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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근영의 팝콘 심리학] 과학적인 태도의 힘 '기생충' 

 

봉준호 감독은 좌파·우파 아닌 과학적인 영화감독

봉준호 감독과 그의 작품 [기생충]은 2020년 한국 영화뿐만 아니라 세계 영화 역사의 한 장을 만들어냈다. 미국 아카데미상 시상식이 있었던 지난 2월 10일, 우리 모두는 전인미답(前人未踏)이라는 말의 어마어마한 예시가 실제로 벌어지는 순간을 목도할 수 있었다. 영화 [기생충]은 예술성을 중심으로 평가하는 칸 영화제의 대상과 미국 영화시장의 꽃이라 할 수 있는 미국 아카데미상의 작품상을 동시에 받은 사상 두 번째 영화가 되었으며, 봉준호 감독 본인은 월트 디즈니 이후 두 번째로 미국 영화 아카데미에서 한번에 4개 부문을 수상한 인물이 되었다.

물론 한국 영화는 물론이고 아시아 영화, 심지어 외국어 영화가 미국 아카데미의 작품상을 받은 건 그냥 그대로 역사상 최초다. 한국 영화는 그 이전까지 미국 영화 아카데미의 최종 후보작으로 오른 적도 없었다. 아마 몇 년 전에 누군가가 한국 영화가 미국 아카데미상에서 작품상이나 감독상을 받을 것이라고 주장했다면 그의 정신이 온전한지부터 의심받았을 것이다.

흥미로운 건, 그의 작품 [기생충]은 전형적인 아카데미 작품상의 조건과도 거리가 멀었다는 점이다. 단지 외국어 영화여서가 아니다. 이 영화가 전하는 메시지나 감정이 그렇다. 미국 영화 아카데미가 선호하는 작품은 대개 인간성의 승리를 담은 영화들이다. 온갖 역경을 극복하고 승리를 일구어낸 불굴의 의지, 비정한 차별과 편견에도 불구하고 가꾸어낸 우정과 신의, 어떤 위대한 인물이 그 위대함에 이르기까지 겪어야 했던 어려움과 고통, 혹은 이 모든 것이 적절히 조합된 작품들이 최고상을 받곤 했다.

하지만 [기생충]에는 그런 정서를 찾아볼 수 없다. 등장인물 들은 인간애가 아니라 기만과 오류로 서로에게 엉켜 들어가고, 예측 못할 방향으로 꼬여가던 관계는 결국 어처구니 없는 비극으로 끝난다. 굳이 비슷한 예를 들자면,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2007년 수상)나 [허트로커](2009년 수상)에 가깝다고 할 수 있을까.

빈부의 격차 다뤘지만 누구의 편도 들지 않아

같은 한국인의 입장에서도 이 작품이 전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일을 온전히 자랑스럽게만 느끼기에는 애매한 면이 있다. 어떤 면에서 영화 [기생충]은 가수 싸이의 국제적 히트곡인 ‘강남스타일’과 비슷한 면이 있다. 둘 다 한국의 현실을 예찬하지 않았다는 점 말이다. 예찬은커녕 오히려 같은 한국인이라면 숨기고 싶을 진실을 예리하게 끄집어내고 뜻밖의 방식으로 뒤틀어 낸 작품들이다. 노래 ‘강남스타일’의 전체 내용은 ‘강남’이라는 단어에 담긴 한국 특유의 허위의식에 대한 풍자다. [기생충]은 다들 아시듯 ‘반지하’로 상징되는 빈부격차를 소재로 한다. 하지만 이 영화는 지금까지 이 소재를 다룬 다른 영화들과 그 태도에서 차이가 있다.

가장 먼저 지적할 것은 이 영화가 누구의 편도 들지 않는다는 점이다. 감독은 영화 속 빈자와 부자들에게 어떤 당위나 도덕적 의무도 부여하지 않는다. 부자가 도덕적으로 타락했다거나, 가난한 이들에게 그런 행동을 정당화할 어떤 근거가 있다거나 하는 식의 전개는 이 영화와는 전혀 무관하다. 영화는 기택의 가족을 ‘착하고 순박해서 가난해질 수 밖에 없는, 보호받아야 할 사람들’로 그리지 않는다. 반대로 박사장 가족을 사치나 허영에 빠진, 오만하고 부도덕한 사람들로 그리지도 않는다.

