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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선 체제’ 2년, 확 바뀐 현대차그룹] “딱딱한 기업문화 바꿔 인재 잡아라” 

 

바텀-업 방식으로 변화 방향 디자인… 핵심인력 확보 위한 혁신 지속

▎지난해 10월 서울 양재동 현대·기아차 본사에서 열린 타운홀미팅에서 정의선 수석부회장이 직원들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 사진:현대자동차그룹
“앞서 20년보다 최근 2~3년간의 변화가 더 크게 느껴집니다.” 현대차그룹에서 20년이 넘게 근무한 A 책임 매니저의 평가다. 정 수석부회장 체제 이후 가장 큰 변화를 체감하는 건 현대차그룹의 구성원들이다.

그동안 현대차그룹의 기업문화는 남성적이고 딱딱하다는 평가가 주를 이뤘다. A씨는 “제품 주기가 짧고 혁신을 추구하는 IT 업종과 달리, 자동차는 제품 교체주기가 길고 혁신보다 안전에 집중해야 하기 때문에 자연스레 보수적인 기업문화가 정착된 것이라고 스스로를 납득시키며 20년간 회사생활을 해왔다”고 말했다. A씨는 “은퇴할 때까지 이런 회사에서 근무할 것이라 생각했는데, 변화는 삽시 간에 일어났다”고 덧붙였다.

특히 지난해부터 A씨의 생활은 완전히 달라졌다. 20년간 여름이고 겨울이고 어두운 정장을 유니폼처럼 입었던 그는 요즘 청바지에 운동화를 신고 출근한다. 젊은 직원들은 반바지를 입는 경우도 많다. 지난해 여름까지만 해도 ‘부장’이었던 그의 직책은 ‘책임매니저’가 됐다. 아직 외부에선 부장으로 부르는 이가 많지만 사내에선 익숙해졌다.

변화는 또 있다. 결제서류를 결제판에 준비해놓고 외근 나간 임원이 들어오기만을 기다리는 일이 사라졌다. 메일로 보고하고 다른 할 일을 한다. 즉시 결정이 필요하면 카카오톡으로 보고한다. 이런 변화가 사실 대단할 건 없다. IT 스타트업은 물론, 많은 대기업에서도 도입한 내용들이다. 현대차그룹의 그간의 보수적인 기업문화가 오히려 기형적이었다.

주목할 건 ‘변화의 속도와 과정’이다. 가장 보수적인 회사가 불과 2년여 만에 IT기업처럼 변화했다. 현재의 모습은 변화의 완성형이 아니다. 바텀-업(아래로부터) 방식의 의견개진 창구를 만들어 환경에 맞춰 끊임없이 진화할 수 있도록 디자인됐다.

이런 변화를 적극적으로 주문한 건 정 수석부회장이다. ‘직원 복지’를 위해서라고 단순히 생각할 일은 아니다. ‘인재를 모아야 한다’는 생존을 위한 숙명과 맞닿은 절박한 문제다. 현대차그룹에서 기업문화 혁신과 동시에 급진적인 인사와 채용방식 변화가 이뤄지고 있다는 점이 이를 방증한다. 정 수석부회장 체제 2년간 현대차그룹 기업문화의 변화를 들여다봤다.

임직원들은 ‘수부(수석부회장)’로 불러

2018년 9월 취임한 정 수석부회장은 2019년 신년사에서 “4차 산업혁명 등으로 기존과 확연히 다른 새로운 ‘게임의 룰’이 형성되고 있다”며 “그런 만큼 조직의 생각하는 방식, 일하는 방식에서도 변화와 혁신을 추진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후 그 해 3월 ‘복장 자율화’가 시작됐다.

주목 할 건 자율복장제도가 시작된 2019년 3월 4일부터다. 이날 점심시간 즈음 양재동 본사 1층 로비에선 첫 ‘타운홀 미팅’이 열렸다. 당시 경영지원본부장을 맡고 있던 장재훈 부사장이 로비에 전시된 G90 앞에 섰다. 로비에 모인 직원들은 장 부사장에게 “반바지나 추리닝을 입어도 되는 것이냐”고 물었고, 장 부사장은 “시간, 장소 경우와 상황에 맞게 본인이 자율적으로 해석하고 판단하면 된다”며 “자율이 다양성으로, 창의성으로 이어지길 바란다”고 답했다.

