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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르고뉴에서 와인 담그는 경상도 아줌마 

 

글 손용석 기자, 사진 김민규 기자

최근 〈부르고뉴 와인〉 번역 출간 기념회에 참석하기 위해 한국을 찾은 박재화 사장.

"와인을 마셔보면 만든 사람의 속마음을 알 수 있지예. 엠마뉴엘 루게는 겉만 보면 털털하고 과묵한 아저씨지만 얼마나 배려심이 강한데요. 그가 만든 와인도 섬세하기 그지 없지예.”

구수한 경상도 사투리를 쓰는 이 여자. 프랑스 부르고뉴에서 한국인으론 유일하게 와인을 만드는 박재화(43) 씨다. 그는 한국과 일본의 와인 애호가 사이에선 유명 인사다.

그의 와인 ‘루 뒤몽’이 일본 와인 만화 <신의 물방울>에 소개되며 큰 화제를 모았기 때문이다. 부산에서 대학 강사를 하던 그는 1996년 프랑스로 떠났다. 미술품 복원 공부를 하고 돌아와 전문가가 되는 게 목표였다.

기숙사가 있고 체류비가 적게 드는 부르고뉴대를 선택했다. 그는 “당시 부르고뉴가 와인 산지인지도 몰랐다”며 “대학에서 선후배들이 술 마시며 토하는 것을 보면서 술이라면 질색했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프랑스어 초급반에서 지금의 남편 나카타 고지를 만난 후 와인에 대한 인식이 바뀌었다. 그는 “당시 아르망 루소의 양조장을 함께 방문해 와인을 마셨는데 술 같지가 않더라”며 “고급 녹차의 끝 맛처럼 긴 여운과 잔잔한 향기가 너무 좋았다”고 말했다. 두 사람은 진로를 바꿔 와인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2000년 7월 일본인 투자자로부터 3억 원을 받아 뉘생 조르주에 양조장을 차렸다. 연간 임대료가 80만 원인 사무실과 오크통 70개를 넣을 수 있는 창고가 전부였다. 2001년 결혼한 박 씨 부부는 2003년 루 뒤몽 와인을 만들었고, 레이블엔 ‘天괁쥈人’ 한자를 담았다. 천(天)은 강수량과 일조량, 지(地)는 토지와 지형, 인(人)은 사람의 노력을 말한다.

그는 “부르고뉴의 ‘테루아르’ 개념을 동양적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와인 제조가 순탄치만은 않았다. 남이 쓰던 오크통을 무턱대고 사서 확인도 하지 않고 와인을 담그는 바람에 ‘식초’를 만들기도 했다. 박 씨는 “좋은 와인을 만드는 데는 투자가 따른다는 것을 알았다”며 “학교보다는 현장에서 배운 게 훨씬 많다”고 강조했다.

초기엔 수익 없이 빚만 늘어갔다. 버는 돈 모두를 양조와 설비 구입에 썼기 때문이다. 하지만 품질에 집중한 덕에 루 뒤몽 와인은 서서히 인기를 끌기 시작했다. 특히 <신의 물방울>에 ‘루 뒤몽 뫼르소’가 소개되면서 한국과 일본에서 수요가 급증했다. 박 씨 부부는 지난해 12월 쥐브레 샹베르탱에 20억 원을 들여 사무실, 창고 등 와인 제조 시설과 거주 공간을 마련했다.

박 씨는 “사무실 직원 두 명이 늘었지만 와인 만드는 일은 남편과 둘이서 한다”며 “양보다 품질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박 씨는 얼마 전 국내에 <부르고뉴 와인>(Les Vins de Bourgogne)을 번역 출간했다. 그는 “아직 국내에 잘 알려져 있지 않은 부르고뉴 와인 교과서라고 보면 된다”고 설명했다.

박 씨가 존경하는 와인 생산자는 부르고뉴의 엠마뉴엘 루게다. 그는 “루게는 평소 자신이 좋아하는 와인을 만들라고 충고한다”며 “루게와 같은 와인을 선보이고 싶다”고 말했다. 푸근한 경상도 아줌마의 섬세한 속마음을 엿볼 수 있었다.

200907호 (2009.0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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