺼리고 두려워하여 자신을 수양하고 반성하겠나이까? … 진정 전하께서 이를 한 번 보시고 난다면 후세 사람들은 장차 ‘그때 임금께서 친람하셨으니 사신(史臣)이 어찌 감히 사실대로 적었겠는가?’라 말하고야 말 것이니 전하의 성스러운 덕과 큰 업적이 도리어 거짓된 글로 여겨져 신뢰를 얻지 못할까 두렵습니다.”

임금이 실록과 사초(史草), 특히 동시대의 기록을 보면 안 된다는 것은 역사기록의 신뢰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다. 동시대의 역사는 기록자와 기록대상이 모두 생존해있으므로 서로에게 미치는 영향을 차단하지 않는다면 왜곡이 발생하기 쉽다. 하지만 조선 건국 초기만 해도 이러한 규범이 실질적으로 작동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송나라 성리학자들이 실록을 본 당나라 태종의 행동을 비판하긴 했지만 그것이 나라의 원칙으로 자리 잡은 것은 아니었다. 더욱이 태조의 말도 나름 명분을 갖춘 것이었다.

눈치보기·자기검열을 경계해 객관성 확보

그러나 신개는 임금이 절대로 동시대의 역사를 봐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되면 첫째, 기록을 하는 사람이 군주의 눈치를 보게 된다. 나라의 최고 권력자이자 생사여탈권을 지닌 임금이 실록이나 사초를 본다면, 사관이 객관적으로 역사를 기록하기 힘들어질 것이다. 군주에게 비판적이거나 불리한 내용에는 자기검열이 작동할 가능성이 높다. 이는 군주뿐 아니라 다른 권력자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권력에 노출돼 있다는 것만으로도 역사의 미화와 변조가 일어날 가능성이 높아진다.

둘째, 군주가 한번 실록을 보게 되면 그것이 전례(前例)이자 전범(典範)이 된다. 특히 창업군주인 태조의 경우 행동 하나하나가 후대 임금들이 따라야 하는 ‘성헌(成憲)’으로 남는다. 만약 태조가 실록이나 사초를 읽는다면 후대 임금들도 이를 답습하게 될 것이고, 자연히 군주가 역사 기록에 개입하는 단초를 열어놓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셋째, 후대사람들이 실록에 신뢰성에 의문을 갖게 될 것이다. ‘군주가 볼 수 있는데 과연 사실대로 적었겠는가?’하고 생각하게 된다는 것이다.

신개는 이러한 논리로 서슬 퍼런 임금의 지시에 맞섰다. 그가 죽음을 각오하고 임금과 담판한 것은 역사 기록의 투명성·객관성·공정성을 지켜냄으로써 실록을 신뢰할 수 있는 역사로 만들고 싶어서였다. 태조는 이러한 신개의 주장을 윤허하지 않았다고 기록돼 있는데, 이후 다시 그와 같은 지시를 하지 않은 것으로 볼 때, 신개의 말에 설득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동시대의 역사를 보려는 임금들의 시도는 이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1438년(세종20년) 3월 2일 세종이 당대의 역사기록을 보는 것은 문제가 되겠지만 그 이전의 실록을 읽는 것은 괜찮지 않느냐고 말했을 때에도 신개가 나섰다. 그는 실록을 본다고 해서 그 자체로 문제가 생기는 것은 아니지만 임금이 실록을 열람할 수 있도록 풀어놓음으로써 후대에는 “교묘한 말과 수단으로 잘못을 얼버무리고 단점을 장점으로 두호하여 사관이 죽음을 면치 못하게 되는 일이 얼마든지 벌어질 수 있게 된다”고 간언했다. 당대의 기록이 아니더라도 권력자가 역사에 개입해 기록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상황을 원천적으로 차단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임금과 벌인 신개의 담판을 토대로 조선에서는 임금이 실록을 볼 수 없다는 규율이 엄격하게 준수됐다. “역사가 없다면 임금이 무엇을 꺼려서 자신을 수양하고 반성하겠느냐”는 신개의 말처럼, 군주의 모든 것이 가감 없이 기록으로 남는다는 사실이 임금으로 하여금 항상 실록의 평가를 두려워하게 만든 것이다. 연산군조차 “임금이 두려워하는 것은 사서(史書)뿐이다”라고 말했을 정도였다([연산군일기] 12년 8월 14일). 더욱이 자신이 그 기록에 개입할 수 없고 기록의 내용도 확인할 수 없다면, 군주는 말과 행동 하나하나에 보다 신중을 기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 필자는 칼럼니스트이자 정치철학자다. - 성균관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고 같은 대학의 한국철학인문문화연구소에서 한국의 전통철학과 정치사상을 연구하고 있다. 우리 역사 속 정치가들의 경세론과 리더십을 연구한 논문을 다수 썼다. 저서로는 [왕의 경영] [군주의 조건] [탁월한 조정자들] 등이 있다.

1523호 (2020.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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