이날 첫 타운홀 미팅 이후 현대차그룹 본사 직원들에겐 카카오톡 오픈채팅방 링크가 보내졌다. 이른바 ‘기문혁(기업문화혁신팀의 대화명)’이 운영하는 직원 대상 익명 채팅방이다. 2 019년 10월의 어느 날, 이 채팅방에 또 한 번의 타운홀 미팅이 공지됐다. 주제는 ‘함께 만들어가는 변화.’ 앞서와 달리 로비가 아니라 2층 대강당에서 진행된다는 공지였다. 이어 정 수석부회장이 참가할 거란 소문이 돌았고, 800명 수용 규모의 강당엔 1200명이 넘는 임직원이 모여들었다. 임직원들은 ‘수부’라는 줄임말로 정의선 수석 부회장을 부르며 여러 질문을 던졌다. 기존 현대차그룹에선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정 수석부회장은 이 자리에서 “서로 만나서 한 장 한 장 넘기며 이야기 하는 건 제발 하지 마십시오”라며 보고문화를 언급했다. 이에 앞서 현대차그룹은 빠른 보고문화 정착을 위해 결재판 사용을 금지하는 상징적 조치를 내렸는데, 그럼에도 여전히 대면보고를 고집하는 부서가 있다는 얘기가 오픈채팅방에서 지속적으로 나오던 상황이었다.

정 수석부회장은 “메일로 할 수 있는 건 메일로 하고, 전화나 화상으로 얘기 할 수도 있다”며 “포인트만 적어서, 단 몇 줄이라도 뜻만 전달되면 된다, 효율적이고 빠른 방법을 추구했으면 한다”고 말했다. 이는 그간 대기업의 총수들이 사용하지 않던 ‘구체적이고 명확한’ 언어였다. 이 한마디로 수십 년 간 이뤄져온 보고 방식이 급격히 변했다.

기업문화의 변화는 현재도 진행 중이다. 오픈채팅방에는 700여명의 임직원이 모여 가감 없이 대화를 나누고 있다. 매주 금요일엔 건의된 사항에 대해 기문혁이 피드백을 정리해 공유한다. 이밖에 조직별 자율적인 변화활동 추진을 위한 변화관리 프로그램(CCP)을 만들어 실시하고 있다. 현대차그룹 관계자는 “2017년부터 매년 조직문화 진단을 실시하고, 이와 연계한 CCP를 통해 조직별 리더를 중심으로 변화를 불러일으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인재들이 마음껏 기량 펼칠 수 있는 환경 만들 것”


정 수석부회장의 기업문화 혁신이 지향하는 점은 인재가 모일 수 있는 회사를 만드는 것에 있다. 앞서 시대에 동떨어졌던 기업문화는 많은 인재들이 회사에 등을 돌리게 만든 원인 중 하나였다. 경직된 체계 속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제한됐다. 자기개발을 원하는 인재는 다른 업종으로 이직하거나 스타트업에 뛰어드는 게 다반사였다. 사드(THAD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사태 이후 회사의 어려움이 커지자 이는 더 심화됐다. 젊은 직원들 사이에선 “용기 없고 갈 곳 없는 사람만 남는다”는 한탄이 나왔다.

그는 타운홀 미팅에서 “자동차 볼륨으로 1등하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닌 기업문화가 진보적으로 나가서 그 면에서 1등을 하는 것, 가장 오고 싶어 하는 회사가 되는 것이 우리가 추구해야 할 목적”이라고 강조했다.

정 수석부회장 체제에서 시행된 다양한 인사 조치는 그가 원하는 바가 무엇인지 여실히 보여준다. “인재들이 마음껏 기량을 펼칠 수 있는 환경을 만든 것”이란 게 현대차그룹 안팎의 평가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는 직급체계의 변경이다. 현대·기아차는 지난해 3월 일반직 직급 축소와 함께 기존 6단계의 임원 직급을 4단계로 축소했다. 이제 막 임원이 된 이사대우·이사는 하루아침에 상무가 됐다.

