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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VER STORY - 손 큰 것부터 경영철학까지 빼닮아 

 

김태진 포브스코리아 전문기자
선친 정주영 명예회장의 치밀한 계산과 ‘하면 된다’ 정신에 품질경영으로 현대자동차그룹의 입지 다져

▎2011년 3월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아산 정주영 10주기 추모사진전에서 정몽구 현대차 회장이 선친 사진을 보며 생각에 잠겨 있다.



세계 5대 자동차 메이커로 발돋움한 현대자동차그룹의 영광은 창업자 고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의 장남인 정몽구 회장이 꽃피웠다. 두 사람의 경영 스타일은 강력한 리더십을 바탕으로 하는 카리스마, 항상 목표를 높게 잡고 ‘하면 된다’를 강조하는 공격 경영, 현장을 중시한다는 면에서 공통점이 있다.

정 회장은 손이 큰 것부터 아버지의 경영철학까지 그대로 물려받았다. 그는 1998년 기아차를 인수하고 품질경영으로 고삐를 죄어 현대·기아차를 글로벌 5위로 키워냈다. 사실상 제2의 창업자다. 여기에 아버지도 좌절한 고로 사업을 완수해 현대제철을 포스코에 견줄만한 철강사로 변신시켰다.

정 회장을 대표하는 ‘품질경영’과 연구개발 강조는 1990년대 현대정공과 현대자동차써비스 사장을 맡으며 절실히 느낀 결과다. 특히 서비스를 담당하면서 현대차의 품질문제를 누구보다 정확히 파악했다. 출고한 지 석달도 안된 멀쩡한 신차가 사소한 결함으로 수리를 하는 데 대한 소비자의 거친 불만을 지켜봤다. 현대정공은 90년대 초 일본 미쓰비시와 기술제휴해 갤로퍼와 싼타모를 생산했다.

당시 미쓰비시는 로열티 이외에 기술지도 명목으로 매년 수십억원을 가져갔다. 겨우 적자를 면하던 시절, 정 회장은 피땀 같은 현금을 건네주며 기술 없는 설움을 톡톡히 경험했다. 품질·기술이 있어야 이익을 낼 수 있다는 것을 체득한 것이다.

1998년 현대차 회장으로 부임하면서 가장 먼저 손을 댄 것이 품질이다. 수시로 울산과 충남 아산공장을 방문해 도어나 보닛을 거세게 닫아봤다. 이런 과정에서 나사가 비뚤어져 나오거나 조립 틈새가 보이면 공장장은 그 자리에서 목이 달아났다. 아울러 한 달에 두 번씩 열리는 품질회의를 통해 품질을 구매·재경·판매 등 전사 책임으로 만들었다.

사소한 원인이라도 추적해 수시로 본부장 옷을 벗겼다. 조직에 절로 긴장감이 돌았다. 퇴직한 전직 사장은 “임원이 된 뒤 언제 그만둘 지 몰라 오전 6시에 출근해 업무를 챙기다 보면 하루가 후딱 지나갔다. 서울 양재동 사옥 22층(회장실)에서 호출이 오면 각오하고 엘리베이터를 탔다. 이런 긴장감이 품질 문제를 해결했다”고 말한다. 그 결과 바닥권이었던 미국 자동차조사업체 JD파워의 신차품질 성적은 2001년부터 상승곡선을 탔다.

품질 성공 이면에는 극도의 긴장이

카리스마 리더십은 ‘양재동에 태양은 오로지 1개’라는 말로 요약된다. 사장단 가운데 언론에 칭찬이 나오면 얼마 있다가 좌천된 경우가 있었다. 한눈 팔지 말고 업무에 몰두하라는 주문이다. 2인자 소리가 나오는 것도 결과가 좋지 않았다.

현장경영을 강조하는 것도 아버지의 유산이다. 현대제철 고로를 짓고 있던 2010년에는 토요일에도 헬기를 타고 당진 공사 현장을 20여 차례 다녀오곤 했다. 새벽 6시 반이전 출근도 아버지로부터 배운 습성이다. 토요일도 오전 6시 반에 꼬박 나온다. 현안이 있으면 새벽 4시 반에 일어나 부회장이나 사장에게 직접 전화를 건다. 그러다 보니 현대·기아차 주요 임원들은 늦어도 6시 반 이전에 출근한다. 2011년 하반기 토요일 출근을 자제하라는 지시도 있었지만 6개월 만에 사라졌다.