가난한 가족이 부자 가족보다 도덕적으로 더 나은 점은 전혀 없다. 오히려 그들은 온갖 범죄를 저질러가며 부자 가족에게 기생하는데 성공한다. 부자 가족이 원하는 건 자신들의 일을 믿고 맡길 수 있는 사람들이었을 뿐이다. 박사장 가족은 건전한 부부이자, 자식을 아끼는 보통 부모들이다. 그들은 특별히 누군가를 경멸하거나 모욕하지도 않는다. 그들이 원했던 것은 단 하나, 믿을 수 있는 사람들을 고용하려던 것 뿐이다. 마치 불결한 속옷으로부터 단 한 점의 오염도 막기 위해 비닐장갑을 낀 박사장 부인이 그 속옷을 만진 비닐장갑으로 자기 입을 틀어막는 것처럼, 그들은 자신들이 기피했던 최악의 결과를 바로 그 기피를 시도한 방법에 의해 직면하게 된다.

이 영화 속의 긴장감은 바로 다음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는, 그러나 일단 벌어지고 나면 납득이 되는 상황이 연속되면서 축적이 된다. 이는 이 영화가 처음 설정 속에 담긴 가능성을 그 어떤 윤리적인 한계나 원칙에도 속박되지 않고 자유롭게 펼쳐내기 때문이다. 덕분에 영화는 비평가들에게 높은 평가를 받았지만, 이 영화가 사람들을 알게 모르게 불편하게 만드는 것도 바로 그 지점이다. 다른 사람을 고용하는 입장의 관객들에게 이 영화는 공포 그 자체다. 어떤 이는 이 영화를 보며 “저래서 가난한 사람들을 조심해야 한다”거나 “이러니까 사람은 가려서 써야 한다” 는 식의 교훈을 얻었다고 말한다.

진짜 가난을 겪어본 이들은 이 영화가 현실의 절박한 가난을 포르노처럼 전시한다고 불편해 한다. 이 가족이 가난한 환경에 있으면서도 단 한 번도 가난으로 인한 '서러움'을 드러내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평범한 관객들에게도 불편함은 찾아온다. 영화 중반까지 기택 가족의 사기극을 마치 남의 일인 것처럼 구경하던 이들은 박사장이 그 가족에게서 풍기는 냄새를 '지하철에서 가끔 맡을 수 있는 냄새'라고 지칭하는 순간부터 섬찍하기 마련이다. 나 역시 영화를 본 다음부터 한동안 내가 풍기는 냄새를 의식하며 지냈다.

그러니까 이 영화는 결코 감동을 주는 영화가 아니다. 보고 나면 계속 깔끔하지 않은 뒷맛이 남고, 그로 인해 전에 생각해본 적 없던 현실을 자신의 머릿속에 집어넣게 만드는 영화다. 예를 들어, 영화는 빈부격차를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이 영화가 계급갈등에 대한 이야기라는 평은 애매하게 사실과 다르다. 실제 갈등은 계급 사이에서가 아니라 계급 내에서 벌어지고, 다른 계급의 구성원은 그렇게 폭발한 갈등의 파편을 맞았을 뿐이다. 사회적 격차의 어둠은 어느 한쪽에만 내려오지 않는다. 같은 하늘 아래서 사는 한, 우리는 모두 그 어둠에 영향을 받게 되어 있다. 감독은 어린 시절에 도시락을 제대로 챙겨오지 못하는 가난한 집 친구들을 집에 데려와서 밥을 함께 먹곤 했던 사람이다. 그의 눈에는 빈부격차의 그림자가 아주 오래 전부터 뚜렷하게 보였던 것이다. 봉준호 감독 영화를 관통하는 지하와 지상의 대비는 단순한 예술적 모티브가 아니라 그 평생의 테마인 셈이다.

실제 갈등은 계급간 아닌 계급내에서 발생

요컨대, 이 영화가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비결은 성공한 비즈니스의 비결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 어떤 고정관념이나 편견에도 사로잡히지 않고 현실을 있는 그대로 관찰하고 그 속에 담긴 의외의 가능성을 발견해 행동하되, 거기에 자신의 모든 열정과 진심을 담아 낸 것이다. 애플의 스티브 잡스, 페이스북의 마크 저커버그, 아마존의 제프 베조스 등 지금 현재 미국 시장을 움직이는 혁신적 창업자들이 그랬다. 그리고 이는 누구나 동의할 수 있는 사실과 증거에 근거해서 가설을 세우고 그 타당성을 다시 확인하는 과정을 반복한다는 점에서 과학연구의 원칙과도 통한다. 그러니 봉준호 감독은 좌파 감독도, 우파 감독도 아니다. 굳이 지칭하자면 과학적인 영화감독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 필자는 심리학 박사이자 한국청소년정책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이다. 연세대에서 발달심리학으로 석사를, 온라인게임 유저 한일비교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심리학오디세이], [팝콘심리학], [무심한 고양이와 소심한 심리학자] 등을 썼고 [심리원리], [시간의 심리학], [인간 그 속기 쉬운 동물] 등을 번역했다.

1524호 (2020.0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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