고태봉 하이투자증권 리서치센터장은 “현대차에는 연령대가 높은 상무급 임원이 많아 상대적으로 이사대우나 이사들이 역량을 펼치지 못했다”면서 “결국 임원직급 개편은 정 수석부회장과 연령대가 비슷한 이사대우, 이사에게 마음껏 자기 목소리를 내보라는 메시지”라고 분석했다.

‘영광의 인물들’을 경영 일선에서 물러나게 한 것도 이런 맥락에서 해석이 가능하다. 수석부회장 취임 후 수차례의 인사를 통해 현재 현대차그룹의 영광을 만들어낸 ‘거목’들을 과감히 경영의 중심에서 배제한 것이 미래를 이끌 새로운 인물들에게 기회를 만들어 주기 위함이라는 얘기다. 실제 이들이 떠난 자리는 대부분 외부 인사로 채워졌다.

채용 변화도 주목할 부분이다. 현대차는 지난해 신입사원의 정기 공개채용을 폐지하고 상시채용 제도를 도입했다. 이는 국내 대기업 중 가장 빠른 변화였다. “개별 직무에 맞는 직무 역량을 가진 인재를 채용하기 위함”이란게 현대차 측의 설명이었다. 최근에는 이런 상시채용을 더 확대 중이다. 현대차는 지난 7월부터 그간 연 1회 진행하던 석·박사급 해외 인재채용을 상시 지원, 선발로 바꿨다.

지난해부턴 ‘직원추천 채용제도’도 실시하고 있다. 현대차그룹 관계자는 “불특정 다수 대상 제한적인 채용 채널만으로는 우수인재 확보에 한계가 있어 시행했다”며 “추천제도를 통해 적합한 인재를 적시에 선발하도록 강화할 계획”이라고 설명했다.

[박스기사] ‘직접 찾아 경청한다’ 정의선식 소통

현대차그룹 내외에선 변화의 가장 큰 동력이 ‘정의선 수석부회장 특유의 소통방식’에 있다고 입을 모은다. 사람들이 말하는 그의 소통 방식은 ‘직접’과 ‘경청’이란 두 가지 키워드로 요약된다. 그는 이야기를 직접 듣기를 원한다. 내성적인 성격임에도 불구하고 정부 그린뉴딜 보고회에 직접 나서고, 타운홀 미팅에서 직원들을 직접 마주한 것들이 모두 이런 성향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소통의 대상은 넓다. 평사원에게 직접 메일을 쓰고, 격식이 없이 만난다.

직접 소통하겠다는 의지는 다른 방식으로도 표출된다. 출장이나 대외적 행사에 나설 때 실제 해당 분야를 담당하는 인력과 동행한다. 지난해 앱티브와 조인트벤처(JV) 설립 계약을 위한 출장에선 30대 장웅준 상무(자율주행센터장)와 함께했고, 최근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을 만날 땐 서보신 상품담당 사장 등이 배석했다. 기존 전략기술본부 산하에 있던 인공지능(AI) 전담 조직(AIR Lab)을 최근 사내독립기업(CIC)인 에어즈 컴퍼니(AIRS Company)로 출범시킨 걸 두고도 “미래 동력만큼은 다이렉트로 소통하겠다는 의지를 나타낸 것”이란 평가가 나온다.

기아자동차의 그레이트 마스터(6000대 이상 판매)인 정송주 기아자동차 서울 망우지점 영업부장도 지난해 말 정 수석부회장을 직접 만나 이야기를 나눈 경험이 있다. 그는 “미래 자동차 판매 환경 등과 관련해 여러 이야기를 주고받았다”며 “긴 시간 이야기를 나누면서 단 한 번도 나의 말을 끊지 않았고, 영업 현장에 있지 않으면 이해하기 어려운 이야기들을 모두 이해했으며, 이따금씩 날카로운 질문을 던졌다”고 회상했다.

- 최윤신 기자 choi.yoonshin@joongang.co.kr

1546호 (2020.0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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