이런 긴장감이 현대차식 스피드와 공격적인 기업문화를 만들었다. 현대차 임원들의 신분에 대한 불안감은 다른 기업보다 높은 편이다. 재계에서는 국내 재벌 기업 가운데 업무 강도가 가장 높다고 평가한다.

1947년 5월 25일 서울 초동에서 허름한 자동차 수리점을 하던 정주영은 소 판 돈 70원으로 ‘현대토건’ 간판을 내건다. 오늘날 매출 250조원이 넘는 범 현대그룹의 시작이다. 범 현대그룹은 장남 정몽구 회장이 이끄는 현대자동차그룹과 정몽준 고문의 현대중공업그룹, 고 정몽헌 회장의 현대그룹으로 대표된다. 여기에 한라그룹과 KCC·성우그룹도 범 현대가(家)다. 70원으로 시작한 정주영 명예회장은 한국에 중후장대(重厚長大) 산업의 기틀을 다진 벤처기업 1세대로 봐야 한다.

정 명예회장의 경영 철학은 ‘하면 된다’로 대표된다. 그는 계열사 사장단이 지시 사항에 대해 어려움을 토로하면 ‘이봐, 당신 해봤어’라며 채근했다. 이런 경영 스타일이 매사 적극적인 현대그룹의 사풍을 만들었다. 그의 머릿속에는 늘 ‘산업보국(産業報國)’이란 네 글자가 자리 잡고 있었다.

1985년에는 계열사 사장들을 모아놓고 “기업은 이익이 우선이지만 국가에 도움이 되는 것인가를 염두에 둬야 한다. 최고경영자가 자신이 하는 일이 국가발전에 이바지하는지를 올바로 생각한다면 일시적인 패배가 있을지라도 개의치 말라”고 말했다.

정 명예회장은 현장을 중시했다.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직접 뛰면서 답을 찾았다. 사우디아라비아 주베일항 공사 때 일화다. 콘크리트 구조물이 16만 개나 필요했다. 콘크리트를 거푸집에 붓기 위해 150t짜리 크레인 5대를 동원해도 하루 200개밖에 만들 수 없었다.

정 명예회장은 “트럭의 콘크리트를 왜 직접 거푸집에 붓지 않느냐”고 물었다. “콘크리트 배출구가 거푸집보다 너무 낮다”는 답이 돌아왔다. 그는 즉시 믹서트럭의 배출구를 거푸집보다 높일 것을 지시했다. ‘트럭은 개조할 수 없다’는 고정관념을 깬 것이다. 이후 생산량이 하루 350개로 늘어났다.

‘이봐, 해봤어’에는 치밀함이 전제돼

현대그룹에는 정 명예회장을 ‘왕(王) 회장’이라 불렀다. 왕 회장은 치밀함의 대가였다. 그를 보필했던 측근 인사는 “하면 된다는 왕회장의 말씀에는 그냥 밀어만 붙이라는 게 아니라 치밀함이 항상 따라 다녔다”고 말한다. 그는 이런 일화를 소개했다.

“1977년 주베일항 공사 기간을 앞당기기위해 철골구조물에 바지선 2대를 연결해 울산에서 주베일로 수송하기로 했다. 19번을 왕복하는 프로젝트였다. 당시 해외 보험사는 ‘처음 보는 경우’라며 엄청난 가격을 불렀다. 보험료를 내면 남는 게 없을 정도였다.

왕 회장님은 보험을 들지 않고 운항하는 방안을 강구했다. 문제는 인도양 지역에 태풍이 많은 시기였다. 컴퓨터도 없을 때라 기상청에서 수년 간의 태풍 진로 자료를 받아 손으로 일일이 그리면서 분석했다. 이런 치밀함 덕분에 안전하게 납품할 수 있었다. 문제는 측근들이 성공의 결과만 본다는 것이다. 운이 좋았다든지, 역시 하면 된다는 식으로 이해를 한다. 왕회장의 치밀한 분석과 판단력은 보지 못한 것이다.”

정 명예회장은 1992년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기 전까지는 모든 일에서 승승장구했다. 하지만 낙선하면서 개인사나 사업에서 극심한 고통을 겪었다. 대선 이후에는 현대그룹 경영에서 한 발 물러서 대북 사업에 치중했다. 특히 1999년부터 그룹 승계를 둘러싸고 불거진 내분은 2001년 3월 21일 86세로 타계할 때까지 아픔을 주었다.

201312호 (2013.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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